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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에서 화해·상생의 기억으로 … 세계기록유산 등재 도전
현기영 작가 "대를 이어 미체험 세대가 기억하도록 계승"

70여년 전 해방정국 혼란기 속에 발생한 참극 '제주4·3'.

 

 

4·3의 비극성은 치열한 이념 격돌의 한가운데 수많은 무고한 제주도민이 희생됐다는 데 있다.

 

하지만 제주도민은 국가 권력에 의한 무자비한 희생의 아픔을 딛고 각고의 노력 끝에 진실 규명을 이뤄내고, 화해·상생의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세계적으로 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성공적인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의 사례로 평가받는 제주4·3은 또 하나의 도전을 앞두고 있다.

 

'진실·화해·상생'의 가치를 담은 4·3기록물의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등재다.

 

서슬 퍼런 국가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4·3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분투한 사람들의 노력, 그들에 의해 수집·채록한 4·3기록물이 우리나라 현대사 속에 갖는 의미와 가치는 무엇일까.

 

 

◇ 4·3 억압된 침묵의 기록

 

제주4·3은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무자비한 학살이었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單選單政,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 봉기했다.

 

이후 무장대와 군·경을 비롯한 토벌대는 서로를 각각 '통일 반대 세력', '빨갱이'로 규정하고 총부리를 겨눴다.

 

토벌대의 광기 어린 학살과 무장대의 반격, 또다시 이어진 토벌대의 학살….

 

이 과정에 수많은 무고한 주민이 희생됐다.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통행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7년 7개월 2천762일간 제주에서 적게는 1만4천여명, 많게는 3만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재앙에 가까울 정도로 엄청난 희생을 치렀음에도 제주에서 4·3은 금기(禁忌)였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 체제가 무너지자 4·3 종결 6년 만에 진상규명 운동이 시작됐지만, 이듬해 일어난 5·16 군사 정변으로 쿠데타 이튿날 진상규명 운동에 나선 학생과 언론인, 유족 등이 옥고를 치렀다.

 

폭도나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한 희생자들은 억울한 원혼이 돼 말없이 구천을 떠돌았고, 유족들은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숨죽여 살아야 했다.

 

하지만 억압된 침묵 속에서도 제주 사람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4·3을 기억하고 되새겼으며 때론 국가 권력에 대항했다.

 

제주 출신 부모를 두고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 교포 김석범은 1957년 일본에서 4·3 소설 '까마귀의 죽음'을 발표한 데 이어 1976년부터 20여년간 일본 문예춘추사 '문학계'에 대하소설 화산도를 연재해 4·3의 진실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국내에선 제주 출신 소설가 현기영이 1978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북촌리 학살 사건을 담은 '순이삼촌'을 발표했다.

 

4월 혁명 이후 18년 만에 국내에서 4·3 논의의 물꼬를 텄지만, 소설은 곧 판금됐고 작가는 보안사로 끌려가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 "국가권력 저지른 잘못 반드시 정리…최소한의 도리"

 

"'곰궤'에는 100명쯤 들어갈 수 있는 곳인데 여기에 숨었다가 … (중략) … 군인들이 굴 어귀에다 대고 '나오라!'고 했는데 나오지 않자 굴 입구에 불을 질러버리니 안에 있던 사람들 30여명이 모두 질식사했어."

 

"총 1자루를 탈취해 오면 현상금으로 6만원을 주었다. 공비 1인을 사살한 현상금(경찰보상)은 5만원이었으니까 총 한 자루가 사람 목숨보다 가치가 월등 높은 시절이었다."(1988년 '한라의 통곡소리', 오성찬)

 

"하나도 빠짐없이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다 나오라 해서 어린아이, 늙은이 할 것 없이 다 나갔단 말이야. … (중략) … 총질허여부렀주. 그 죽은 어멍 위에 엎더졍(엎어져서) 젖 먹으멍 살아난 아이도 있고…."(1989년 '4·3증언자료집 이제사 말햄수다', 제주4·3연구소)

 

 

분위기를 바꾼 건 1987년 6월 항쟁이었다.

