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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기획] 조선시대부터 근현대 이르기까지 '미신·이단'이란 오명
난개발로 신당 파괴…무관심·코로나19로 전통 단절 위기

1만8천 신(神)들의 고향 제주.

 

 

제주 마을 곳곳에는 신들이 자리 잡은 신당(神堂)이 있고, 다양한 신들의 이야기(신화, 神話)가 전해 내려온다.

 

제주의 마을 주민들은 예부터 이들 신당과 신화를 중심으로 공동체 결속을 강화하고, 오랜 믿음을 이어오고 있다.

 

'굿'으로 대표되는 제주의 전통신앙은 주민들의 다양한 삶의 애환과 자취가 그 속에 녹아들어 있어 역사·문화적으로 가치가 있지만, 미신이라 일컬어지며 오랜 기간 수난을 당했다.

 

조선시대에선 중앙정부의 탄압을, 개화기에는 타 종교의 박해를, 현대에 들어서는 새마을운동과 난개발 과정에서 속절없이 사라져 가고 있다.'

 

◇ "언제 사라질지 몰라" 위기의 전통신앙

 

조선시대 제주의 화공(畵工) 김남길이 그린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보물 제652-6호)를 보면 눈길을 사로잡는 부분이 있다.

 

총 43면으로 이뤄진 탐라순력도 중 39번째 그림인 '건포배은'(巾浦拜恩)이다.

 

1702년 12월 20일 제주의 관리 300여 명이 관덕정과 건입포구에서 임금의 은혜에 감사의 절을 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특히, 그림 중간 부분을 보면 한라산 중턱과 제주성 밖 민가 사이에 신당들이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불타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

 

그림 아래 간략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는데 '불에 타 없어진 신당이 129곳, 훼손된 사찰이 5곳, 285명의 무격(남녀무당)을 농업으로 돌려놓았다'고 밝히고 있다.

 

이 그림은 1702년 제주에 부임한 이형상 목사(牧使)에 의해 벌어진 신당 파괴 사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당시 '당(堂) 오백과 절(卍) 오백을 파괴했다'는 이야기가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데, 집으로 된 신당뿐만 아니라 바위와 나무 등 자연물로 이뤄진 신당까지 철저하게 파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성리학적 질서를 근본이념으로 삼은 조선이 제주에 오랫동안 이어진 전통신앙을 뿌리째 뽑고 제주사회를 유교사회로 변화시키기 위한 국가 차원의 탄압이었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그리스·로마 신화와 달리 굿을 통해 전해 내려오는 제주신화가 국내에서조차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과거 서양에서도 우리나라의 무당과 같은 제사장이 있었고, 다양한 신화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왔다.

 

그리스·로마 신화는 일찍부터 제사장이 아닌 수많은 역사가와 문학가들에 의해 문자로 기록되면서 예술성을 극대화했지만, 우리나라에선 건국신화 정도만 알려졌을 뿐 민간에서 전해 내려온 제주신화 등이 학자와 문인들에 의해 기록되는 일은 없었다.

 

전통신앙을 미신(迷信), 음사(淫祀)라 일컬으며 배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신앙은 백성들 사이에 노래와 이야기 등을 통해 굳건히 자리를 잡으며 명맥을 이어갔다.

 

근현대 들어서도 제주 전통신앙에 대한 탄압은 이어졌다.

 

임금으로부터 '여아대'(如我待, 짐을 대하듯 하라)라는 특별한 증표를 받은 천주교 신부들이 포교를 위해 1899년 제주에 내려오면서부터다.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까지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학살당하는 등 천주교는 극심한 박해를 받았지만, 1886년 조불 수호조약 등이 체결되면서 천주교는 포교의 자유를 얻게 됐다.

 

당시 선교사들은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와 함께 제주의 전통신앙을 이단이라 배척하면서 마을의 신당을 파괴하는 등 무리한 포교 활동을 벌였다.

 

 

결국 천주교의 교세 확장 과정에서 발생한 폐단인 '교폐'(敎弊)와 세금징수의 폐단인 '세폐'(稅弊)가 원인이 돼 1901년 민란이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제주 출신 현기영의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 이정재·심은하 주연의 영화 '이재수의 난'으로 알려진 신축항쟁이었다.

 

천주교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자리 잡는 과정에서도 제주 전통신앙에 대한 배척은 마찬가지로 이뤄졌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4·3사건 등 무수한 역사적 사건 등을 겪으면서 위기를 맞았다.

 

특히, 1970년대를 전후한 새마을운동 과정에서 벌어진 일련의 미신타파 운동은 충격적이다.

 

당시 경제성장에 열을 올리던 박정희 정권은 미신타파란 명분으로 행정력을 동원해 전국 방방곡곡의 장승과 서낭당, 신당 등을 강압적으로 훼손, 철거했다.

 

얼마나 일사불란하게 이뤄졌는지 '한국의 새마을운동과 생활변화'(남근우)에 따르면 서낭당과 같은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전국의 제당(祭堂) 3분의 2 정도가 파괴됐다고 한다.

 

제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당시 공무원으로 재직했던 A(84)씨는 "새마을운동 때 변소 개량, 신당 파괴 등으로 제주 고유 풍속이 많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할망당, 해신당, 애기당 등 신당을 없애는 데 동티(신의 성냄으로 인한 재앙)가 날까 봐 공무원도 철거인력도 무서워했다"며 "그래서 '관명'(官命, 조정 또는 정부에서 내리는 명령)이라고 쓰고 군수 직인이 찍힌 종이를 변소, 신당 등에 붙여서 많이 부셔 없앴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게다가 무속인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굿을 벌여야 했다.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이자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주칠머리당영등굿' 보유자인 김윤수(76) 심방은 "당시 사라봉 굴속에서 굿을 하기도 했고, 소나무 숲속에 천막을 치고 몰래 굿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대중매체에 의한 왜곡도 심각했다.

 

당시 만들어진 한국 영화에서 굿, 무당 등 무속신앙은 사악하고 부도덕한 잡신 등 부정적으로 그려지거나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로 그려지면서 사람들에게 일종의 편견을 심어주기도 했다.

 

최근 들어서는 각종 개발사업으로 인한 신당 훼손도 이어졌다.

 

2010년대 초반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리의 한 신당은 호텔 주차장을 만드는 과정에 파괴됐다.

 

또 제주시 도평동 본향당인 대통밧당과 조천읍 함덕 본향당은 공동주택이 건립되는 과정에서 그 원형이 크게 훼손됐다고 한다.

 

제주시 오등동 죽성마을 본향당인 '설새밋당'은 지난 2013년 12월 누군가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이외에도 제주 제2공항 건설 등으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처한 마을과 신당도 상당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도내 수백 개의 신당 가운데 송당본향당과 와흘본향당 등 5곳만 제주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돼 보호를 받고 있다.

 

나머지는 비지정 문화재로, 마을 차원에서 관리되거나 상당수가 사유지에 자리 잡고 있어 언제 사라질지 모를 위기에 처해 있다.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도내 각 마을에서 이뤄지던 마을제 역시 그 규모가 축소되거나 끊기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참여 인원이 줄어들었지만, 코로나19 방역지침에 따른 인원 제한, 식사 금지 등 규제가 이어지면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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