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복수는 나의 것’을 끌어가는 주인공들 중 하나인 류(신하균 역)는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인 누나와 단둘이서 살아간다. 그 누나마저 신부전증으로 사경을 헤맨다. 류는 햇빛 한줄기 안 드는 주물공장에서 고된 노동으로 자신과 누나의 생계를 짊어지고 살아간다. 가뜩이나 고달픈 삶인데 설상가상 류는 청각장애인이다. 감독이 굳이 청각장애인을 전면에 내세운 이유는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 # 장면➊ = 류의 누나는 신장 이식밖에는 도리가 없다. 막연히 신장이식자를 기다린다는 것은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이다. 류는 자신의 신장을 누나에게 주려고 하나 안타깝게도 혈액형이 맞지 않는다. 의사는 누나에게 류의 신장이식이 불가능하다는 검사결과를 기계적으로 ‘통보’한다. 의사는 류가 청각장애인인 줄 알면서도 일말의 배려도 없다. 상대가 알아듣든 말든 자기 할 말만 하면 그만이다. 우리도 병원에 가면 1~2시간쯤 기다리다 겨우 만난 의사 앞에 가장 공손한 모습으로 두손 모으고 앉아 한두번쯤 당해 본 장면이다. 류는 왜 자신의 신장을 누나에게 줄 수 없는지 알 수가 없다. 의사는 자기 말을 못 알아듣고 멀뚱멀뚱한 류가 마뜩지 않다. 청각장애인이게 맞춰주기 위
금지옥엽 유치원생 외동딸 유선(한보배 역)을 납치당한 평범한 중소기업 사장 동진(송강호 역)은 상상 못할 아픔을 겪는다. 딸을 납치한 류(신하균 역)와 영미(배두나 역)의 요구대로 1000만원을 전달했지만, 유선은 강가에서 익사체로 돌아온다. 주검으로 돌아온 어린 딸의 부검 현장을 지켜봐야 했던 동진은 지옥의 고통을 느낀다. 아내도 없이 홀로 키운 딸은 동진에게 삶의 유일한 희망이자 이유였다. 동진에게 남은 황폐한 삶의 유일한 이유는 복수밖에 없다. 회사, 집 등 모든 자원을 처분해 만든 돈을 복수에 쏟는다. 그 돈으로 경찰을 매수해 범인 추적에 나선다. 경찰을 못 믿어서라기보다는 경찰보다 앞서 범인을 잡아내야만 한다. 법의 심판에 맡겨서는 도저히 풀리지 않을 원한이다. 그렇게 동진은 악마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본인도 악마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동진이 저주하는 납치범 류도 본래는 ‘착한 놈’이었다는 것이 박찬욱 감독이 던지는 문제다. 영화 속에서 청각장애인 류는 고된 공장 일을 마치고 사무실로 호출당해서 해고통보를 받는다. 집으로 가는 달동네 비탈길을 오른다. 집에 가면 신부전증으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세상에 유일한 피붙이 누나를 돌봐야 한다. 암담한 일
미국에 ‘복수극 전문감독’ 쿠엔틴 타란티노가 있다면 한국에는 박찬욱이 있다. ‘복수는 나의 것(2002년)’은 박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 ‘올드보이’와 함께 복수극 3대 명작으로 꼽힌다. 굳이 이들 감독을 복수극 전문가라고 부르기도 어색할 정도로 ‘복수’라는 주제는 영화의 가장 흔한 주제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만큼 ‘복수심’이라는 감정과 ‘복수’라는 행위는 인간들이 느끼는 일반적인 감정이자 그에 따른 행동양식인 듯하다.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주인공 류(신하균 역)는 세상에 유일한 피붙이인 누나가 당장 신장이식을 받지 못하면 죽을 상황에 몰린다. 자신의 신장을 떼어주고 싶지만 불행하게도 혈액형이 맞지 않는다. 류는 장기 밀매업자를 찾아가 자신의 신장과 누나의 수술비로 꽁꽁 싸매둔 전 재산 1000만원을 주고 누나와 혈액형이 맞는 신장을 받기로 한다. 그러나 자신의 신장만 털려버리고 누나의 수술비까지 날린다. 그 순간 그토록 기다리던 신장기증자가 나타나지만 수술비 1000만원이 없다. 류는 애인 영미(배두나 역)와 함께 아동납치에 나선다. 류와 영미에게 납치당한 금지옥엽 외동딸이 시신으로 돌아오자 그의 아버지 동진(송강호 역)은 복수를 결심한다. 영미를
