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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이니셰린의 밴시 (11)
총선 앞두고 혁신위원회 발족 ... ‘변화, 통합, 희생, 놀라운 미래’
당연하고 단순명료한 선언이 ... 기괴한 말장난 되지 않아야

몇개의 카테고리(category)라는 것을 만들어놓고 세상의 모든 것을 그 속에 우격다짐으로 집어넣는 것은 편리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 대단히 난폭해질 수 있어 썩 바람직하지 않다. ‘여자와 남자’라든지 ‘흑인ㆍ백인ㆍ황인’이라는 분류도 그렇고, ‘상류층ㆍ중산층ㆍ서민층’이라는 분류도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모든 현상이나 인간은 하나의 카테고리 속에 집어넣어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복합적이다.

 

 

사람들은 예술작품이나 영화를 대개 ‘장르(genre)’라는 카테고리로 분류한다. 어떤 영화든 복합적인 요소들로 채워져 있어 특정한 장르로 규정하기는 어려울 듯하지만 맥도나 감독의 ‘이니셰린의 밴시’에 굳이 장르의 딱지를 붙인다면 아마도 코미디와 블랙코미디 경계에 걸친 듯도 하고 그 경계를 넘나드는 것 같기도 하다.

아동문학계의 윌리엄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 영국의 아동문학가 로알드 달(Roald Dahl)은 블랙코미디에 일가견이 있는 작가여서인지 동화에도 ‘블랙코미디적’ 요소들을 솜씨 좋게 버무려낸다. 그래서 그의 동화들은 가끔은 잔혹동화의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로알드 달이 설명하는 블랙코미디의 본질은 그럴듯하다. “어떤 사람이 서 있는데 머리 위로 페인트가 가득 담긴 버킷이 떨어진다면 희극이다. 그런데 그 페인트 버킷에 맞아 그 사람이 머리가 깨져 죽는다면 그건 웃기지만 웃을 수 없는 비극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소시지 가게 주인이 소시지 기계에 빨려 들어가 소시지가 돼 그 가게에서 팔린다면 그 경우는 비극이지만 그냥 웃기다. 그렇게 코미디와 블랙코미디의 경계는 애매하다.”

영화 속 두명의 주인공 파우릭과 콜름이 절교를 둘러싸고 벌이는 실랑이를 따라가다 보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종잡을 수 없다. 콜름은 자기 손가락 5개를 모두 잘라 파우릭의 현관문에 패대기 치고, 그 손가락을 먹다 목에 걸린 파우릭의 ‘애완 당나귀’가 질식사한다.

파우릭은 당나귀의 원수를 갚겠다며 콜름을 태워 죽이러 간다. 하필이면 ‘멍청함’의 상징인 당나귀가 등장해서 그 장면을 더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이 영화가 코미디인지 블랙코미디인지, 그것도 아니면 비극인지 분간이 안 된다. 웃어도 되는 영화인지 웃으면 안 되는 영화인지도 혼란스러워진다.

코미디는 관객이 불편을 느끼지 않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지만, 블랙코미디는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들기 위해 작정하고 상식과 이치에 맞지 않는 ‘부조리(不條理)’를 들이민다. 모든 합리적인 인과관계가 무너진 불편한 세상을 보여준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부조리극의 언어와 대사들은 아무런 논리도 없이 뒤죽박죽이고 진부한 상투어와 말장난, 상황과 동떨어진 이야기로 점철되곤 한다. 
 

 

대표적인 부조리극(不條理劇)인 새무얼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는 아예 줄거리조차 없다. ‘디디’와 ‘고고’라는 참으로 무성의하고 의미 없는 이름을 가진 2명의 떠돌이가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니면 ‘누구’인지 본인들도 모르고, ‘그것’이 올 것이라는 기대와 확신도 없이 그저 막연히 무작정 기다리면서, 아무런 맥락도 없는 ‘아무말 대잔치’를 한다. 분명 대화를 하는데 ‘디디’와 ‘고고’는 상대의 말은 듣지 않고 독백처럼 자기 할 말만 한다.

또 다른 부조리극의 대표격인 루마니아 극작가 에우제네 이오네스코(Eugene Ion esco)의 ‘대머리 여가수(The Bald Soprano)’에 나오는 스미스 부부와 마틴 부부는 자리에 앉아 누구나 아는 단순명료한 사실을 아무도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언어로 비틀어댄다.

그러다 결국 자신들이 부부라는 것도, 자신이 누구인지도 헷갈린다. 그 우스꽝스러운 무의미함이 배꼽 빠지게 희극적이지만 그 우스꽝스러움 아래에 깔린 것은 소통이 단절된 비극적인 현실이다.

이니셰린 섬의 파우릭과 콜름은 ‘고도를 기다리며’ ‘대머리 여가수’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을 무척이나 닮았다. 자신들이 벌이고 있는 짓이 무엇인지 생각하지도 않고 무작정 절교에 매달려 서로 맥락에 닿지도 않고 모든 것을 비틀어버린 자기 생각에만 매달려있다. 소통을 위한 일말의 노력도 없다. 그러다 결국은 콜름이 다섯손가락을 모두 자르고, 파우릭이 자식처럼 여기는 ‘반려 당나귀’는 죽고, 파우릭은 콜름의 집에 불지르러 간다.

문득 문득 우리네 정치도 코미디인지 블랙코미디인지, 그것도 아니면 부조리극인지 분간이 쉽지 않을 때도 있다. 혼란스럽게 접했던 한편의 이런저런 부조리극들을 보는듯한 기시감이 들기도 한다.
 

 

내년 총선이 다가오는 가운데 집권당에서 ‘혁신위원회’라는 것을 발족했다고 한다. 그 위원회의 표어가 ‘변화, 통합, 희생, 놀라운 미래’라고 한다. 변화와 통합, 그리고 희생을 통해서 ‘놀라운 미래’를 만들겠다는 의지인 모양이다. 좋은 말이다. 

그런데 그 ‘놀라운 미래’라는 것이 ‘디디’와 ‘고고’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것이 올지 안 올지 확신도 없이 막연히 기다리는 무엇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변화와 통합, 그리고 희생’이라는 지극히 당연하고 단순명료한 말들이 ‘대머리 여가수’에 나오는 스미스 부부와 마틴 부부의 대화처럼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이 뒤틀리고 기괴한 말장난으로 흘러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다보면 정말 콜름이 손가락을 잘라 집어던지고 파우릭은 콜름을 죽이러 가는 블랙코미디 같은 ‘놀라운 난장판’이 닥칠지도 모르겠으니 불안하다. 집권당이 그리된다면 나라의 불행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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