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한라산에 오른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1974년부터 한라산 탐방객 수가 조사된 이후 올해로 50년째에 접어들면서 지난 3월까지 2690만명이 넘는 많은 사람이 한라산을 찾았다.
봄·여름·가을·겨울 할 것 없이 한라산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내며 계절마다 축제의 무대로 변신한다.
급증하는 등반객으로 인해 한라산 훼손이 심각해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 사시사철 축제의 무대 한라산
한라산의 봄은 천천히 느리게 온다.
해발 1950m 남한 최고봉 한라산 정상엔 간혹 봄이 되도록 흰 눈이 덮인 풍경을 볼 수 있다.
옛날엔 초여름인 음력 5월까지도 한라산에 잔설이 남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다.
노란 유채꽃과 분홍빛 벚꽃, 초록초록 푸르게 돋아나는 청보리 너머로 한라산 백록담에 하얀 눈이 쌓인 모습은 이질적이면서도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준다.
그래서 '녹담만설'(鹿潭晩雪)을 제주의 뛰어난 경관 10가지를 일컫는 '영주십경'(瀛州十景)으로 꼽는다.
여기서 '만설'은 눈이 가득 쌓인 모습을 뜻하는 만설(滿雪)이 아닌 때늦은 눈을 뜻하는 만설(晩雪)이다.
한라산 고지대에 비로소 봄을 알리는 건 무얼까.
털진달래다.
4월 중하순이면 해발 1400m 이상 고지대에서 분홍빛 꽃잎을 하나둘 터뜨리기 시작한다.
털진달래가 절정을 이루는 5월이 되면 이에 질세라 산철쭉이 꽃을 피운다.
산철쭉이 만개하는 5월 말에서 6월 초까지 한라산은 이들 봄꽃의 향연으로 분홍색 융단을 깔아놓은 듯 멋진 장관을 연출한다.
만세동산, 윗세오름, 장구목, 방아오름, 선작지왓 등 산 곳곳에 활짝 핀 산철쭉은 한라산의 다양한 지형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한다.
한라산 최대 군락지로 손꼽히는 해발 1600m의 선작지왓과 윗세오름 서북쪽의 만세동산 일대 산철쭉은 강풍과 한파에 적응하느라 수형이 거북 모양으로 납작 엎드린 고산지역의 앙증맞은 모습으로 등산객을 맞는다.
이때쯤 어김없이 '한라산 철쭉제'가 열린다.
한라산 산신(山神)께 안전산행과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제의를 올리고 산철쭉을 감상하며 산을 오르는 등반대회다.
한라산 철쭉제는 1967년 5월 21일 제1회 행사를 개최한 뒤 어느덧 올해 57회째를 맞는다.
올해 행사는 6월 4일 진행된다.
여름이 되면 시원한 계곡과 나무 그늘이 무더위에 지친 사람들을 초대한다.
남한 최고봉 높이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한라산이 품은 360여 개의 오름을 오르며 더위를 피한다.
한라산 백록담까지는 온종일 걸어 오른 뒤 내려와야 하지만 오름 등반은 남녀노소 누구나 반나절이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 때문에 2000년을 전후해 오름 열풍이 제주는 물론 전국에 불면서 직장인 동호회, 청소년 오름 축제, 오름 사랑 마라톤 대회, 오름 야영 캠프 등이 잇따라 만들어지기도 했다.
가을 한라산은 노랗고 빨간 울긋불긋 색동옷으로 곱게 갈아입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한라산 최고의 단풍 명소로는 용진각 계곡과 왕관릉, Y계곡, 영실기암, 탐라계곡 등이 꼽힌다.
특히 영실기암 단풍은 500여 개의 기암괴석 사이로 울긋불긋 물들어 한라산 가을 단풍의 백미로 꼽힌다. 마치 아름다운 한 폭의 병풍이 눈 앞에 펼쳐진 듯하다.
관음사 탐방로의 뾰족 솟은 삼각봉 주변으로 물든 단풍도 손꼽히는 절경을 자아낸다.
새하얀 설국으로 변한 겨울 한라산은 그야말로 겨울왕국이 따로 없을 정도다.
웅장한 백록담과 안개 사이로 보이는 한라산 기암절벽 모두가 흑백이 조화로운 동양화를 걸어놓은 듯 황홀한 설경을 보여준다.
매서운 찬바람을 이겨낸 구상나무는 하얀 솜옷을 걸쳐 크리스마스트리를 연상케 하며 등반객들을 유혹한다.
봄에 철쭉제가 열리듯 겨울에는 만설제(滿雪祭)가 1974년 1월 13일 처음 열린 뒤 올해로 제50회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조국의 평화통일과 산악인들의 무사 산행을 기원하는데 도내 산악인은 물론 다른 지역에서도 많은 산악인이 찾아올 정도다.
◇ 한라산 탐방객 100만명 안팎
제주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한라산, 그 정상에는 누가 가장 처음으로 올랐을까.