‘파이트 클럽’의 사실상 주인은 주인공인 ‘화자(話者)’지만, 주인공이 직접 클럽을 운영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상상 속에서 창조한 카리스마 넘치는 테일러 더든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운영한다. 화자가 더든에게 파이트 클럽 운영을 위임했듯, 주권자인 우리는 누군가에게 권력을 위임하고 나라살림을 맡긴다. 주인공이 만들어 낸 더든은 주인공을 대리해 도시의 소외된 남자들을 끌어들인다. 주인공을 포함한 파이트 클럽 회원들은 더든이 술집 지하공간을 무단점거해 마련한 아지트에서 더든의 주재하에 그동안 저마다 켜켜이 쌓여왔던 울분과 좌절을 맨주먹 격투로 해소하면서 비로소 자신들이 살아있다는 희열을 맛본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때까지 주인공에게 나이스했던 더든이 주인공을 조롱하고 가르치려들기 시작한다. 클럽의 ‘대리인’ 더든은 클럽의 주요 프로그램을 ‘맨주먹 격투’에서 비만환자들의 지방흡입 폐기물을 훔쳐서 만드는 ‘폭탄제조’로, 한발 더 나아가 그 폭탄을 이용한 ‘도시테러’로 바꿔버린다. 그런데 자신의 ‘주인’인 주인공과 의논하거나 허락을 구하지도 않는다. 파이트 클럽 운영을 위임받은 이상 파이트 클럽에서 진행할 모든 프로그램의 개발과 수행을 모두 위임받은 것처럼
영화 ‘파이트 클럽’은 척 팔라닉(Chuck Palahniuk)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다소 난해한 이 ‘컬트 무비’는 원작자 폴라닉이 독일 철학자 니체에게 심취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한결 이해하기 편하다. 그는 니체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장황한 설명 없이 잠언(箴言, 교훈이 되는 짧은 말)처럼 던진다. 주제 역시 니체가 상정한 예언자 ‘자라투스트라(Zarathustra)’의 분위기를 풍긴다. 영화 속 테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은 다중인격체인 주인공이 자신의 무기력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낸 또다른 인격체이자 ‘선지자(자라투스트라)’다. 그러면서도 주인공인 화자는 자신이 만들어낸 ‘선지자’인 더든의 가르침을 따르지는 않는다. 자신의 삶과 너무나 이질적인 더든에게 심한 거부감까지 느낀다. 파이트 클럽 회원들은 모두 더든의 가르침에 따라 도시 테러에 나서지만, 주인공은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하고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파이트 클럽 회원들과 폐가에서 동거동숙하면서도 그들을 경멸하고, 동떨어진 채 여전히 갑갑한 회사생활을 계속한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더든과 파이트 클럽 회원들이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 자체를 파괴해버리는 ‘영구 불구
영화가 진행하면서 ‘파이트 클럽’ 운영자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은 주인공인 화자(話者)가 만들어 낸 환각의 인물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주인공은 출장에서 돌아와 자신의 아파트를 누군가 불질러 버렸다는 것을 발견한다. 망연자실한 주인공 앞에 비행기에서 만났던 더든이 홀연히 나타나 당분간 자기 집에서 지내라고 권한다. 주인공은 더든을 따라 거의 헛간 수준의 그의 폐가에 입주한다. 더든의 폐가에 입주하고도 주인공은 변함없이 직장에 무기력하게 출근을 계속한다. 그 폐가에 주인공이 고통의 현장을 ‘눈팅’하면서 만났던 말라(Marla)도 합류한다. 더든은 말라와 매일 밤 낡아빠진 폐가의 천장이 내려앉을 정도로 짐승 같은 성관계를 한다. 주인공은 그런 더든과 말라를 ‘짐승같은 것들’이라고 경멸한다. 주인공은 그렇게 자신이 만들어낸 또 다른 자아인 더든을 통해서 말라를 향한 자신의 욕망을 채우면서도 그 짐승 같은 놈은 더든이지 자신은 아니라고 스스로 믿는다. 주인공의 아파트를 불질러 버린 것은 더든이었다는 것도 밝혀진다. 더든은 주인공이 만들어낸 환상이었고, 결국 주인공 스스로 자신의 집을 불질러버리고 폐가로 옮겨온 것이다. 주인공이 더든과 치고받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타일러 더든의 ‘파이트 클럽’에 하나둘 모여든 회원들은 각자의 기구한 사연들은 밝히지 않지만 모두 사회에서 이리저리 치이고 소외된 대중이다. 