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봉(말매오름,멀미오름) ▲ 두산봉과 말산메 위성사진ㅡ출처 네이버지도 두산봉은 말매오름이라고도 하는데 종달리와 시흥리에 걸쳐져 있는 오름이다. 네이버 지도에서는 두산봉과 말산메가 구분되어 표기되어 있는데 실은 둘을 합쳐 두산봉이라고도 하고 말산이라고도 한다. 일제시대 때 발간된 '조선지형도'에도 산 전체를 두산으로 표기하고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말산(末山)', 『탐라지』에는 '두산(斗山)', 『제주읍지』에는 '두산악(斗山岳)' 등으로 표기했다. 『탐라순력도』(한라장촉), 『제주삼읍도총지도』 에는 '두산(斗山)', 『제주군읍지』의 「제주지도」에는 '마악(馬岳)'으로 기재되어 있다. (본 글에서는 내용전달의 편의상 두산봉과 말산메를 구분하여 사용합니다) ▲ 견고한 성곽을 연상케 하는 두산봉의 동측 외곽 절벽 두산봉은 제주의 오름 360여개 중 몇개 안되는 수성화산체이다. 해저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둥근 링 형태의 '응회환'이 형성되었고, 지반
"시흥리의 송난포구에서 출발하여 말산메와 두산봉, 시흥리 마을 안길을 둘러보는 코스입니다." ■송난포구 ▲ 송난포구 전경 시흥리 동쪽에 돌출된 송난코지에 위치한 포구이다. 송나라 때 오랑캐의 침입을 받아 송란이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다. 역사적 고증은 없지만 주변에서 많은 유해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 송난포구 주변 모래펄 수심이 얕은 모래펄 지형이라 포구를 만들기가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수심을 확보할 수 있는 코지(곶)에 돌을 날라 포구를 만들었다. 주변지형이 온통 모래 뿐이니 포구를 만들 때 그 수고로움이 제주의 다른 동네보다 훨씬 더 많았음을 짐작해본다. 변변한 장비도 없던 그 옛날 돌의 운반에도 고충이 많았겠지만, 얕은 수심때문에 바닥의 모래를 퍼서 필요한 수심을 확보하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흥리 사람들은 소중한 포구를 어렵사리 얻었다. ▲ 우도와 연결된 듯 보이는 신 방파제 옛날 포구 밖으로 바다로 길게 이어져 작은 섬을 연결하는 새로 난 방파제가 발길을
■종달리 원래 종달은 종다릿개[終達浦]라는 이름에서 한자 차음한 것으로 보인다. 깨달음에 다다랐느니 제주땅 끝에 달했다느니 하는 말이 있는데 믿을게 못 된다고 본다. 아무렴 어떤가. 19세기 중반까지는 정의현 좌면에 속했다. 지금으로 치면 서귀포 소속이었다는 것이다. 그 후 북제주군 구좌면과 구좌읍에 속하였고 2006년 7월 제주특별자치도 출범과 함께 북제주군이 없어지면서 제주시에 편입되었다. 제주에서는 비오는 날이 많아 육지에서와 같이 천일염을 생산하기가 어려워서 역설적으로 소금이 귀했다고 한다. 종달리는 과거 제주에서 최초로 염전이 만들어진 최대의 소금 생산지였다. 종달리 사람들을 '소금바치'라고 불렀다. 사람들의 신분이나 직업등에 따라 붙는 접미사가 꽤 있다. '-바치', '-아치'도 마찬가지다. 가죽을 다루는 사람을 '갖바치'라 부르듯 종달리 염전 사람들을 '소금바치'라고 불렀던 거다. 그 만큼 많은 양의 소금이 이 곳에서 났다는 건데 지금은 마을회관 앞 소금밭 전시관이 그 흔적을 대신할 뿐이다. 종달리 소금은 마을 앞 드넓은 모래펄이 있어서 가능했다. 1900년대 초 종달리 마을
■지미봉 해발 165m이고 북쪽으로 용암이 흘러나간 말굽형 화산체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지미봉 탐라순력도에는 지미망(指尾望)으로 표기되어 있다. 봉수가 있는 오름을 봉, 또는 망이라 표기했다. ▲ 김승욱 제주의 땅끝에 있어 지미(地尾)라고 한다는데 확실치가 않다. 그러나 꼬리를 가리킨다(指尾)는 한자해석이 가능하다. 아닌게 아니라 성산일출봉이 제주 본섬에 마치 꼬리처럼 달려있다. 일출봉을 제주의 꼬리로 여긴다면 꼬리인 일출봉을 가리키는 오름이라는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 그게 맞다는 확신이 든다. 그렇다면 제주 서쪽을 본섬의 머리라 했을때 한경면의 두모리(頭毛里)라는 지명이 잘 맞아 떨어진다. ▲ 지미봉 북쪽 입구 입구 안내판엔 경사가 급하나 거리가 짧아 20분이면 오를 수 있다고 써 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 정상으로 오르는 길 북쪽으로 오르는 길은 계단 없이 조성해 놓았다. 과연 경사가 급하다. 20분 걸린다는 길을 쉬지 않고 오르니 15분이 채 안되어 정상에 도착했다. 괜한