 

민주화 열기 속에 40년간 꽁꽁 묶여있던 4·3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했다.

 

4·3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특히 이듬해인 1988년 국회에서 열린 5공 비리 청문회를 통해 세상이 바뀌었음을 실감한 제주도민은 가슴 속에 묻어뒀던 4·3의 한(恨)을 입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같은 해 서울·도쿄·제주에서 4·3학술행사가 열렸고, 4·3 증언채록집 '한라의 통곡소리'가 출판된 데 이어 다양한 문화행사가 전개됐다.

 

1989년 민간 연구단체인 제주4·3연구소가 문을 열었고, 언론의 4·3 기획 연재 및 다큐멘터리 방송이 잇따랐다.

 

 

그럼에도 국내 정치상황에 따라 4·3에 대한 억압이 반복됐다.

 

1992년 4월 제주시 구좌읍 다랑쉬굴에서 4·3 당시 굴속에 은신해 있다가 토벌대에 의해 희생된 11구의 유해가 4·3연구소와 제민일보 4·3취재반에 의해 발견됐다.

 

하지만 제대로 된 장례절차도 없이 유해는 굴 밖으로 나오자마자 화장돼 김녕 앞바다에 뿌려졌고 다랑쉬굴은 폐쇄됐다.

 

한 유족이 '화장이 불가피하다면 뼛가루의 11분의 1만이라도 달라'고 애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같은 납득할 수 없는 공안당국의 은폐 시도는 다시 4·3 진상규명 운동에 불을 붙였다.

 

 

제주도의회는 바로 '4.3특별위원회' 구성을 결의하고 이듬해 1993년 3월 본회의에서 4·3특위 구성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 2년 뒤 '제주4·3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를 발간했다.

 

1997년 4월엔 '제주4·3 제50주년 기념사업추진 범국민위원회'가 결성돼 4·3진상규명운동은 전국으로 확산했다.

 

이어 4·3특별법 제정을 위한 범도민·범국민적 노력 끝에 국회는 1999년 12월 16일 여야 합의로 '제주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2000년 1월 11일 청와대에서 그동안 진상규명에 앞장서 온 유족·시민단체 대표 8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대중 전 대통령이 4·3특별법에 서명했다.

 

법률에 따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가 꾸려졌고 2년 6개월 간의 진상 조사 활동을 벌인 끝에 2003년 10월 15일 4·3사건의 진상을 담은 정부의 공식 보고서가 확정됐다.

 

 

광범위한 자료수집과 증언 채록 등을 통해 제주4·3의 전개과정과 역사적 성격을 밝힘으로써 반세기 이상 묻혔던 4·3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의 전기가 마련됐다.

 

같은 해 10월 31일 제주도를 방문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진상보고서에 근거해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을 공식 인정하고 사과했다.

 

노 전 대통령은 3년 뒤 2006년 4월 3일 제주도 4·3 평화공원에서 열린 '제주 4·3사건 희생자 위령제'에 국가원수로서 처음으로 참석해 "자랑스러운 역사든 부끄러운 역사든, 역사는 있는 그대로 밝히고 정리해야 한다"며 "특히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은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 전에 억울하게 고통받은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해 주어야 하며, 이것은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다. 그랬을 때 국가권력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확보되고 상생과 통합을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화해와 상생의 기록 끊임없이 되새겨야

 

제주 4·3은 계속해서 화해와 상생의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제주도는 4·3의 교훈을 발판으로 2005년 1월 27일 '세계평화의 섬'을 선포했고, 2년 뒤엔 불가능이라 여겨졌던 제주국제공항 내 옛 '정뜨르비행장' 일대에서 유해발굴이 진행됐다.

 

불법적인 군사재판과 예비검속 등으로 끌려가 무참히 학살된 희생자들이다.

