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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다우트 (7) 日 오염수 시찰단 역할 논란
대통령 ‘객관적 검증’ 기대 ... 안전성 믿을 수 있을까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진보적’인 플린 신부가 동성애자라는 자신의 ‘추론(推論)’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플린 신부가 ‘커밍아웃’한 것도 아니고, 목격자도 없고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그저 ‘추론’할 뿐이다.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추론’ 방식은 관객들이 보기에는 황당하기 짝이 없지만 본인 스스로는 자신의 ‘추론’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더욱 황당하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거나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짐작하고 예측할 때 흔히 ‘추론’의 방식을 동원한다. 추론이란 눈에 보이고 이미 알려진 사실을 통해 눈에 안 보이고 아직 알 수 없는 사실을 밝혀내는 추리 방식이다. 인류가 제한된 지식을 획기적으로 늘려온 과학적 탐구방법론이기도 하다. 

추론의 방법은 크게 연역적 추론과 귀납적 추론 2가지로 나뉜다. 연역적 추론은 불변의 절대 명제에 따른 추론으로 결론에 도달한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왕은 사람이다→그러므로 왕은 죽는다”는 식이다. 지금 왕은 아직 안 죽었지만 절대명제에 따르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귀납적 추론은 이와 반대로 개별적 사례들을 나열해 결론을 도출한다. “A는 인간인데 죽었다. B도 인간인데 죽었다. C도…D도…그러므로 왕도 인간이라면 반드시 죽는다”는 식의 논리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나름대로 연역적 추론과 귀납적 추론 방식 모두 동원해서 플린 신부를 ‘동성애 범죄자’로 확정한다. 교황 요한 23세 당시 교황청에 동성애 스캔들을 일으켰던 신부들 중 다수가 소위 ‘진보적’ 신부였던 것은 사실이었던 듯하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여기에서 괴이한 연역적 삼단논법을 구사한다. “진보적 신부들은 동성애자들이다→플린 신부는 진보적이다→그러므로 플린 신부도 동성애자일 것이다.” 

일견 그럴듯하지만 황당한 논리가 된다. 명제가 성립하기 위해서 밝혀진 동성애 신부들은 한명도 빠짐없이 진보적인 신부였다든지, 진보적인 신부는 한명도 예외 없이 동성애에 빠졌다면 혹시 가능한 추론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이는 마치 “모든 조류는 난다→타조와 키위도 조류다→그러므로 타조와 키위도 난다”는 연역적 오류와 마찬가지가 된다. 대명제에 오류가 발생하면 결론도 오류가 될 수밖에 없는 위험성이 다분한 것이 연역적 추론이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귀납적 추리도 곁들인다. “플린 신부는 쾌락1(술)을 한다. 쾌락2(흡연)도 한다. 쾌락3(수다)도 하고 쾌락4(설탕)도 한다. 쾌락5(편한 볼펜 사용)도 한다. 그러므로 플린 신부는 쾌락6(동성애)도 할 것이다.” 귀납적 추론은 믿을 만할까. 

영국의 논리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 nd Russell)은 ‘러셀의 칠면조’ 이야기를 통해 귀납적 추론의 함정을 지적한다. “칠면조 한 마리가 있다. 칠면조 주인이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매일 먹이를 준다. 칠면조는 인간이 자신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 세상의 보편적 진리라고 확신한다. 그렇게 추수감사절을 하루 앞둔 오후가 된다. 오늘도 인간이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변함없이 먹이를 줄 것이라는 칠면조의 ‘귀납적 추론’은 빗나가고 인간은 칠면조 목을 짓누르고 도끼로 내리치는 황당하고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플린 신부가 온갖 쾌락을 모두 즐긴다는 사실들로 그가 ‘동성애 쾌락’까지 즐길 것이라는 귀납적 추론이 과연 정당한 것일까.
 

 

연역적 추론을 동원하든 귀납적 추론을 동원하든 인식주체의 선입견이나 가치판단은 언제나 객관적 사실을 왜곡한다. 알로이시우스 수녀가 ‘진보적’인 플린 신부에게 편견을 갖고 있거나 부정적인 가치 판단에 사로잡혀 있는 한 플린 신부의 ‘동성애 범죄’ 의혹은 객관적 진실에 도달하기 어렵다. 과학적 탐구와 검증은 어떠한 전제도 없이 출발할 때만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우연히 플린 신부가 다른 신부와 길모퉁이에서 무언가 심각하게 대화하는 장면을 창밖으로 내려다본다. ‘선입견’에 사로잡힌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눈에는 그들의 평범한 대화 모습도 동성애 신부들의 ‘더러운 수작’임이 분명해 보인다.

일본의 오염수 방류 문제를 둘러싼 후쿠시마 ‘시찰단’의 역할을 두고 대통령은 과학에 기반한 ‘객관적 검증’을 기대한다고 한다고 했다. 하지만 국민들은 ‘시찰’과 ‘검증’이 같은 것인지 어리둥절하다. 언젠가 대통령이 일본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던진 “일본인은 정직하다”는 명제가 개운치 못하다.

‘일본인은 정직하다’는 명제를 전제로 연역적 추론을 하면 “일본인은 정직하다→일본인 기시다 총리가 후쿠시마 오염수는 안전하다고 한다→그러므로 후쿠시마 오염수는 안전하다”가 될 수도 있겠다.

귀납적 추론도 마찬가지다. 개인적 경험에 따라 “일본에서 만난 편의점 점원 나카무라군도 정직했고, 호텔 지배인 후지야마씨도 정직했고, 식당 종업원 하치코양도 정직했고, 택시기사 오카모토씨도 정직했다. 그러므로 기시다 총리도 정직할 것”이라고 결론 내리면 많은 국민들은 황당해질 수밖에 없다. 이는 곧 “술, 담배, 설탕 등등 좋아하면 동성애도 좋아할 것”이라는 알로이시우스 수녀식 귀납적 추론이 된다.

후쿠시마 오염수의 안전성을 믿을 수 없어서 철저하게 검증해야 한다고 하면 곧바로 ‘감성적인 반일(反日)팔이’라거나 ‘광우병 괴담 시즌2’라는 질타가 돌아온다. 예수의 부활을 검증하자고 하면 ‘반(反)예수’가 되는 것일까.
 

 

부활한 예수가 그의 제자들 앞에 모습을 나타낸다. 제자들 모두 그의 부활을 믿고 기뻐하는데 도마(Thomas)만이 예수가 정말 부활한 것이 맞는지 ‘검증’하겠다며 ‘감히’ 창에 찔린 예수의 깊은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보고서야 그의 부활을 믿는다. 그리고선 그는 가장 확실한 믿음을 갖는다. 도마가 예수의 부활에 반대해서 검증하자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보다 예수의 부활을 ‘정말’ 믿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 누구도 우리 앞바다에 방류되는 후쿠시마 오염수가 안전하지 않기를 바라지 않을 것 같다. 아마도 도마가 예수의 부활을 정말 믿고 싶었던 것처럼 오염수가 안전하기를 정말 바라기 때문에 도마처럼 확실히 검증하기를 원할 것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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