■하도 철새도래지 ▲ 철새 하도리 동쪽에서 종달리 서쪽에 걸쳐 위치한 철새도래지이다. 제주지형에서 보기드문 기수지역으로 바닷물과 용천수가 혼입되어 독특한 식생이 분포하고 새들의 먹이가 되는 생물들이 많아 이곳을 중간 기점으로하는 철새들의 안식처이다. 제주의 4군데 철새도래지 중 으뜸이다. 조류독감에 대비하여 방역당국이 긴장을 늦추지 않는 곳이다. ▲ 철새도래지 전경 이 곳 철새도래지의 기수지역 둘레는 약 3.7km이다. 30여종의 철새가 발견되며 멸종위기종인 황새도 드나들었다고 하나 지금은 볼 수 없다. ▲ 말 가을하늘 아래에서의 철새도래지 풍경은 기대이상이다. 감탄할 틈도 없이 멋진 풍경이 이어진다. 수북한 털을 머금은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고 그 옆에선 질새라 억새가 고개를 든다. 갈대가 있음은 이곳이 민물을 머금은 습지라는 의미다. 제주들판을 온통 뒤덮는 억새도 이곳에선 물가에서 한발치 떨어져 가을 풍경에 덧칠을 하고 있다. ▲ 물가의 해오라기 원래 이곳 철새도래
제주역사나들이 9차 코스입니다. 제주역사 나들이 9차 탐방코스는 하도리 금붕사에서 출발하여 하도 철새도래지, 지미봉과 종달리 마을 일대,간척지를 경유하는 코스입니다. ■금붕사 ▲ 금붕사 전경 금붕사는 하도리 994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한국불교태고종 제주교구 사찰이다. 창건시기는 명확히 알려진 바 없으나 1926년 10월에 새로 창건했다. 1938년 5월 법당을 신축한 이래 신도 수가 증가하면서 발전했으나, 제주4·3사건 당시 토벌대에 쫓기던 동네 주민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사찰 전체가 불태워지고, 이성봉스님이 총살당했다. 1960년대에 사찰 재건 사업으로 현재에 이른다. ▲ 오백나한도 금붕사에는 오백라한상을 그린 오래된 불화가 있다. [1995년경 만난 주지스님의 이야기로는 '제주대학교 모 교수가 보고 조선 초기 작품으로 보인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2008년 2월에 만난 스님의 말은 "원광대 불교미술전공 교수가 보고 말하기를 200년 이상 된 작품이라고 감정했다"고 한다. 이 그림은 다른 탱화들에서
■별방진 ▲ 김승욱 [1973년 4월 3일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중종 때 제주목사 장림(張琳)이 김녕읍에 있던 진을 이곳으로 옮겨 별방이라 이름하였다. 성의 총길이는 1008m, 높이는 3.5m 정도이다. 성에는 관사와 창고가 있었고, 동·서·남의 세 곳에 문이 있다. 성을 쌓을 때 흉년이 심하여 부역하던 장정들은 인분(人糞)까지 먹어가며 쌓았다는 이야기가 인근에 전해온다. 구좌읍 하도리는 옛 지명이 별방이며, 서문리는 별방의 서문 안에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주특별자치도는 고려 때부터 동부와 서부 해안에 석성을 쌓아 군인들을 주둔시켜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는데 화북진, 조천진, 별방진, 애월진, 명월진, 차귀진, 모슬진, 서귀진, 수산진 등 9진이 있었다.] 출처-두산백과 ▲ 별방진 남쪽 입구 성벽 □별방조점 ▲ 탐라순력도 별방조점 [제주목 동부의 최대 군사기지인 별방진의 순력모습을 그린 것으로 성정군의 규모는 423명, 우마수는 흑우 247마
■토끼섬(난섬) ▲ 토끼섬과 원담 ▲ 김승욱 토끼섬은 우리나라 유일의 문주란 자생지이다. 원래 바깥쪽에 있는 작은 섬이라는 뜻으로 '난들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난섬이라는 명칭이 여기서 유래한 듯 하다. 아니면 문주란의 난에서 따왔을지도 모르겠다. 토끼섬은 문주란들이 활짝 그 흰꽃을 피웠을때 섬의 모양이 토끼를 닮았다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토끼섬엔 토끼가 없다. 내 눈엔 토끼처럼 보이지 않는데 굳이 시비걸 요량은 추호도 없다. ▲ 토끼섬- 출처 블로거 신혁님 960여 평의 면적에 백사장과 10여 미터 높이의 현무암 동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간조시에는 걸어갈 수 있고 만조때에는 백사장과 동산이 분리되고 또한 육지부와도 분리된다. ▲ 토끼섬의 문주란-출처 시티맵 토끼섬의 문주란 자생지는 천연기념물 19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세계적으로 문주란 자생의 북방한계선이라고 한다. 섬의 출입은 허가를 받아야 가능하다. 간조시에 걸어서 갈 수 있다지만 혼자서 건너갈 엄두가 안난다. 먼발치
