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보수 막론하고 중앙언론 크게 보도 2003년 3월 29일, 비록 “6개월 동안 수정의견을 받는다.”는 조건부 단서가 달렸지만, 4‧3위원회에서 진상조사보고서를 채택하자 중앙언론들이 일제히 이 사실을 크게 보도했다. 중앙지들은 4‧3사건 발생 55년 만에 정부 차원의 첫 종합보고서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고, 특히 국가공권력에 의한 주민 희생 등 인권침해 여부를 규명하는데 역점을 뒀다는 점에서 평가받고 있다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3월 31일자 『한겨레신문』은 “해방공간에서 이념갈등이 개입된 유혈사태에 대한 정부 차원의 첫 공식보고서라는 의의를 지닌다.”, 『중앙일보』는 “국가공권력에 의한 불법사건으로 규정했다”, 『동아일보』는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하게 주민들이 희생된 사건으로 규정했다”고 보도했다. 또 『경향신문』은 “4‧3 와중에 희생됐다는 이유로 ‘빨갱이’이라고 손가락질 받아온 희생자 유가족들의 반세기 신원을 해주려 했음을 명확히 했다
나종삼 전문위원 “제주출신 편향적 집필” 주장 2003년 3월 24일, 고건 총리가 주재하는 4‧3진상조사보고서 심의 소위원회에 당초 회의 참석 대상자가 아니었던 국방부 출신의 나종삼 전문위원이 출석했다는 것은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국방장관이 강력히 요청했고 총리실에서 수용했다는 걸 알고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시 진상조사보고서 집필 업무를 총괄했던 나를 공격하고, 보고서 심의를 원천적으로 무력화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진상조사보고서 초안이나 그 심의 과정이 불신을 받는다면, 그 다음 상황은 어떤 파장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나는 문제가 간단치 않다고 생각하고, 회의 직전 박원순(현 서울시장) 기획단장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박 단장은 “알았다”면서 회의장에 들어갔다. 예상했던 대로 회의 서두에 조영길 국방장관이 나서서 나종삼 전문위원이 발언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고건 총리가 이를 받아들였다. 나 위원은 보고서 집필 과정에서 수석전문위원인 내가 전횡을 일삼았고, 제주 출신 전문위원들 중심으로 편향적인 집필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자신이 수정의견을 제출했는데도 수석전
목차안 심의부터 격론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작성 기한이 정해져 있었다. 4‧3특별법에 위원회 구성 후 2년 이내에 자료 조사를 한 뒤 6개월 이내에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4‧3위원회가 2000년 8월에 출범했기 때문에 이를 기준점으로 한다면 늦어도 2003년 3월 이내에 보고서를 완성해야 했다. 보고서 작성의 임무를 맡은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은 기획단장 선임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2001년 1월에야 겨우 출범할 수 있었다. 5개월 가량을 까먹은 것이다. ▲ 2001년 8월 4‧3평화공원 예정지를 방문한 4‧3위원회 및 기획단 위원들 기획단은 2003년 2월 진상조사보고서 초안이 작성될 때까지 모두 12차례 회의를 갖는 등 숨 가쁘게 움직였다. 정부 관계부처 국장급 공무원과 민간인 전문가 등 15명으로 구성된 기획단은 전문위원실에서 작성한 진상조사 대상 선정에서부터 증언조사 계획과 국내외 자료조사 계획 등을 심의했다. 또한 자료 관리 데이터베이스 개발과 자료집, 증언집, 법령집 발간계획 등도 논의했다. 실질적인 진상조사 등은
행방불명 희생자 5천여명에 달해 2000년 3월 13일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회’(4‧3행불유족회)가 창립됐다. 그날 제주시 신산공원 옆 제주관광민속관 공연장에 모인 행방불명인 유족 400여 명은 “4‧3 당시 정당한 재판절차 없이 생명을 빼앗긴 이들에 대한 법적 명예회복과 4‧3 진상규명을 위해 치열한 활동을 할 것”을 선언했다.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회’ 창립대회 이날 창립대회에서 공동대표 김문일‧박영수‧송승문‧이중흥‧한대범과 감사 강성열‧김영훈이 선임됐다. 행불유족회는 4‧3 당시 집단학살 암매장지로 예상되는 제주비행장(정뜨르)을 비롯한 학살터에 대한 자료조사와 시신 발굴 작업을 벌이겠다고 밝혀 관심을 끌었다. 4‧3 당시 희생자 중에는 ‘시신 없는 희생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군법회의 등을 거쳐 육지형무소로 끌려갔다가 6‧25가 터지면서 대부분 집단 처형됐다. 군 당국의 선무공작에 따라 “살려 준다”는
