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제주에서 전승되는 무속의례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제주큰굿'이 최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습니다. 제주 무속 의례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는 1980년 '제주칠머리당영등굿' 이후 41년 만에 이뤄진 큰 경사입니다. 제주큰굿과 영등굿, 잠수굿, 당굿 등 다양한 제주의 굿은 풍부한 제주신화와 함께 마을 공동체에 전승되는 소중한 무형문화유산입니다. 다른 지역과 달리 특별한 위상을 지니는 제주굿의 가치와 전승 위기, 보존방안 등에 대해 일주일 간격으로 5차례에 걸쳐 살펴봅니다.] |
바다로 둘러싸인 섬 제주.
유배지로 악명이 높아 뭇사람들에게 제주는 '창살 없는 감옥'이자 '피하고 싶은 변방'이었다.
외부와 철저히 격리된 섬이란 지형 조건은 제주 사람들에게 역경이자 고난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지역과 다른 독특한 무형문화유산을 남겼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제주의 굿으로 대표되는 무속신앙이다.
◇ 신과 함께하는 섬 제주
제주에서는 예부터 1년을 주기로 때마다 행하는 중요한 세시풍속이 있다.
대대로 이어지는 이 고유한 행사와 풍습은 대체로 제주 섬 곳곳에서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관장하는 수많은 신(神)과 깊은 연관이 있다.
우선 제주에선 다른 지역에서 보기 어려운 독특한 이사철인 '신구간'(新舊間)이 있다.
'신구세관교승기간'(新舊歲官交承期間)의 줄임말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관(官)은 바로 신을 의미한다.
제주에 있는 신들이 임무 교대를 위해 하늘로 올라가는 기간이 신구간이다.
보통 24절기의 하나인 대한(大寒) 이후 5일째(올해 양력 1월 25일)부터 입춘(立春) 전 3일(〃 2월 1일)까지다.
바로 '신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사를 해야 동티(신의 성냄으로 인한 재앙)가 나지 않는다는 믿음에서 이런 풍습이 이어져 왔다.
또 제주에는 마을마다 있는 신당(神堂)을 중심으로 신과의 특별한 만남이 이뤄진다.
예를 들어 제주 신당의 원조 격인 송당 마을에선 매년 정월 13일(음력 1월 13일)에 신과세제(神過歲製)라는 마을제를 연다.
신과세제는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 주민과 학자, 예술인, 관광객들도 참여하는 당굿이다.
새해를 맞아 마을을 지키는 신께 감사의 세배를 올리고 가정에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하는 날이다.
올해는 오는 2월 13일 열릴 예정이다.
이날 심방('무당'을 뜻하는 제주어)은 당굿을 하면서 마을이 생겨난 유래를 담은 송당본풀이를 노래한다.
제주에선 신들의 이야기인 '신화'를 본풀이라 일컫는다.
굿에서 본풀이를 읊어 신을 칭송하고 신을 기쁘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바를 신에게 기원하고 신들이 도와주길 바란다.
비단 송당에서뿐만 아니라 제주 수많은 자연 마을에서 새해를 맞아 이 같은 당굿이 펼쳐진다.
국내에서도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장관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대부분 사라졌거나 변형된 형태로 일부 남아 있을 뿐이지만 제주에선 여전히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왜 그럴까?' 생각을 하다 보면 결국엔 주민들이 마을의 뿌리를 공유하고, 공동체의 무사안녕을 함께 비는 소박한 믿음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제주의 민속학자 문무병 박사에 따르면 제주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본향'(本鄕)이라고 했다. '어머니의 몸에서 나와 탯줄을 태워 묻은 땅이자 뿌리를 내린 땅'이란 뜻이다.
제주의 마을에는 마을을 지켜주는 '본향신'(本鄕神)이 있고, 신을 모신 신당인 '본향당'(本鄕堂)이 있다.
신이 마을과 각 가정을 지켜주는 건 물론 농사와 해상 안전, 치병(治病), 산육(産育) 등을 관장한다고 믿는 본향당 신앙은 마을을 중심으로 전승된다.
이 과정에서 대대로 제주 사람들은 신앙을 통해 형성된 마을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신과의 만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바뀌는 전환기에 영등굿이 펼쳐진다.
해마다 음력 2월 초하룻날(올해 3월 3일)이 되면 바람의 신인 '영등할망'이 아득히 먼 바람의 궁전에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제주를 찾는다.
구름치마를 휘날리며 바람을 몰고 온 영등할망은 보름 동안 제주 섬 곳곳에 풍요와 생명의 '씨 뿌림'을 한다.
경작지에는 곡식 씨앗을, 바닷가에는 소라·전복·우뭇가사리·미역 등 온갖 생명의 씨앗을 뿌리고 복숭아꽃·동백꽃을 피워 봄기운을 돋운다.
제주의 무수한 신들과 조우한 영등할망은 열닷새째 우도를 거쳐 자신이 사는 곳으로 돌아간다.
시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제주 각 마을에선 보름 동안 영등굿을 통해 다시 제주를 찾은 신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올 한해 풍요를 간절히 기원하며 봄을 반긴다.
신과세제, 영등굿 외에도 하절기에는 장마철 곰팡이가 슬어 눅눅해진 신당과 신의(神衣)를 꺼내 말리는 의례인 마불림제, 풍년 농사에 보답하기 위해 본향신에게 감사드리는 추수 감사 의례인 '시만국대제' 등이 이어진다.
