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 눈처럼 쌓인 거리를/ 나 혼자서 걸었지/ 미련 때문에/ .../ 정다웠던 그 눈길 목소리 어디 갔나/ 아픈 가슴 달래며 찾아 헤매이는/ 가을비 우산속에 이슬 맺힌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음악과 거리를 둔 적이 없다.
‘건반 위의 음유시인’으로 불리는 작곡가 백태기.
그는 전주시에서 ‘유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8남매의 일곱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나 주변의 부러움도 샀다.
부유해서일까? 태어나기 전부터 집에는 ‘전축’이 있었다. 1940년대 당시 ‘전축’은 웬만한 부잣집이 아니면 구경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 전축에선 항상 ‘클래식’이 흘러 나왔다. 베토벤, 모차르트, 차이코프스키 등 거장들의 음악을 자장가 마냥 들으며 살았다. ‘음악’을 알기 이전부터 ‘음악적 DNA’가 만들어진 셈이다.
그의 음악적 DNA를 깨워준 것은 ‘노래’였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시절 점심시간마다 친구들 앞에서 ‘효녀심청’을 불렀다. 그가 노래를 부르면 교실이 눈물바다가 됐다. 감성을 흔드는 음악의 매력에 빠져들게 됐다.
중학교 2학년때 노래 시험을 보다가 돌연 선생님 손에 이끌려 ‘피아노’를 시작하게 됐다. 그 당시 선생님은 "교직생활 10년만에 박자, 음정, 목소리 모두가 완벽한 아이는 처음 봤다"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날 이후 피아노에 중독됐다. 아버지 몰래 배우기 시작했다. 엄했던 아버지가 허락해 줄리 만무했다. 레슨비는 책값, 학용품 값이라며 거짓말로 타서 충당했다. 레슨비가 모자라면 쌀을 퍼다 주기도 했다. ‘도둑 레슨’은 고등학교 2학년때까지 약 4년간이나 이어졌다. 그때 몰래 배운 피아노가 지금 그의 음악 인생의 초석이다.
그 시절 '피아노 선생'은 강정구씨였다. 가곡 ‘동심초’ 등으로 유명한 작곡가 ‘요석(樂石)’ 김성태 박사의 제자였다. 운이 좋은 편이었다. 클래식은 기본. 팝, 재즈 등 음악적 편식이 없던 강 선생 밑에서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게 됐다.
재즈, 영화음악, 대중음악 등 여러 장르에서 활동하는 그의 음악 인생을 보아도 강 선생의 영향이 지대했다. 자신의 장르를 벗어나지 못하고 타 장르를 배척하는 일부 음악인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10대때 받은 영향이 70세까지 이어졌다. 그는 “내 음악은 강정구 선생이 만들어줬다”고 말했다.
그런 그를 ‘프로’의 길로 이끌어 준 인물은 작사가 이두형씨다.
우연히 방문했던 이씨 집에서 ‘가을비 우산속’의 가사를 발견했다. 글귀를 보자마자 '필'이 꽂혔다. 이두형씨가 작곡을 부탁하자 흔쾌히 받아들였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곡은 순간적으로 완성됐고 발표된 1979년에 한국방송작곡대상까지 휩쓸며 데뷔 1년도 안돼 한국 대중음악의 거장으로 떠올랐다.
음악에 대한 열정을 새롭게 불사르게 된 계기는 ‘제주도’였다.
1990년대까지 일본, 홍콩, 미국 등을 오가며 음악인으로써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1998년 KBS교향악단 단장 자리를 제안 받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런데 구제금융(IMF) 사태가 터졌다. 단장 자리는 물거품이 됐고 우울증이 왔다. 음악도 손을 놨다.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될까 두려웠다.
모든 시름을 털기 위해 아무 연고도 없는 제주도로 ‘이민’을 왔다.
그는 현재 제주시 연동에 ‘백태기 실용음악학원’을 열고 후학들을 키운다. 제2의 음악인생이다. 문화의 불모지인 제주에서 음악인으로 15년째 살아가고 있다.
“하루하루가 즐겁다. 넓은 들과 높은 산, 바다를 보면 행복하다. 제주도는 마음과 몸과 행동을 젊게 만든다.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재충전의 땅이라고 할까? 제주도는 제2의 고향이다.”
그는 올해 칠순을 맞아 생일잔치 같은 콘서트를 준비 중이다. 콘서트 날짜는 그의 생일인 11월22일. 장소는 제주문예회관이다.