믿거나 말거나지만 제주 창조 신화에는 '설문대 할망'이라는 거대한 여신(女神)이 한라산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설문대 할망이 삽으로 일곱 번 파서 던지니 한라산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제주 곳곳에 있는 오름들도 설문대 할망이 치마에 흙을 담아 옮기는 과정에서 흙덩어리가 떨어져 생긴 것이라 한다.
한라산을 만들었으니 첫 번째로 오른 주인공 역시 설문대 할망이라는 이야기다.
외국인으로는 진시황의 명을 받아 불로장생의 불로초를 캐러 제주에 온 서복(徐福) 일행이라는 말도 나온다.
서복이 선남선녀 3천여 명과 함께 한라산의 불로초를 캐기 위해 제주에 왔다가 서귀포를 경유해 떠났다는 탐방설화가 전해지는데, 당시 서복이 백록담 주변에서 캐간 불로초가 한라산 고산식물인 시로미 열매라고도 한다.
누가 가장 먼저 백록담에 올랐는지 알 수 없지만,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알려진 한라산은 누구나 한 번쯤 오르고 싶은 동경의 대상이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라산 등반 기록을 남겼다.
한라산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 1974년부터 매일 탐방객 수가 조사되고 있다.
지난해까지 한라산을 찾은 누적 탐방객은 2663만2322명이다. 올해 들어 3월까지 26만9423명이 다녀갔으니 탐방객 조사 이후 50년째에 접어든 올해 현재까지 총 누적 탐방객은 2690만1745명이다.
한라산 연간 등반객 추이를 살펴보면 반짝 생겨났다가 사라진 축제와 그해 사건·사고, 이벤트, 등반로의 폐쇄 등 온갖 풍파를 엿볼 수 있다.
한라산 연간 등반객은 1981년 처음으로 10만명을 넘어선 이후 1987년 20만명, 1992년 42만명을 거쳐 1994년 50만명을 넘어섰다.
1990년대 중반 통일 의지를 담아 '한라에서 백두까지'라는 이름으로 각종 단체에서 한라산 백록담·백두산 천지의 물과 흙을 합치는 '합수합토제(合水合土祭)' 행사가 붐을 이뤘다.
그러다 1996년부터 1999년까지는 50만명에 미치지 못하며 소강상태를 보이기도 했다.
급증하는 등반객으로부터 한라산을 보호하기 위해 1994년 7월부터 1999년 2월까지 윗세오름에서 한라산 정상에 이르는 남벽코스와 돈내코 코스 전 구간 등에 대한 자연휴식년제를 실시했기 때문이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등 악재가 겹친 것도 한 이유다.
그사이 제주 관광 비수기인 겨울철 한라산의 눈꽃을 관광 상품화하며 관광객의 발길을 끌기 위해 1997년 눈꽃축제가 열렸으나 변화무쌍한 한라산의 날씨에 따라 축제 분위기가 달라지는 구조적인 문제점이 노출되면서 5차례 만에 폐지되기도 했다.
2000년 들어 건강에 대한 관심과 웰빙 바람, 오름에 대한 재조명 등으로 다시 한라산 등반에 불이 붙으면서 2005년 70만명, 2010년 114만명으로 등반객 100만 시대를 열게 됐다.
이어 2013년 120만명, 2015년 125만명 고지를 넘어서는 등 급격한 증가추세를 보였다.
그사이 한라산은 2002년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2007년 세계자연유산, 2010년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받으면서 명실상부 세계인의 유산으로 거듭나며 그 위상을 드높였다.
2008년 물장오리습지, 2009년 1100고지 습지, 2015년 숨은물벵디 습지가 차례로 람사르습지로 인정받으면서 한라산국립공원은 유네스코 3관왕과 람사르습지를 동시에 보유한 세계 유일의 '국제 4대 보호지역'이 됐다.
그러나 드높아진 위상 이면에는 탐방객 증가로 인한 심각한 환경훼손과 각종 개발 논란 등 아픔을 겪기도 했다.
40년 넘게 이어진 한라산 케이블카 설치 논란을 비롯해 구상나무와 눈향나무 등 많은 한라산 희귀식물이 관상용으로 몰래 뽑혀 나갔다.
2016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태, 2020년 코로나19 대유행, 그리고 한라산 보호를 위해 2021년 2월 1일부터 탐방예약제를 실시하면서 연간 탐방객은 2016년 106만명, 2017년 100만명, 2018년 89만명, 2019년 84만명, 2020년 69만명, 2021년 65만명, 2022년 85만명 등으로 감소했다.
탐방객 수는 숫자일 뿐 한라산을 보다 잘 관리하기 위한 방편이다.
탐방객 수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사업이 사실상 허용되면서 한동안 폐기됐던 제주 한라산 케이블카 설치 사업 논의가 제주도의회에서 다시 제기됐다.
세계자연유산 한라산을 보호하고 보전하기 위한 길이 무엇인지 제주도민 사회는 물론 모두가 고민해야 할 때다. [연합뉴스=변지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