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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고등어 어장이 형성된 성산포 앞바다 ... 고등어잡이 배.어부 운집(雲集)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고등어 산지(山地)를 전남 제주도(全南 濟州島)와 경남 북강원(慶南 北江原) 함남북 등지(咸南北 等地)라 소개(紹介)하엿슴을 볼진대 약 사백년 전부터 고등어 어군(魚群)이 전남 제주도(全南 濟州島)에서 동방 부산(東方 釜山)을 지나 동해(東海)로 향(向)하얏엇든 것이오(동아일보, 1939년 7월 5일).

 

고등어의 치어(稚魚) 오,육촌(寸)짜리는 멸치와 함께 섞어 흘러들어 오는데 초기에는 그 수가 적지만 팔, 구월 경에는 그 양이 많아져 도리어 멸치가 소량으로 섞이게 될 정도도 된다. 성어기(成魚期)는 가을 구월 경부터 봄 이월경까지 어화(漁火)로 밝히는 외줄낚시(一本釣)로 어획된다. 이 경우는 전갱이나 갈치와 혼획(混獲)되는 일이 많다. 도민들은 날것으로 판매하는 외에 염장(鹽藏)을 하기도 한다(한국수산지 권5 제주도, 1905).

 

본도는 대만(臺灣) 남서쪽에서 흘러내린 난류(暖流)가 오스미(大隅)해협 서쪽에서, 본류(本流)에서 분리된 지류(支流)가 연안을 씻고 쓰시마(對馬)해협을 향해 흘러가는 곳으로 부터 난류를 따라 참치나 가다랭이 등의 난류어족을 우리 연안으로 유치해 온다. 또 삼치 고등어 멸치와 같이 난류(暖流)를 좋아하지만 또한 한조(寒潮)도 두려워하지 않는 어족들도 많다(남국의 보고 제주도, 1924).

 

당시 제주바다에서 잡히는 어족(魚族)은 멸치, 고등어, 전갱이, 참치, 가다랭이, 방어, 넙치, 삼치, 도미, 황돔, 혹돔, 갈치, 옥돔, 저립, 청새치, 조기, 숭어, 붉돔, 볼락, 놀래기, 성대, 갯장어, 상어, 은어, 뱀장어, 오징어, 전복, 왕새우, 소라 등이고 해조류는 미역, 감태, 우무가사리, 도박, 톳, 모자반, 김 등이 있었다.

 

요즘에야 등 푸른 생선으로 각광 받으며 고등어회, 고등어조림, 고등어초밥 등 고등어 요리가 제주를 대표하는 별미음식으로 각광을 받고 있어 국내산만으로는 모자라 멀리 북유럽산 고등어도 사다 먹는 형편이지만 과거에는 처치 곤란할 정도로 고등어가 많이 잡혔다고 한다.

 

제주 앞바다에 고등어 어장(漁場)이 형성되어 고등어가 많이 잡히다 보니 성어기에 고등어를 잡으려는 고등어잡이배 40척, 어부 천명이 성산포 앞바다에 운집(雲集)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우연한 일로 마을주민들과 충돌하여 사상자가 발생했던 사건도 있다.

 

1927년 5월 16일 정의면 성산포 고성리에서는 중앙청년회(中央靑年會) 주최로 씨름대회를 개최하여 마을 씨름판을 벌리고 있었다. 그날 씨름대회에는 바다 상황이 좋지 않아 고등어잡이를 나가지 못해 성산포항에 정박하여 있던 어부 수백 명도 씨름대회를 관람하러 왔다.

 

그런데 그 중 어부 한명이 자원(自願)하여 씨름경기에 참가했지만 졌다. 씨름에 진 이 어부는 결과를 승복하지 않고 심판원에게 재경기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재경기를 거절당해 화가 난 어부가 그 씨름판을 방해하려 하자 심판원은 그 어부를 관람석으로 밀어내게 되고, 이를 본 다른 어부가 나서 ‘심판원의 처리가 부당하다’며 심판원의 뺨을 쳤다.

 

이를 본 마을사람들이 심판원의 뺨을 때린 어부를 힐난하게 되었고 이를 본 약 이백여 명의 어부들이 일어나 ‘돌격하라’며 ‘소요(騷擾)’를 야기했던 것이다. 어부들은 그 주위에 있던 죽봉(竹棒)으로 책걸상과 마을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난타(亂打)하야 수십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모처럼 씨름대회를 개최한 것이 어부들의 폭행으로 방해되어 중지케 되고 또 리민(里民)에게 다수한 부상자까지 내이게 된 것을 대단히 분한(憤恨)히 여기고 있는 중에 과거 성산진(城山津) 리민을 습격한 사실이 있고 또 간혹 어부들이 작당하야 마을사람들에게 작폐를 하는 일이 많았음으로 이번도 그런 폭거(暴擧)가 있을 것을 위구(危懼)하야 이 기회에 차라리 리민(里民)에게 기선(機先)을 주어 성산진에 있는 어부들을 습격(襲擊)하야 어쩔 수 없게 하는 것이 득책(得策)” 이라며 씨름대회를 주최한 중앙청년회 대표자를 주축으로 마을사람 오백여명이 성산진에 있던 어부들을 습격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일본인 어부 한명과 조선인 어부 한명은 현장에서 중상을 당하여 그 다음날 사망했고 양쪽에서 수십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했다.