“나를 뽐내기 위한 콘서트가 아니다. 나의 삶을 이야기하듯 나의 음악을 선보이고 싶다. 특히 새 삶을 찾아준 제주도에서 열고 싶었다. 친구들과 함께 하는 생일파티처럼 재미있고 신나게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
-히트곡 ‘가을비 우산속’이 대중들에게 여전히 사랑 받고 있다.
"이 곡은 정말 우연히 만들어진 곡이다. 이두형씨 집에 들렸다가 가사를 받고 음악적 영감을 받았지만 작곡에 바로 들어가진 못했다. 일주일 후에 내 집을 찾은 이두형씨가 “곡이 나왔냐”고 물어보자 자존심에 “있다”고 말하고 즉흥적으로 흥얼거렸다. 이씨가 나간 후 후다닥 만든 곡이 ‘가을비 우산속’이다. 운명 같았다. 작곡한 해에 작곡상을 수상한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기적 같다. 이렇게 빠르게 히트칠 줄도 몰랐고 오랫동안 사랑 받을 줄도 몰랐다. 감사할 뿐이다."
-오랜 음악 활동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가수는.
"노사연이다. 그와 안타까운 ‘사연’이 많다. 당시 노사연은 신인이었다. 힘있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참 좋았다. 1979년 작곡대상을 받은 후 1980년 국제가요제에 작품을 출품할 것을 제의 받았다. 모집기간이 일주일이나 지나서 PD의 전화를 받았다. 연습기간이 너무 짧아 걱정됐지만 “작품대상 받은 사람이 출품을 안 하면 누가 하느냐”는 PD의 말에 부랴부랴 준비하게 됐다. 평소 눈 여겨 보았던 노사연에게 노래를 부르게 했다. 곡이나 목소리는 좋았지만 연습기간이 문제가 됐다. 우리의 곡은 심사위원들의 장고 끝에 심사에서 떨어졌다. 상심할 새도 없이 이날 직후 미국으로 이민가게 돼 그와 연락이 끊겼다. 참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 기사를 본다면 다시 연락을 주었으면 좋겠다."
-여전히 작곡활동을 하고 있나.
"물론이다. 지금까지 발표 못한 곳은 수백여 곡이 된다. 장르도 다양하다. 최근에는 생활공동체 협동조합 ‘혼디모영’의 주제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제주도로 몰려오는 이주민들을 위해 토착민들이 도움을 준다는 취지가 매우 마음에 들어서 도움을 주게 됐다. 앞으로도 작곡 활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가장 애착이 가는 음악은.
"작곡한 500여곡 중 ‘아이야’라는 곡을 참 좋아한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애착이 많다. 자장가이기 때문이다. 작곡가라면 자장가를 꼭 만들고 싶어한다. 브람스나 모차르트 등과 같은 거장도 자장가를 남기지 않았는가. 햇살이 드는 창가에서 아이를 안은 엄마가 노래를 불러 준다는 내용이다.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오는 칠순 생일날 여는 콘서트에서도 연주할 예정이다."
-음악이란?
"음악은 나에게 ‘샘물’과 같다. 고여있으면 안 된다. 샘물처럼 흘러서 넘쳐야 한다. 그 샘물의 역할을 해준 것이 제주도다. 제주도에서 샘물처럼 다양한 음악활동을 오랫동안 하고 싶다."
-앞으로 계획은.
"일단 건강해지고 싶다. 음악활동을 오랫동안 하려면 건강이 기본 조건이다. 나이가 들고 보니 매우 중요한 요소더라. 아침마다 한라수목원을 산책한다. 건강에 매우 도움이 되고 있다.
또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 내 생일을 맞아 칠순 잔치 하듯이 프로그램을 짜고 있다. 7080을 추억하는 시간을 마련할 예정이다. 많은 음악인들과 함께 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제주에 바라는 점.
"제주도는 음악을 하기 참 좋은 곳이다. 넓은 평지와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들이 많아 라이브 하기에 좋다. 그런데 이런 곳이 문화의 불모지다. 안타깝다. 음악 하는 사람은 음악이 직업이다. 직장이 없는 직업은 허망할 수 밖에 없다. 많은 음악가들이 활동하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낭만’이 있는 제주에 ‘음악’이 없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제주도에 문화유학 코스가 있다면 좋겠다. 음악인들이 “제주도로 문화 유학을 가자”고 말하지 않을까.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그런 날이 곧 온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