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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욱의 [제주역사나들이](41) ... 9차 종달리 탐방코스 (1)

제주역사나들이 9차 코스입니다.

 

 

제주역사 나들이 9차 탐방코스는 하도리 금붕사에서 출발하여 하도 철새도래지, 지미봉과 종달리 마을 일대,간척지를 경유하는 코스입니다.

 

■금붕사

 

 

금붕사는 하도리 994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한국불교태고종 제주교구 사찰이다.

 

창건시기는 명확히 알려진 바 없으나 1926년 10월에 새로 창건했다. 1938년 5월 법당을 신축한 이래 신도 수가 증가하면서 발전했으나, 제주4·3사건 당시 토벌대에 쫓기던 동네 주민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사찰 전체가 불태워지고, 이성봉스님이 총살당했다. 1960년대에 사찰 재건 사업으로 현재에 이른다.

 

 

금붕사에는 오백라한상을 그린 오래된 불화가 있다.

 

[1995년경 만난 주지스님의 이야기로는 '제주대학교 모 교수가 보고 조선 초기 작품으로 보인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2008년 2월에 만난 스님의 말은 "원광대 불교미술전공 교수가 보고 말하기를 200년 이상 된 작품이라고 감정했다"고 한다. 이 그림은 다른 탱화들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황인·백인·흑인이 모두 등장하고 있다. 둘째, 인물의 표정과 시선 방향·동작이 모두 제각각이다. 세째, 등장인물의 복식(服飾)이 옛 중국 옷을 닮았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이런 모습을 그린 불화는 알려진 것이 없다고 한다.

 

1995년경에 만난 주지스님이 '처음 이 절에 왔을 때부터 걸려 있었는데 배접한 종이가 가루처럼 부식되어서 궤 속에 보관하기를 20년쯤 하고 나서 최근에 다시 표구해서 대웅전에 걸어 놓았다'고 한다. 추정컨대, 이 그림은 중국에서 그려진 것이 어떤 경로로 우리 나라에 들어왔고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다가 이 절을 창건한 스님이 육지부에서 구해 가지고 와서 모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지금은 액자에 넣었는데 유리를 끼웠다.] 출처-고영철의 역사교실

 

■신착개 간척사업지

 

 

잡초와 갈대가 무성한 낯선풍경이 지미봉을 정점으로 광활하게 펼쳐진다. 종달리 1659-6번지에서 1673-1번지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다.

 

 

이곳은 제주의 여느 들녁과는 사뭇다르다.

 

지금은 버려진 듯 사람의 손길을 거부하며 무성한 잎새들 사이로 철새들의 보금자리로 변모한 곳이다. 이 곳을 지금도 가로지르고 있는 오래된 수로는 이곳에 농사를 지었던 흔적이다.

 

이곳은 간척지였다.

 

 

원래 이곳은 지미봉 남서측까지 물길이 휘감는 지형이었다. 위 사진의 탐라순력도 별방조점을 보면 지미망(지미봉)을 휘감은 바닷길이 확연하고 배를 댔던 용항포와 신착개가 있었다.

 

 

별방조점과 1914년도 지적도를 근거로 과거의 지형을 추정해 보았다. 하도리 창흥동엔 용항포라고 불리던 선착장이 있었고 지미봉을 휘돌아 종달리 뒷편엔 신착개가 있었다. 다만 조수 간만을 잘 맞추어야 배를 댈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얕은 수심과 모래펄이 펼쳐져 있었을 것이다. 근처에 발견된 여러 곳의 조개무지가 그걸 증명한다. 그리고 곳곳에서 끝없이 용천수가 바닥에서 샘솟았다. 이를 탕탕물이라 했다.

 

 

위의 표지석을 보면 대정군수를 지낸 채구석(1850-1920)이 1899년에 간척사업을 시도했다고 한다. 그 후 구례현감을 지냈던 함덕출신 송상순(1842-1921)이 매입하여 대대적으로 간척사업을 하여 바다 쪽은 양어장으로 안쪽은 논으로 개간하였다고 한다.

 

 

채구석은 제주 방성칠의 난과 이재수의 난으로 불리는 신축교난을 배경으로 한 현기영의 소설 '변방의 우짖는 새'에도 등장한다. 이재수는 그가 부리던 하인이었다. 그는 이재수의 난 때 프랑스 신부의 처형 만큼은 극구 말려 제주에 더 큰 화가 미치지 않도록 노력했다. 채구석이 진사시험을 합격하고 교지를 받으러 한양에 갔을 때 갓을 파는 상인과의 일화는 유명하다. 그래서 채똑똑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한양을 오갈 때 제주 촌놈 채구석에게는 호남지대의 끝없는 논이 눈에 들어왔을 거다.

 

 

조선왕조실록 고종편에 보면 채구석은 제주판관시절에 녹봉을 털어 백성들의 구휼에도 힘썼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 성정의 채구석은 호남 곡창지대의 나록밭을 보면서 우리 제주사람들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쌀이 거의 나지않아 고이 모셨던 쌀 한 줌으로 겨우 제사를 지내던 곳이니.

 

쌀을 생산하는 논에 대한 열정은 그 때 생겼을지도 모른다.

 

내 생각이 그랬을 거라는 거다. 그래서 그는 결심한거다. 물이 많은 이곳을 메워 논을 만들고 쌀을 재배하자고. 그러나 그의 사업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메운땅이 꺼지고 바닷물이 올라와 결국 못쓰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재수의 난으로 우여곡절 끝에 사형을 면하고 수형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 천제연의 물길을 끌어 중문에 7만평이라는 논을 기어코 만든다. 변변한 장비가 없던 그 당시 바위를 뚫고 물길을 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그는 해냈다. 그 귀하게 만든 논 자리엔 중문관광단지가 들어서고 컨벤션센터가 자리한다. 어렵사리 일군 그 논 한자락이라도 남겨두지 않은 점은 아쉬움이 크다.

 

애경그룹 창시자이자 장영신 회장의 남편인 고 채몽인이 그의 5남이다. 생년을 따져보니 채구석군수가 67세에 본 아들이다. 정말 대단한 위인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승욱은?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오현고를 나와 서울대 공대 건축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육군 ROTC 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삼성물산 주택부문에서 일했다. 경영위치 건축사사무소에서 건축공부를 더 한 뒤 에이스케이 건축 대표이사를 거쳐 제주로 귀향, 현재 본향건축 대표를 맡고 있다. 제주대 건축공학과에서 건축시공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주말이면 고향 제주의 벗들과 제주의 역사공부를 곁들여 돌담·밭담·자연의 숨결을 더듬고자 ‘역사나들이’ 기행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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