새해 벽두 제주도정엔 수많은 과제가 널렸다. 민선 6기 이후 사실 제주도정엔 까다로운 현안들이 즐비했고 쉼 없는 개혁과 변화가 시도됐다. 2014년 7월 출범 후 이제 민선 6기 절반을 찍는 변곡점이 6개월여 앞으로 다가왔다. 그 점에서 제주도정을 이끌고 있는 원희룡 제주지사의 생각이 궁금하다. 2016년 한해동안 새로이 등장한 제주 제2공항 이슈를 비롯해 4·13 총선까지 예정된 마당-. 그의 지향점은 물론 선거판에서 그의 정치적 중립 의지까지 시험대에 올랐다. 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 6개 회원사(제이누리, 제주의 소리, 미디어제주, 시사제주, 헤드라인제주, 제주도민일보)가 공동으로 그의 신년설계를 인터뷰했다. 인터뷰시점은 지난 28일 오후 5시, 장소는 제주도지사 접견실이다. ▲ 신년인터뷰 중인 원희룡 지사 ▶주민동의 문제를 놓고 제2공항에 대한 주민반발이 불거지고 있다. 주민동의 절차를 따로 밟을 생각은 있는지 궁금하다. “자꾸 주민동의를 말하는데 난감하다. 우선 공항건설이라는 사업의 성격상 여러 곳의 후보지를 놓고 공항이 필요한지와 입지를 놓고 얘기하게 된다. 사실 (해당지역) 주민들은 동의하기 어렵다. 동의를 얻으라는 것은 결
뉴욕타임스, 1개면 전체 4‧3기사로 서울 종로구 경복궁 옆 4‧3중앙위원회 사무실에 매일 출근하면서 진상조사를 한창 진행 중이던 2001년 10월 24일, 자료 조사차 미국에 파견되었던 전문위원 장준갑 박사로부터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 뉴욕타임스」 홈페이지에 실린 제주4‧3 관련 보도기사 장 박사는 “오늘 「뉴욕타임스」에 제주4‧3 진상조사와 양 수석 인터뷰 내용이 1개면 전면에 대문짝처럼 보도됐다.”고 알려왔다. 다소 흥분된 어조였다. 그날 「연합뉴스」는 워싱턴 강일중 특파원의 기명 기사로 “NYT(뉴욕타임스), 제주4‧3사태 진상규명 노력 소개”란 제목 아래 이 내용을 타전했다. 「연합뉴스」의 기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 뉴욕타임스는 최근 한국과 미국에서 반세기 전 제주4‧3사태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한 노력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24일 소개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1948~49년 당시 제주도 전체 인구의 10%가
무장대 출신 찾아 일본으로 4‧3위원회 진상조사팀은 증언조사를 하면서 제주 진압작전에 참여했던 군 장교 출신자 못지않게 반대진영에 섰던 무장대 경력자 발굴에 신경을 썼다. 토벌대나 무장대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관련자들의 증언이 무엇보다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장대 경력자들을 국내에서 찾기는 힘들었다. 한때 ‘반공’을 국시로 내세울 만큼 완고한 반공체제의 정치환경에서 그들이 발붙일 곳은 없었다. 그들을 찾기 위해서는 일본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사태를 피해 일본으로 밀항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진상조사팀은 일본 현지 조사 과정에서 몇몇 무장대 경력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삼룡(도쿄 거주)이다. 나와 김종민 전문위원으로 구성된 일본 조사팀은 2002년 7월 도쿄 한 호텔에서 일흔아홉 살의 그를 만났다. 제주도청 공무원이었던 그는 4‧3 발발 때에는 남로당 제주도당 정치위원의 신분으로,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 함께 대정면 신평리에 있던 도당 아지트에 있었다고 털어 놓았다. 그가 밝힌 무장봉기 결정 과정은 이렇다. 신촌회의서 12대 7로 무장봉기 결정 1947년 3‧1 발포
20명으로 진상조사팀 꾸려 4‧3위원회는 2000년 8월 진상조사 작업을 벌일 전문위원 공개채용을 실시했다. 어렵게 인원수를 확보한 전문위원 5명을 선발하는 절차였다. 이 공모에 모두 9명이 응시해 그해 10월에 5명이 최종 선발됐다. 합격자는 김종민(전 제민일보 4‧3취재반 기자), 나종삼(전 국방군사연구소 전사부장), 박찬식(전 제주4‧3연구소 연구실장‧문학박사), 양조훈(전 제민일보 편집국장), 장준갑(전 미 미시시피 주립대 강사‧철학박사)이었다. 나는 전문위원실 업무를 총괄하는 수석전문위원에 임명됐다. 실질적인 진상조사팀장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곧이어 전문위원의 업무를 보좌할 조사요원 채용절차에 들어갔다. 이 역시 국회의원 당선자 등이 행자부장관과 담판을 벌여 조사요원 정원 20명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공채를 하려고 보니 보수가 너무 낮게 책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보수로는 우수한 전문 인력을 확보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해 차라리 채용 인원을 줄이더라도 보수를 높여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보수 문제 때문에 조사요원 숫자를 15명으로 줄여 채용했다. 그해 11월에 이르
