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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다우트 (1)

‘다우트(Doubt)’는 영화보다는 오히려 연극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연극 ‘다우트’로 2004년에 퓰리처상까지 받은 존 패트릭 샌리(John Patric Shanley)가 2008년에 자신이 직접 감독으로 자신의 연극 작품을 무대가 아닌 스크린으로 옮긴 매우 독특한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영화라기보단 필립 세이모어 호프먼(Philip Seymour Hoffman)과 메릴 스트립(Meryl Streep)이 펼치는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시간적 배경은 1964년이고, 공간적 배경은 미국 뉴욕시 북부 브롱스(Bronx) 지역이다. 1964년은 ‘진보’의 아이콘과도 같았던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그다음 해다. 미국 사회의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본격화하던 시기였고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둘러싼 온갖 음모론이 횡행하던 때였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모든 미국 국민에게 ‘의심 마귀’가 깃들기 시작하던 때이기도 하다.

이 시기는 흑인 민권운동을 중심으로 사회 변화가 거세게 몰아치던 시기이기도 하다. 영화 속 알로이시우스(Aloysius) 수녀원장이 교장으로 있는 보수적인 가톨릭 학교도 어쩔 수 없이 흑인 학생 1명을 받아들였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이 모든 것이 못마땅하기 짝이 없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옳고, 또 무엇이 그른 것인지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전편 내내 음산한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모두 난생처음 본다는 괴이한 바람이 수녀원을 휘감아 강고했던 나뭇가지들이 부러져 나간다.

이 불편하고 불안한 변화의 시기에 ‘진보적’인 브렌단 플린 신부(세이모어 호프먼)가 뉴욕 브롱크 지역 가톨릭 교구 주임신부로 부임해 온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대단히 ‘보수적’인 그 교구의 수녀원장이자 교구 학교의 교장선생이기도 하다. 플린 신부의 부임은 교단에서 ‘뺑뺑이’를 돌린 것이 아니다. 변화의 바람에 부응하고자 하는 가톨릭 교단이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완고한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구역에 ‘새바람’을 불어넣기 위한 포석이었다.

‘알로이시우스’라는 라틴 이름 자체가 ‘이름난 전사戰士’라는 뜻이다. 그 이름만으로도 이 전투적으로 보수적인 수녀원장과 ‘진보적’인 신부의 충돌을 예고한다. 알로이시우스 수녀원장에게 ‘진보적’인 플린 신부는 ‘청정한’ 자신의 교구에 침입한 위험한 불청객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위험하다. 잘못된 변화가 만들어내고 또한 잘못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존재다.

당연히 그런 플린 신부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못마땅하다. 플린 신부는 아무 데서나 담배를 피우고, 손톱을 기르고, 피가 철철 흐르는 스테이크를 먹고, 식사자리에서 낄낄대고 농담하고 떠든다. 홍차에도 ‘쾌락’의 상징인 각설탕을 ‘무려’ 3개씩이나 넣어서 마시고, 연필 대신 ‘편리한’ 볼펜을 사용한다.

알로이시우스 수녀원장은 편리한 볼펜은 사람의 글씨를 원숭이의 글씨로 만든다고 믿는다. 플린 신부 하는 꼴을 보면 역시나 ‘진보’라는 것은 잘못된 것임이 틀림없다.

플린 신부는 학교의 유일한 흑인 학생이자 당연히 따돌림당하는 도날드를 각별히 보살핀다. ‘보수적’인 신부였다면 사제로서 당연하고 혹은 상찬받아 마땅한 행동이지만 ‘돼먹지 못한 진보적’인 플린 신부가 흑인 학생을 각별히 가까이하는 것은 왠지 불순해 보인다.
 

 

‘돼먹지 못한’ 인간이 하는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돼먹지 못한’ 일임에 분명하다. 며느리가 미우면 며느리 발뒤꿈치가 달걀같이 생긴 것도 집에서 내쫓을 수도 있는 문제가 된다. 결국 알로이시우스 수녀원장은 어느날 플린 신부에게 다녀온 도날드의 입에서 술냄새가 났다는 제임스 수녀의 ‘정보 보고’ 하나로 플린 신부를 흑인 아동과의 동성애라는 최악의 인간 말종으로 몰아 제거하려 한다. 

알로이시우스 수녀원장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렇게 확신한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혹시 예수님이 재림해 플린 신부의 결백을 보증한다 해도 의심을 거두지 않을 태세다. ‘하느님도 까불면 나한테 죽어’급(級)의 확신에 찬 의심이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하느님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져도 좋다”는 대사를 날린다. 아무런 증거 없이 믿는다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어 하는 것’이거나 ‘믿어야만 하는 것’일 뿐이다.

아마도 관객들은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광기에 가까운 ‘확신에 찬 의심’에 어이없어 하고 혀를 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알로이시우스 수녀에게 눈살을 찌푸릴 수 있을 만큼 ‘합리적인 의심’만을 하는 사람들일까. 
 

 

내가 싫어하는 대통령의 석연치 않은 7시간 동안의 행적은 아무런 확증 없이도 의심하고, 내가 싫어하는 어떤 대통령이 뇌물로 받았다는 ‘논두렁 시계’도 내가 직접 본 것보다 더 확실한 사실이며, 내가 싫어하는 어떤 대통령은 ‘공산주의자’이거나 ‘종북주의자’임에 틀림없고 북한과 내통했음이 분명하다. 척하면 삼천리지 그걸 내 눈으로 꼭 봐야 하나. 

지금 대통령도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둘러싼 확인되지 않은 온갖 해괴한 소문들도 모두 하늘이 두쪽 나도 사실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그렇게 믿고 싶어 하고, 그렇게 믿어야만 자신의 행위가 정당해지기 때문에 그렇게 믿는 듯하다. 우리 모두 알로이시우스 수녀처럼 ‘의심’이라 쓰고 ‘확신’이라 읽는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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