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제 도입 논쟁이 정치권 화두로 떠올랐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배고픈 사람이 빵은 먹을 수 있는 물질적 자유 극대화가 정치의 목표”라며 먼저 제기했다. 성남시장 시절 기본소득 개념의 ‘청년배당’ 제도를 시행했던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가능한 범위에서 시작해 점차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력 대선주자인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기본소득제 취지를 이해한다”며 찬반 논의를 환영한다고 밝혔다. 이와 달리 박원순 서울시장은 “전 국민 기본소득보다 전 국민 고용보험이 필요하다”며 다른 주장을 제기했다. 홍준표 무소속 의원은 페이스북에서 “기본소득제는 사회적 배급주의”라며 불가론을 폈다. 기본소득 논의가 진보와 보수를 넘어 빠르게 확산하는 모습이다.
기본소득은 일을 하든 하지 않든, 재산이 많든 적든 간에 정부가 국민에게 일정 금액을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것이다. 일회성이며 가구 단위로 지급된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긴급재난지원금’과는 성격이 다르다.
사실 기본소득은 실현 가능성이 낮은 이상적 제도로 간주돼 왔다. 그러다가 논의가 본격화한 것은 2016년 유럽과 북미 국가들에서다. 핀란드가 2017년 기본소득을 시범 도입했다. 스위스는 2016년 6월 기본소득 도입안에 대한 국민투표 결과 76.7%가 반대해 무산됐다. 캐나다 온타리오주는 2017년 도입했다가 재정 문제에 봉착해 1년 만에 중단했다.
영국 왕립예술협회도 매달 308파운드(약 50만원)를 지급하는 기본소득 방안을 제안했다. 미국에서도 진보 성향 싱크탱크인 브루킹스연구소가 “노동시장이 더 이상 소득 불균형 완화 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것”이라며 기본소득을 고려해야 할 시점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2016년 무렵 기본소득 논의가 활발했던 배경은 복지체계의 한계에 있었다. 일을 하는지, 재산은 얼마인지, 부양가족은 몇인지 등을 따져 사회보장 급여를 지급하는 복지체계가 양극화 해소에 별 보탬이 되지 못해서였다. 선별적 복지 지원을 하기 위해 대상을 선정하는 데 들어가는 인력과 비용도 적지 않았다.
4차 산업혁명 등 기술 진보에 따라 로봇과 인공지능(AI) 등이 사람 일자리를 대체하는 속도가 빨라지며 대량실업이 현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작용했다. 2016년 스위스 다보스포럼은 2020년까지 화이트칼라 등 일자리 500만개가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2016년 20대 총선 때 녹색당과 노동당에서 각각 월 40만원과 30만원씩 기본소득을 지급하자는 공약을 내놓았다. 국회 입법조사처도 기술발달에 따른 구조적인 일자리 감소에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이라며 한국도 기본소득을 검토해야 한다고 국회에 권고했다.
관건은 재원이다.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을 위해 책정한 예산이 14조2000억원이었다. 전 국민에게 1인당 월 10만원씩만 지급하는 데에도 연간 60조원 이상 재원이 필요하다.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 만큼 효과가 검증되지 않아 국가 단위에서 기본소득 제도가 시행된 적은 없다. 그런데 국내에선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을 계기로 소비진작 차원의 기본소득 효과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2년이 남지 않은 20대 대선(2022년 3월)을 겨냥해 여야 정치권이 의제를 선점하기 위해 군불을 때는 측면도 있다.
우리 재정 현실을 보자. 올해 재정적자가 112조원, 세수는 18조원이나 모자란다. 기본소득 지급을 시작할 수 없는 여건이다. 도입한다면 증세는 물론 기존 복지제도의 통폐합과 연금까지 포함한 사회보장 체계 전반을 재설계해야 한다.
가장 먼저, 오랜 동안 기본소득 제도를 시행한 핀란드가 지난 6일 실험 최종 보고서를 내놓았다. 2000명 실업자에게 2년간 조건 없이 매달 기본소득 560유로(약 76만4000원)를 지급하고, 기본소득을 받지 않은 비수급 실업자와 스트레스 수준, 취업률 등을 비교했다. 핀란드 사회보장국 보고서는 ‘행복감 제고에 약간의 효과 있음, 근로의욕 고취 결과는 별로 없음’으로 요약된다. 스위스에서 매달 2500스위스프랑(약 300만원)을 주자는 법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된 이유는 근로의욕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한 국민이 많아서였다.
정치권에서 ‘정쟁’이 아닌 기본소득제 등에 대한 ‘정책 논쟁’을 시작한 것은 바람직하다. 그렇다고 여야 정당과 대선주자들이 표를 노린 포퓰리즘 경쟁으로 치달아선 안 된다. 재원 마련과 복지체계 수술 등 구체적 실행방안을 제시하고, 더욱 책임 있는 자세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양재찬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