이들은 ‘파이트 클럽’에서 자기들끼리 맨몸, 맨주먹 격투를 통해 그동안 쌓이고 응어리진 울분을 쏟아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파이트 클럽’의 운영자 더든은 어느날 회원들에게 기존과는 전혀 다른 ‘파이트’ 방향을 제시한다. 지금까지는 자기들끼리 파이트를 했다면 지금부터는 똘똘 뭉쳐서 세상을 상대로 파이트하라고 한다. 더든은 세상과의 파이트에선 폭탄의 사용도 허용한다. 지방흡입 시술을 하는 병원 폐기물 처리장에서 훔쳐온 인간들의 지방으로 제조한 폭탄이다. 철저하게 1대1 싸움으로 제한했던 격투 방식에도 변화를 준다. 이젠 집단을 공격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더든은 왜 폭탄을 들고 세상과 싸워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회원들 역시 더든에게 왜 그래야 하는지 묻지 않는다. 이의를 제기하거나 클럽을 탈퇴하는 이들도 없다. 오히려 그들의 눈빛이 용암처럼 이글거린다. 사회에서 소외된 자신들의 설움을 ‘세상’을 향해 토해내기 시작한다. 더든에겐 ‘자본주의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거나 혹은 아예 파괴해 버리겠다는 자기
주인공인 ‘화자(話者)’는 타인의 고통을 ‘눈팅’하면서 자신의 고통을 잠시라도 잊는 ‘부끄러운 짓’을 하던 중, 자신과 마찬가지의 ‘고통 눈팅족’인 말라(Marla)를 발견하고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치부’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 치부를 남들에게 들키기 전까지는 부끄럽지 않다. 그런데 말라는 주인공에게 치부를 들키고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말라의 등장으로 느꼈던 수치심은 당연히 말라가 사라지면 같이 사라져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다. 주인공 ‘화자’는 그제야 남들에게 들키지 않은 치부도 부끄럽기는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영혼까지 갈아 넣는 노동의 대가로 장만한 ‘이케아’ 가구로 채워 넣은 작은 아파트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이었는지를 절실하게 느낀다. 남들에게 들키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부끄러울 ‘치(恥)’는 누구에게 들켜서가 아니라 ‘자기 마음(心)’에 ‘귀(耳)’ 기울이면 스스로 알 수 있는 부끄러움이다. 남미 오지로 선교하러 간 사제들은 남미 원주민들이 벌거벗고 산다고 같이 벌거벗지 못한다. 주인공은 결국 이케아로 채워 넣은 안락한 아파트로 상징되는 ‘물질’에 얽매여 살았던 자신의 삶에 수치심을 느낀다. 그는 아파트를 불 질
데이비드 핀처 감독은 영화 ‘파이트 클럽’ 초반에 꽤 흥미로운 ‘갈등과 협상’ 장면을 배치한다. 생각과 이해관계, 상황이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살다보면 서로 부딪히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다. 주인공인 ‘화자’도 영화 속에서 두번의 갈등 상황에 봉착하는데, 첫번째 갈등은 협상을 통해 무난하게 해결한다. 하지만 2번째 갈등은 해결하지 못하고 파국을 맞는다. # 갈등➊ = 주인공인 화자는 타인들의 극심한 고통을 보면서 자신의 고통을 시나마 잊고 숙면을 취하기 위해 타인들의 고통 ‘눈팅’에 나선다. ‘고환을 제거한 남자들의 모임’ ‘말기암 환자들의 모임’ ‘알코올 중독자 모임’ 등등이 그 대상이다. 그렇게 ‘고통의 메카’를 순례하던 주인공은 어느날 자신이 순례하는 온갖 고통의 메카에 말라(Marla)라는 저승사자 같은 눈화장을 한 여자가 자신과 똑같이 고통을 ‘눈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주인공은 갑자기 자신의 치부를 들킨 것 같아 김이 새버리고 도무지 몰입이 안 된다. 짜증난 주인공은 말라를 붙잡고 협상을 시도한다. 주인공은 ‘우리 자꾸 마주치면 너도 불편할 테니 각자 모임 방문 요일을 정해서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하자’는 협상안을 제시한다. 말라는