■하도리 ▲ 김승욱 하도리는 제주시 구좌읍의 동쪽 해안에 자리 잡은 반농반어 마을이다. 면수동·창흥동·서문동·동동·굴동·신동·서동 등 7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당근이 가장 중요한 소득원이며 감자, 월동무우도 많이 재배한다. 해산물 채취와 축산도 활발하다. 하도리는 해발 50m이내의 평지에 위치한다. 1400년 이전부터 도의여개를 중심으로 촌락이 형성되어 '도의여 마을'로 불리다가 17세기말 마을이 커지면서 '상도의여'와 '하도의여'로 나뉘게 되고 이 마을들이 지금의 상도리와 하도리로 되었다. ▲ 하도리 마을 안길 하도리 마을길은 눈으로 걸어보자. 굳이 하는 설명은 거추장스럽다. ▲ 북풍을 막기 위한 어느 민가의 대나무 방풍림 ▲ 지붕을 최대한 낮춰 놓은 집 ▲ 북쪽으로 돌담과 대나무를 심은 집
■ 제주항일운동 기념탑 ▲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 [제주해녀항일운동은 1931년부터 1932년 1월까지 지속되어 연인원 1만 7130명이 참여하고, 집회 및 시위회수가 238회에 달했던 대규모 항일운동으로 해녀들 뿐 아니라 청년과 일반 농민층도 가담하여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에 적극적으로 투쟁하였다. 국내 최대의 여성 주도 항일투쟁인 동시에 최대의 어민봉기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 김승욱 해녀항쟁은 부당한 해산물 수매가격을 둘러싼 분쟁으로부터 비롯됐다. 당시 관제 해녀어업조합은 뇌물을 제공한 일본인 상인에게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해산물을 매입할 수 있도록 특혜를 주었는데 이에 분노한 해녀들의 집단 항의가 1932년 1월 7일 세화오일장에서 일어났고, 1월 12일 해녀어업조합장인 다쿠지 도사가 면사무소를 방문할 때 손에 호미와 빗창(전복을 채취할 때 사용하는 도구)을 들고 총궐기하였다. 이때 조합장과 담판을 벌인 해녀들이 제시한 요구사항은 지정판매 반대와 공정한 입찰, 조합비 조정, 조합재정공개, 손해배상 등이었다. 제주해녀항일기념탑은 총궐
제주역사나들이 8차 탐방코스는 해녀박물관을 출발하여 해녀항일기념탑을 지나 숨비소리길과 올레21코스 일부를 지나 아름다운 하도리 마을 안길을 거쳐 토끼섬, 별방진, 세화도구리통을 거니는 13Km 길입니다. ■제주 해녀박물관 제주의 해녀는 제주에서의 삶을 대표한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인 이유가 크겠지만 화산섬에서의 척박한 토양은 그들을 바다로 나아가게 했다. 그러나 바다 역시 녹록치 않아 삶이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해녀들의 땀과 눈물이 더해져 갔지만 바다는 여전히 더함도 덜함도 없이 무심한 표정으로 내어준다. 해녀는 아니 우리 선조들은 그렇게 살아왔다.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는 해녀들이 있지만 점차 줄어 들어 안타까움이 들게 한다. 세상의 변화를 그 누가 거스를까. 해녀분들과 관계기관의 노력으로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제주해녀문화'가 한국에서 19번째로 등재된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 해녀물질 출처-제주해녀박물관 ▲ 제주해녀박물관 전경 해녀박물관은 2006년도에 개관하였다. 8만6556㎡의 넓은 부지에 해녀항일기념탑과 함께 한다
■어등포 행원의 옛 지명인 어등포는 제주도 북쪽에 있는 다섯 개의 연륙 포구 중 하나였다. 또한, 그 당시 별방 방호소 소속 전선 1척과 함께 병선도 감출 수 있다고 하였으니 꽤 큰 포구였던 셈이다. ▲ 광해군의 제주 유배 기착지를 알리는 표지석 광해군이 유배를 온 곳이라 해서 어등포라 불렸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틀린 듯 하다. 제주에 올 때 이미 임금이 아닌 죄인 신분으로 왔고 지금까지 복권도 되지 않아 군(君)으로 불리는 신분인데 누가 감히 임금 어(御)를 쓸 수 있었겠는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광해는 강화도로 유배되어 아들 내외의 비참한 죽음을 보았고, 삼전도의 굴욕적인 소식도 들었을 것이다. 그 때 광해는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어쩌면 중립외교를 펼치며 후금(이후 청나라)과 화친을 했던 터라 청에 의한 복권의 희망도 가졌을 듯 하다. 그러나 인조는 삼전도 굴욕이 있고난 직후 그 해인 1637년에 돌연 광해를 제주로 유배 보낸다. 인조도 그러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일까. 광해는 1641년 끝내 절해고도 제주에서 한 많은 67년의 생을 마감한다. 이증(李增)의 남사일록(南槎日錄) (16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