 

지난 십구일 총독부 경무국에온 전라남도경찰부장의 정보에 의지하면 지난 십륙일 오후 네시쯤 제주도 정의면 고성리(濟州島 旌義面 古城里)에서는 정신회(旌新會) 주최의 운동회가 개최된바 그때에 맛츰 동면 성산포(城山浦)에 뎡박 중이든 고등어배의 어부 이백명(일본인 이십명)이 상륙하야 그 지방사람과 씨름(脚戲)를 하다가 조그만한 일로 말닷툼하던 것이 필경 큰 격투기가 되야 지방사람 다수 부상하엿슴으로 그 복수로 배로 도라 가랴든 어부들을 함부로 따리여 지방사람 아홉명과 어부 열네명(일본인 여섯)의 중상자가 생긴 중 다섯명은 생명이 위독하게 되얏는데 이 급보에 접한 전남경찰부에서는 당시 성산포항구에는 고등어배가 사십척에 어부가 일천명이나 잇섯슴으로 만일을 념려하야 응원 경관 이십명과 공의 일명을 급파하야 엄중한 경게망을 펴고 범인 등을 수사 중인바 그 후의 정보에 의지하면 전기 중사자중에 일본사람 한명과 조선사람 한명은 필경 사망하엿다더라(동아일보 1927년 5월 20일).

 

이 사건을 맡은 광주지방법원은 처음 보는 큰 공판이라 기존 법정에서 재판을 진행할 수 없어 이 사건을 위해 새로이 큰 법정을 신축하였다. 이 공판은 신법정이 준공된 이후 소요(騷擾) 및 상해(傷害), 상해치사(傷害致死)라는 죄명으로 광주에서 열리게 되었다.

 

지난 오월 십륙일에 제주도 성산포(濟州島 城山浦)에 잇는 중앙청년회(中央靑年會) 주최로 각희대회(脚戲大會)를 개최하엿는데 마츰 그 당시 성산포에 뎡박(定舶)중이던 어선(漁船)에서 선부 이백여명이 상륙하야 전긔 씨름판에 갓섯다가 사소한일로 말성이 되어 선부 이백여명과 도민 천여명의 사히에 충돌이 생겨서 형세가 험악하엿슴으로 성산포주재소에서는 제주경찰서에 뎐화로 응원을 청하여다가 겨우 진압은 하엿섯다는대 그때의 충돌로 인하야 중경상자가 도민은 아홉명 어부측은 열여덜명을 내엇슬뿐외라 어부 중 일본사람과 조선사람 두사람이 마저 죽엇슴으로 경찰은 쌍방에서 백여명의 혐의자를 검속하야 목포디방법원(木浦地方法院)으로 넘겻슴으로 석달동안 예심중에 잇다가 지난 팔월이십일에는 도민측으로 청년회장 외에 사십오명과 어부측으로 네사람을 합하야 오십명을 광주로 넘기고 그 남어지는 면소되엿섯는데 광주디방법원에서는 이 사건을 위해서 새로히 큰 법정을 건축 중 근번에 준공되엿슴으로 공판을 열게 되리라더라(조선일보 192711월 14일).

 

제이회 공판은 예정과 가티 지난 십팔일 오전 열한시부터 광주디방법원 제이호법뎡에서 금자(金子)재판장의 담당으로 문(文) 안뎐(安田) 량배석판사와 횡뎐(橫田)검사의 간여 하에 개뎡되엇는데 방청석은 멀리 제주에서 온 피고들의 가족들과 광주 각 사회단톄 대표로 립추의 여디가 업시 긴장되엇스며 횡뎐검사로부터 좌그와 가튼 구형이 잇슨후 변호사 촌상(村上)씨와 서광설(徐光卨)씨의 변론을 마치고 오후 한시에 휴정하엿다가 다시 두시십분부터 게속하야 변호사 암교(岩橋) 김재천(金在千) 송화식(宋和植) 리의연(李儀衍) 등의 열열한 변론을 맛치고 다섯시 삼십분에 페뎡하엿다더라(조선일보 1927년 11월 20일).

 

제주에서 온 피고들의 가족들과 광주지역 사회단체 대표들로 방청석을 가득 메운 이날 재판에서 피고인 오십명 전부는 각각 6년, 3년, 2년, 1년6개월, 1년의 징역을 구형받았다.

 

고등어는 이 사연을 기억하고 있으려나? 일명 고등어사건! 다소 황당한 얘기로 비춰질 수 있으나 그 소재와 줄거리,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상징은 지금에도 곰곰이 되씹어 보기에 충분하리라 본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제주대 사범대를 나왔으나 교단에 서지 않고 동국대에서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2011) 학위를 받았다. 제주도 경제특보에 이어 지금은 지역산업육성 및 기업지원 전담기관인 제주테크노파크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겸임교수로 대학,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등이 있으며『문화콘텐츠기술과 제주관광산업의 융복합화연구』(2010),『제주형 첨단제조업 발굴 및 산업별 육성전략연구』(2013),『제주자원기반 융복합산업화 기획연구』(2011) 등 보고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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