‘파이트 클럽’의 지도자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은 술집 지하실을 무단으로 점거해 파이트 클럽을 연다. 물론 간판을 내건 것도 아니다. 신입 회원들은 클럽 이름 그대로 그곳에서 회원들과 웃통을 벗어젖히고 맨주먹으로 1대1 ‘맞짱’을 뜬다. 상대가 항복을 선언하지 않는 한 서로 딱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팬다. 입술과 코가 터지고 눈두덩이 찢어지는 것은 기본이다. ‘록키’의 챔피언 경기만큼이나 처절하다. 사회와 가정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소외돼 그곳을 찾아온 회원들은 마음속에 켜켜이 쌓인 응어리를 폭발시킨다. 한쪽의 항복으로 난투극이 끝나면 그들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에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도 무언가 응어리가 풀린 듯 서로를 껴안고 감격스러워한다. 무기력하기만 했던 자신들이 살아있음을 비로소 느낀다. 거듭되는 맨손 격투를 통해 회원들은 얼굴은 험악해지지만 두려움과 무기력을 떨쳐버린 당당한 ‘전사’로 거듭 태어난다. 몸 안에 충만한 파괴적인 에너지를 느낀다. 그들의 자신감 넘치는 파괴적인 에너지를 확인한 더든은 이제 비로소 자신이 기획한 파이트 클럽의 궁극적인 목표였던 도시파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가 됐음을 느낀다. 너절했던 깡패들이 ‘실미도’에서 특전사 지옥훈
영화 파이트 클럽의 주인공(에드워드 노튼)은 이름도 없는 화자話者로 등장한다. 그는 자동차 리콜 전문가로 일한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1년 중 족히 300일쯤은 비행기를 타고 전국의 사고현장을 찾아 자동차 결함을 조사한다. 어쩌면 최악의 직업이다. 태평양을 건너 아예 낮과 밤이 통째 바뀌는 게 차라리 낫다. 서너 시간의 시차 변화는 정말 고약하다. 주인공은 당연히 만성 불면증에 시달린다. 그는 불면증에 시달리다 의사를 찾아가 고통을 호소하고 수면제 처방을 부탁한다. 의사는 불면증 정도의 고통은 약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의 고통은 아니라면서 비협조적이다. 수면제 처방전을 써주는 대신 ‘(고환암으로) 고환을 제거한 남자들의 모임’이라는 묘한 곳에 한번 가보라고 권한다. 그 사람들을 보면 진짜 못 견딜 고통이란 어떤 건지 알게 될 거라고 한다. 주인공은 잠도 안 오는 밤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고환 제거남’들의 모임에 간다. 다행히 모임 관계자가 ‘고환 제거’ 사실을 확인하지는 않는다. 그곳에서 고환을 제거당한 사내들의 좌절감과 고통의 생생한 현장을 목격한다. 고환을 제거하고 거대한 유방을 가진 한 사내가 주인공을 부둥켜안고 고통에 오열한다. 그러나 주인
젊은이들이나 일부 특정 취향의 관객들로부터 ‘숭배’에 가까운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독특한 영화를 ‘컬트 무비(cult movie)’라는 장르에 묶어 집어넣는 모양이다. 데이비드 핀처(David Fincher) 감독의 ‘파이트 클럽(Fight Club·1999년)’은 가장 성공적인 컬트 무비 중 하나로 손꼽힌다. 컬트 무비는 기존의 지배적인 주류문화와 사회질서에서 이탈하거나 저항하고 적개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주류문화의 관점에서는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불온한’ 영화일 수도 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무기력증에 빠진 한 남자가 자기 애인의 어머니와 불륜에 빠지는 내용을 담은 ‘졸업(Graduation ·1967년)’이 1960년대 미국 사회에 충격을 가하고 숱한 논란에 불을 지폈던 1960년대의 대표적인 컬트 무비라면,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파이트 클럽은 졸업만큼이나 충격을 안겨준 컬트 무비로 기록된다. ‘햇살 가득하고 번듯한 곳’이 주류사회라고 한다면 ‘어둡고 칙칙하고 눈에 띄지 않는 곳’은 비주류들의 공간이다. 영화 파이트 클럽의 모든 장면들은 어둡고 칙칙하고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전개된다. ‘파이트 클럽’의 창시자이자 리더는 비누를 만들어 파는 타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