 

공항에서 발견된 수백구의 유해는 위령제와 장례절차를 거쳐 4ㆍ3평화공원 봉안관 등에 안치됐고 10여년에 걸쳐 유족 증언, 유족 채혈, 유전자 감식 등 신원 확인을 통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있다.

 

공안당국의 은폐로 제대로 된 장례절차 없이 화장돼 바다에 뿌려진 다랑쉬굴 11구의 유해 발견 당시와 달라진 모습이다.

 

 

이후에도 영문도 모른 채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끌려가 옥살이했던 수많은 제주4·3 생존 수형인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재판을 통해 무죄 취지의 공소기각 판결과 형상보상 결정을 받아 명예를 되찾고 있다.

 

"이제사(이제야) 죄를 벗었구나!" 기쁨과 슬픔이 담긴 한마디 말을 내뱉기까지 70년의 세월이 걸렸다.

 

오랜 세월 피해자와 가해자로 여겨지며 서로 등을 돌리고 살아온 4·3 유족(제주4·3희생자유족회)과 전직 경찰관 단체(제주도재향경우회)가 손을 맞잡고 조건 없는 화해와 상생을 다짐하기도 했다.

 

이 모든 역사의 기록은 현재 진행형이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11월 30일 제주도와 제주4·3평화재단 등이 작성한 제주4·3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서를 유네스코 본부에 제출했다.

 

기록물 명칭은 '진실을 밝히다 : 제주4·3 아카이브'(Revealing Truth : Jeju 4·3 Archives)다.

 

 

기록물은 4·3 당시부터 정부의 공식 진상조사보고서가 발간된 2003년까지 생산된 기록물로, 모두 1만4673건에 이른다.

 

문서 1만3976건, 도서 19건, 엽서 25건, 소책자 20건, 비문 1건, 비디오 538건, 오디오 94건 등이다.

 

기록물은 '억압된 기억에 대한 기록물'과 '화해와 상생의 기록물'로 나뉜다.

 

억압된 기억에 대한 기록물에는 4·3 희생자와 유족들이 끊임없이 이어간 증언, 아래로부터의 진상규명 운동, 2003년 정부 공식 진상조사보고서 등의 기록물이 포함됐다.

 

화해와 상생의 기록물에는 제주 사람들이 가해자와 피해자 구분 없이 모두를 포용하고 지역 공동체 회복 활동에 들인 노력 등이 담겼다.

 

 

이번에 신청한 기록에는 4·3 당시 군법회의 수형인 기록, 수형인 등 유족 증언, 제주도의회 4·3 피해신고서, 제주4·3위원회의 채록 영상과 소설 '순이삼촌', 진상규명과 화해 기록, 정부 진상조사 관련 기록물도 있다.

 

등재 여부는 사전심사와 본심사를 거쳐 2025년 상반기에 최종 결정된다.

 

'순이삼촌'을 쓴 소설가 현기영은 "끊임없이 4·3을 재기억하는 일이 중요하다. 재기억이란 지워졌던 역사적 기억을 되살려 끊임없이 되새기는 일"이라며 "대를 이어 미체험 세대가 그 기억을 계승하는 것을 말한다"고 강조한다.

 

4·3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돼야 하는 이유를 명료하게 설명한다.

 

4·3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 공동위원장인 오영훈 제주지사는 "4·3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면, 화해와 상생으로 과거사 문제 해결의 모범을 제시한 제주4·3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의 역사로 당당히 기록되는 것"이라며 많은 관심과 성원을 바랐다. [연합뉴스=변지철 기자]

 

 

[※ 이 기사는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제주특별자치도의회 4·3백서', '4·3 그 진실을 찾아서'(도서출판 선인, 양조훈), '4·3 기나긴 침묵 밖으로'(혜화1117, 허호준) 등 책자와 보고서 등을 참고해 제주4·3을 소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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