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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다우트 (4)

‘진보적’인 플린 신부가 뉴욕 브롱크스 교구에 부임하자 ‘보수적’인 알로이시우스 수녀원장이 예민해진다. 영화의 배경인 1964년은 미국 사회도 격변했지만, 가톨릭교회 역시 큰 변화를 겪은 시기다. 1963년 교황 요한 23세가 선종하고, 교황 바오로 6세가 즉위했는데 둘 모두 ‘진보적’이었다. 그러나 요한 23세는 정작 말년에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을 은폐했다는 의혹으로 곤욕을 치렀다.

 

 

영화 속에서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교구 학교 교실에 의도적으로 교황 사진을 걸지 않는다. 전임 교황이었던 요한 23세의 ‘존영’은 캐비닛 속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처박혀 있다. 알로이시우스로선 ‘진보적’이었던 데다 아동 성추행까지 은폐했던 교황을 ‘나의 교황’으로 모실 수 없다. 또한 신임 바오로 6세 역시 ‘진보적’이니 그의 ‘존영’조차 모실 마음이 없는 듯하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진보적인 요한 23세 교황이 ‘아동 성추행 사제’들을 비호했던 것으로 미루어 진보적인 플린 신부도 아동 성추행자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의구심을 갖는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곧바로 제임스 수녀에게 ‘플린 신부의 동향을 감시하라’고 지시한다.

제임스 수녀는 플린 신부와 동시에 브롱크스 교구에 부임한 ‘입사동기’이자 ‘초짜 수녀’다. 입사동기는 모든 것을 떠나 남다른 유대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더욱이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제임스 수녀는 학생들을 권위적이지 않고 격의 없이 친근하게 대하는 플린 신부를 ‘좋은 신부님’이라고 믿고 있다.

제임스 수녀는 자신이 친근감을 느끼는 ‘좋은 신부’를 ‘요시찰 인물’로 찍어놓고 동향 감시를 지시하는 알로이시우스 수녀에게 당황하고 불편하다. 더구나 플린 신부는 교단 직제상 수녀원장보다 상급자다. 그렇지만 ‘직속 상관’의 지시를 거역할 수 없다. 부장님의 지시로 자신이 존경하는 상무님의 동향을 감시해야 하는 신입사원 꼴이 된다.

플린 신부가 자신의 수업 시간 중에 한 흑인 학생을 사제관으로 불렀고, 돌아온 학생의 입에서 술냄새가 났다는 제임스 수녀의 마지못한 ‘일일 동향 보고’ 하나로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플린 신부를 향한 공격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다. 

순진한 제임스 수녀도 점차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의심에 그 합리성과 순수성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혼란스러워하는 제임스 수녀에게 자신의 의심이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곧 우리 수녀원과 교구, 그리고 더 나아가 가톨릭 전체를 위한 것이라는 논리를 펼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플린 신부를 축출하는 것이 곧 잘못된 ‘진보’의 길을 가고 있는 가톨릭교회를 바로잡는 일이라는 논리다. ‘내가 원하는 것이 곧 가톨릭교회가 원하는 것’이라는 논리로 제임스 수녀를 압박한다. 자신과 가톨릭교회 전체를 등치(等置)해버리는 교묘한 논법을 동원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불순한 논법이다.
 

 

1953년 백악관에 입성한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국 최대 기업 GM의 회장 찰스 윌슨(Charles Wilson)을 국방부 장관에 지명하고 의회에 인준을 요청한다. 의회 인준 청문회에서 GM의 주식을 무려 3000만 달러어치 보유한 그가 국방부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미국의 이익과 GM의 이익이 상충할 경우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이 나온다. 

당연한 질문이다. 윌슨은 ‘GM에 좋은 것이 곧 미국에도 좋은 것이며, 미국에 좋은 것이 곧 GM에도 좋은 것(What is good for GM is good for America and vice versa)’라는 미국 역사상 불멸의 망언을 하여 여론의 뭇매를 맞는다. 자신과 자신의 기업 이익과 국가의 이익을 등치하는 역대급 오만방자함으로 기록된다. 결국 비등하는 여론에 굴복해서 그가 보유한 GM 주식의 전량 매각을 약속하고서야 상원 군사위원회 인준을 받을 수 있었다.

1953년 윌슨이 내질렀던 불멸의 망언이 2023년 대한민국에서 불쑥불쑥 되살아나는 듯해 당황스럽다. ‘날리면’이나 외신 기자회견에서 나온 미심쩍은 대통령의 말실수를 따지고 들면 느닷없이 그것이 ‘국익’을 해치는 짓이라고 쥐어박는다. 대통령의 체면이 훼손되면 국격이 훼손됐다고 혀를 찬다. 대통령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을 등치해버린다.

‘짐(朕)이 곧 국가(L'etat, c'est moi)’라는 절대군주의 상징 루이 14세의 시대에나 가능한 논리다. 정부의 외교정책을 비판해도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엄숙ㆍ근엄ㆍ진지하게 ‘무식한’ 국민을 가르친다. 
 

 

이럴 때는 ‘정부의 이익’을 ‘국가의 이익’과 어지럽게 바꿔치기하는 야바위를 보는 듯하다. 대통령이 국가가 아니듯, 정부도 국가가 아니다. 그것이 대기업이 됐든 대통령이 됐든 정부가 됐든, 모두 국가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대통령과 정부는 5년짜리 시한부이지만 국가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지속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항상 같을 수가 없다.

요행히 대통령과 정부의 ‘시한부 삶’ 동안 그들의 이익이 국가의 이익과 대강이라도 일치한다면 천행天幸이겠으나, 혹시라도 그것이 상충하는 경우라면 ‘국민의 이익’을 대통령이나 정부의 이익보다 먼저 생각해주기를 소망한다. ‘국가의 이익’이란 다른 누구의 이익도 아닌 ‘국민의 이익’이기 때문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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