2000년 4‧3특별법 제정 이후 시행령 파동으로 요동치더니 곧이어 위원회와 기획단, 조사 인력 등 인적 구성 과정에서도 여러 차례 회오리가 휘몰아쳤다.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반복되었다.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최고 의결기구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다. 그 산하 조직으로 진상조사와 조사보고서 작성을 위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작성기 획단’, 위원회의 의결사항을 실행하기 위하여 제주도지사 소속 아래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실무위원회’를 두도록 했다. 또 사무기구로 행정자치부 산하에 ‘제주4‧3사건처리지원단’, 제주도 산하에 ‘제주4‧3사건지원사업소’를 각각 설치, 운영하도록 했다. 이들 기구 중 2000년 3월 3일 행정자치부 소속으로 4‧3지원단이 맨 처음 발족했다. 처음엔 행자부에서 파견한 행정고시 출신 박동훈 서기관(현 국가기록원장)과 제주도에서 파견한 2명 등 3명의 공무원이 준비 작업을 시작했다. 그해
“우리는 이번 정기국회에서 제정된 4‧3특별법은 4‧3 진상규명을 향한 도정에서 첫 단추만 꿰맨 것이지 어떠한 낙관도 금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향후 진행될 여러 후속조치, 즉 시행령과 조례 등 관련 하위법령의 제정 및 법안에 명시된 진상규명특별위원회의 구성 등이 도민의 염원과 민족적 양심에 부응하여 ‘시급히’ 그리고 ‘공정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꾸준히 감시하고 촉구할 과제가 주어져 있다고 우리는 판단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특별법이 제정된 오늘을 4‧3 진상규명을 위한 제2단계 투쟁의 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위의 내용은 4‧3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던 1999년 12월 16일, ‘4‧3특별법 쟁취 연대회의’ 등이 발표한 공동성명에 나오는 글이다. 4‧3연대회의는 “특별법 제정은 제주도민의 위대한 승리”라고 평가하면서도 앞으로 있을 후속조치를 주시하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우려가 현실로…어처구니없는 개악 그런데 이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시행령 제
▲ 1999년 12월 16일 국회 본회의에서 4‧3특볍법안 통과를 선언하는 박준규 국회의장. 행자위·법사위는 무난히 통과 1999년 12월 13일, 국회 행정자치위원회는 산하 법안심사소위가 심의하여 만든 4‧3특별법 단일안(행자위 대안)을 일부 조문의 수정 끝에 통과시켰다. 4‧3특별법안이 중요한 관문을 또 하나 넘은 것이다. 이제 4‧3특별법안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와 본회의의 의결 과정만 남게 됐다. 국회 행자위 심의 과정에서 행자위 수석전문위원(박봉국)은 4‧3특별법 발의안에 대해 “지난날 우리 민족이 겪은 아픔의 한 부분을 치유하려는 취지를 가진 것”이라고 평가하고, 이 법안을 심사할 때는 “사건의 진상에 대한 역사의식과 정책의지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날 행자위 전체회의에서 한 조문이 수정됐는데, 그것은 행자위 대안에 ‘제주4‧3사건 백서 편찬’으로 표현됐던 것을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작성’으로 바꾼 것이다. 즉 정부 차원의 위원
우여곡절 겪고 4‧3특별법 심의 돌입 1999년 12월 1일 극적으로 국회에 제출된 국민회의의 ‘제주4‧3특별법안’은 13개 조항으로 짜여졌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4‧3사건에 대한 정의’ 규정이다. “1947년 3월 1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빚어진 무력충돌 및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4‧3연대회의 등의 주장을 상당히 반영한 것이다. ▲ 변정일 전 의원(좌)과 고 양정규 전 의원 4‧3특별법안은 또 국무총리 소속하에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를 두고 이 위원회의 의결사항을 실행하기 위해 제주도지사 소속하에 실무위원회를 두도록 했다. 이밖에 4‧3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불이익 처우금지와 4‧3백서 편찬, 위령사업 지원, 제주4‧3평화인권재단 설립, 의료지원금 및 생활지원금 지급 등을 규정했다. 이는 11월 18일 국회에 제출된 한나라당의 4‧3특별법안(15개 조항)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