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합병조약이 공포된 1910년 8월 29일.
이날을 우리는 국가적 치욕이라는 의미로 '경술국치일'이라 일컫는다.
일제는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회, 경제, 문화, 역사, 교육 등 다방면에서 집요한 침탈, 수탈, 왜곡 행위를 일삼았다.
무참하게 유린당한 치욕의 나날.
그 수치심과 모욕감은 식민지 백성들의 몫이었다.
우리나라 남쪽 끝 제주의 탐라 역사·문화, 백성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섬나라 탐라, 잃어버린 천년을 깨우다'란 주제로 특별전시를 하는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과 제주기록문화연구소 하간(소장 고영자)과 함께 탐라의 역사와 문화를 들여다본다.
◇ 옛 입춘굿 사진은 일제에 의해 연출된 것
1910년대 관덕정 앞마당에서 펼쳐진 입춘굿놀이 모습을 담은 12장의 사진.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사진 속에는 많은 제주도민이 관덕정 앞에 모여 심방('무당'을 뜻하는 제주어)들이 펼치는 입춘굿놀이를 구경하는 모습이 담겼다.
탈을 쓴 심방들이 춤을 추고 사설을 읊으며 흥을 돋우고, 어른과 아이들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서서 진지하게 지켜보고 있다.
사진만 얼핏 보면 입춘을 맞아 입춘굿이 성대하게 펼쳐지는 모습으로 보인다.
제주 입춘굿은 탐라국의 왕이 풍년을 기원하며 몸소 농사를 짓고 농업을 장려하던 친경적전(親耕籍田) 의식에서 비롯된 새봄 맞이 풍농굿이다.
그러나 사진 이면에는 반전이 숨겨져 있다.
사진 왼쪽 상단에 세로로 쓰인 '大正三, 六, 六, 濟州'란 글귀다.
이는 '대정 3년 6월 6일 제주'를 뜻하며 사진을 촬영한 날짜와 장소를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 때까지 융희(隆熙)란 연호를 사용하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을 잃은 뒤로 일본 연호인 명치(明治), 대정(大正), 소화(昭和)를 사용했다.
이 사진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대정 3년) 6월 6일 촬영된 것이다.
24절기 중 첫째 절기인 입춘은 보통 양력 2월 4일경인데, 입춘굿놀이 사진 촬영이 봄에서 여름으로 접어드는 6월에 촬영됐다는 점이 의아하다.
입춘날 펼쳐진 입춘굿놀이가 아닌 이를 재연한 연출된 사진으로, 일본인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에 의해 촬영된 것이었다.
그가 쓴 자서전 '어느 노학도의 수기'(ある老.徒の手記, 아사히신문사, 1953)를 보면, 자신이 제주도에 도착한 지 20일째 되던 날 관덕정 광장에 관민 남녀노소들을 모이게 하고 '제주도 입춘 풍속'을 재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제주도의 경우, 남해안 다른 지방과 다른 독특한 풍습이 있다. 예를 들어 … (중략) … 또 남녀가 가면을 쓰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제의를 행하는 풍습 또한 매우 흥미롭다. 이 제의는 나를 위해 개최하여 보여주기도 했다. 제주도 신의 내력을 담은 신화 등 이 모든 것에 옛 탐라왕국의 그림자(面影)가 드리워진 듯했다."
당시 사진에 등장하는 수많은 제주도민과 심방들이 '나'(일본인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를 위해 동원된 것이었다는 것이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군중들 사이에 일본 순사의 모습도 보이고 제주도민의 얼굴 표정 역시 축제장에 있다는 표정이라기엔 무언가 어색하고 경직돼 있다.
공연을 마친 뒤 촬영한 심방들의 단체 사진은 남녀 심방들이 정면으로 서 있거나 옆으로 또는 뒤로 돌아선 채 찍혀 있다.
기념촬영이라기 보다 그들의 옷매무새 등을 기록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찍은 사진임을 알 수 있다.
한 일본 인류학자의 제주 지역 문화·역사 조사 과정에 일본 순사에 의해 수많은 제주도민이 동원된 이유는 무엇일까.
단초는 탐라건국신화를 기록한 '고려사'(高麗史)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사에는 탐라의 시조 고·양·부 삼신인(三神人)의 배우자인 삼공주가 일본에서 도래해 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일본은 이 기록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고려사 기록을 토대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은 동일하다)을 주장하며 조선 침략과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하나의 근거로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일선동조론 사관을 주창했던 도리이 류조는 조선총독부 지휘 아래 한반도 조사차 1914년 5월 17일 제주에 도착했다.
도리이 류조를 포함한 연구진들이 바로 찾아간 곳은 탐라건국신화의 유적지인 '삼성혈'(三姓穴, 모흥혈)과 '삼사석'(三射石)이었다.
삼성혈은 삼신인이 나온 탐라국 발상지이고, 삼사석은 삼공주를 아내로 맞이한 삼신인이 각자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쏜 화살이 꽂혔던 돌들이다.
도리이 류조는 이들 유적을 조사해 제주의 토착문화와 융합한 일본문화의 전파 가능성에 대해 연구하고, 이를 사진과 기록으로 남겼다.
당시 이들이 찍은 사진 중에는 의도적으로 일본 순사들로 하여금 3개의 삼성혈 입구를 밟고 서 있도록 한 모습 등이 담겨 있다.
'혈'의 깊이와 너비를 측정하려는 것인지 그 의도는 알 수 없으나 한 민족의 건국 신화 유적지를 함부로 밟고 선 모습에서 타민족의 역사·문화에 대한 존중의 태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들 연구진은 이어 관덕정 앞마당에서 고대 탐라국으로부터 이어져 온 입춘의례를 제주도민들을 동원해 시연케 했다.
일본은 이후 이러한 내용을 사진엽서 등으로 남겨 그들의 식민통지 정당성과 정책을 선전했다.
또 한편으론 입춘의례 사진을 '제주도 기생들의 춤'이란 제목의 엽서로 발행해 사실을 왜곡하기도 했다.
김나영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학예사는 "고려 말∼조선 전기에 편찬된 제주 향토지인 '영주지'(瀛洲志)에는 고려사와 달리 삼신인의 배우자인 삼공주가 벽랑국(碧浪國) 출신으로 기록돼 있다. 일본국 도래설 혹은 벽랑국 도래설은 좀 더 면밀한 학술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며 "'일선동조론의 근거로 탐라사를 인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에 대한 역사적 비판, 재정립 연구가 있어야 하고, 더불어 과거 일본이 제주에서 벌인 역사·문화적 행위가 일본과 제주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도 오늘날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 학예사는 "일제강점기 관덕정 앞마당에서 행해진 입춘굿 모습을 담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흑백 사진은 어찌 보면 매우 슬프고 애통한 역사적 한 장면"이라며 "그동안 이 사진을 촬영 주체와 목적에 대한 정확한 설명 없이 무분별하게 활용한 면이 없지 않다.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합뉴스=변지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