이외에도 어업·농업·목축 등 생업과 관련해 다양한 마을제가 열린다.
말과 소 등 목축의 풍요를 기원하는 테우리('목동'을 뜻하는 제주어) 고사가 중산간 마을을 중심으로, 풍어(豊漁)와 조업 안전을 염원하는 해신제와 잠수굿이 바닷가 마을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개인, 가정, 마을 공동체에 크고 작은 문제가 있을 때마다 큰굿, 작은 굿의 형태로 신을 찾는다.
사실상 1년 12달 내내 신과 함께하는 셈이다.
삶을 이어가게 하는 생업의 풍요와 안전, 그리고 가정과 마을공동체의 평안을 기원하는 신앙.
제주에선 '삶이 곧 신앙'이다.
이 과정에 언제나 '굿'이 존재한다.
인간이 신과 만나기 위해 행하는 의례인 굿은 제주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 "한을 풀고 아픔을 나눠" 제주 굿의 가치
저승질이 왓닥갓닥 / 탕댕기는 칠성판아 / 잉엉사는 맹정포야 / 못홀 일이 요일이여/ 모진광풍 불질말라'(저승길이 오락가락 / 타고 다니는 칠성판아 / 이어 사는 명정포야 / 못 할 일이 요일이네 / 모진 광풍 불지 마라)
제주어로 된 해녀 일노래를 보면 옛 제주 사람들의 삶의 애환을 엿볼 수 있다.
해녀들은 바다에서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외줄을 타듯 힘겨운 삶을 이어왔다.
해녀들의 일노래에서처럼 바다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물질'은 칠성판(七星板, 관속에 까는 널조각)을 타고, 명정포(銘旌布, 망자의 관직이나 성명이 적힌 관을 덮는 천)를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할 만큼 위험하고 힘든 노동이었다.
제주에선 예나 지금이나 해녀들이 조업 중 탈진해 숨지는 사고가 해마다 여러 건씩 발생한다.
아무리 강인한 제주 여성인 해녀들이라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이다.
그들에게 의지할 곳은 다름 아닌 '신'이었다.
자신과 동료를 지켜주길 바라는 마음, 바다에서 해산물을 많이 채취해 가족을 건사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은 그대로 무속신앙으로 이어졌다.
비단 해녀뿐만 아니라 제주 사람들 속에 신에 대한 믿음과 '굿'으로 대표되는 의례가 여전히 제주에선 주민 삶 속에 그대로 힘을 발휘하며 이어져 오고 있다.
공동체에 닥친 커다란 문제를 도닥이며 마음에 맺힌 한을 풀고 함께 난관을 해결해나가는 힘을 불어넣는 역할도 한다.
그러한 일례로 '4·3 해원상생굿'이 대표적이다.
제주 4·3은 70여 년 전 해방 직후 이념충돌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고한 제주도민 수만 명이 국가의 부당한 폭력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이다.
4·3 해원상생굿은 해마다 제주 각 마을과 학살 터 등에서 약 3만 명에 달하는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동시에 살아남은 자들의 아픔을 달랜다.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 굿은 아니지만, 제주 민간의 신앙과 굿의 역할을 충분히 설명해준다.
지난 2014년 4월 19에는 4·3 해원상생굿 과정에서 세월호 사고 실종자들의 생환을 기원하기도 했다.
"세월호 273명 생명의 끈을 놓게 허지 마랑, 살려줍서. 구조자 눈에 띄게 허여줍서. 눈에 띌 동안 요왕(용왕을 뜻하는 제주어)에서 맑은 공기로 아기덜 살려줍서…."
당시 굿을 집전한 제주큰굿보존회장 서순실 심방은 제주도민 전체의 간절한 바람과 함께 제줏말로 용왕님께 정성을 다해 빌었다.
이것이 제주의 굿이다.
신에게 구원을 바라는 건 불교, 천주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전 세계 널리 퍼진 종교에서도 공통으로 이뤄지는 일이다.
무속신앙 역시 믿음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한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종교다.
특히 제주에선 신앙을 통해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돕는 공동체의 명맥이 도내 전역에 이어지고 있다.
지역 마을마다 신당이 남아있고, 단골(신앙민을 뜻하는 제주어)들이 여전히 신당을 찾는다.
물론 해마다 참여 주민의 비율이 줄어들고 있으나 마을제, 당굿의 전통은 살아있는 신앙으로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과 달리 다양한 신화가 고스란히 남아 종교적 믿음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도 매우 큰 특징이다.
이 때문에 굿으로 대표되는 제주의 신앙이 다른 지역과 달리 독특한 위상을 가진다는 게 연구자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제주대 허남춘 교수는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 늘 죽음과 맞서야 했던 제주 사람들에게 있어 자신을 도와줄 신도 산과 바다, 하늘, 집안 등 바로 곁에 있어야 했다"며 "당시 무속신앙은 유교나 불교보다도 더 유용한 측면이 있었고 사람들은 중요한 삶의 원리로 여기고 살아왔다"고 설명했다.
허 교수는 "한반도 내에서 신화적 이야기가 많이 사라졌지만, 제주는 원시·고대적 문화의 원천을 잘 지켰기 때문에 (굿과 신화 등) 가진 것이 많은 섬으로 재탄생했다. 우리의 것이기에 더욱 소중하다"고 말했다. [연합뉴스=변지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