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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혼란과 과도기 지속되던 미군정기 제주도 경제상황

 

1946년 말 제주도 총인구는 271,379명으로 이중 남자가 127,701명이고 여자는 143,678명이다. 리스트의 경제발전 단계로 제2단계인 농목(農牧)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기간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 농업과 수산업의 생산관계도 원시적 자급자족의 범위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종래는 총인구의 3분의 일에 달하는 일본에 출가자에 의한 환송금 등이 다액(多額)에 달하여 도민의 경제력은 강인(强忍)하다(조선은행 조사부, 1948, 조선경제연보 제주도 편).

 

해방 직후인 1945년과 1946년간 제주지역 농업생산량은 급격히 감소했다. 이는 해방 이후 농업생산 기반이 불안정하게 흔들렸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로 인해 양곡 부족 사태가 발생하고 양곡 가격이 폭등하는 사태로 연결된다.

 

1947년 10월 기준 제주도내 식량 여유농가는 10%, 자급자족 50%, 부족이 40%라고 조사되었다. 타도로 부터 반입되어온 식량을 보면 1946년 현재 미곡 2만4901석, 소맥 1만4982석, 소맥분 5354석 대맥 4648석, 옥수수 159석, 전분 23석 총 5만67석이다. 이외에 ‘봇다리’ 장사를 통한 반입도 상당량이다.

 

이런 식량부족 상황에서 미군정은 당초 하루 3합(合)씩 배급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후반 배급량의 절반수준이다. 제주도에서는 2합(合)5작(作)이 기본이었으며 도 당국에서 확약 받은 물량이 제대로 도입되지 않자 이조차 제때 배급되지 않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 식량난을 극복하기 위해 주정(酒精)공장에 비축했던 절간(折簡)고구마 3000 가마니를 풀어 농가 식량난 해결에 나서기도 하였지만 이 역시 역부족이었다. 한편 식량배급 전달체계에도 문제가 있었고 하곡수집계획을 미숙하게 처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미군정은 초기 한국의 농업생산 현실을 고려하지 못하고 곡물자유판매를 실시하여 곡물의 수급문제를 시장경쟁원리에 따라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지주독점과 곡물에 대한 투기, 매점, 과소비로 수요급증이 발생해 심각한 식량부족 사태를 초래하였다.

 

이렇게 되자 미군정(美軍政)은 1946년 2월 자유시장제를 취소하고 일제강점기의 곡물수집제도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미군정의 곡물수집정책은 제주지역 농촌 실정에 비해 과다한 부담을 주었고 이로 인해 도민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미군정은 관리, 경찰인력을 동원해 대대적인 공출(供出)작업에 나섰다.

 

제주도의 1946년 추곡 수매 할당량은 5000석(石)이었으나 수집량은 1947년 1월말까지 0.1%에 그쳤으며 1947년 하곡 수매량도 할당량 1만7000석 중 18.8%인 3189석에 그쳤다. 이는 전국 수매율 97.9%에 비해 크게 저조한 실적이다.

 

1947년도 하곡 수확 예상량은 약 8만5000석 정도 이중 실제로는 할당량의 59.5%인 1만100석 밖에 수집되지 않았다. 이러한 미군정의 강압적인 공물수집정책은 제주도 농업의 생산력 기반을 크게 악화시켰다.

 

즉 생산비 이하의 저가격 수준으로 곡물 수집을 강제함으로써 그 결과 농민에게 과중한 부담을 주고 직접적으로 영농의욕의 저하를 가져왔던 것이다.

 

수산업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어획고는 1945년 300만 ㎏, 해방 후 감소 일로로 1946년도는 1944년 대비 약 100만 ㎏ 감소한 200만 ㎏, 1947년 7월까지 100만 ㎏에 불과하였다. 어선은 1945년에는 1948척이었으나 1946년 말 현재 1532척으로 감소하였는데, 대부분 소형 재래식, 대형 및 발동어선이 전무(全無)한 상태였다.

 

해방 전에도 제주도는 기계 제조업, 건설업, 중공업 등의 기반은 미미했다. 제주도의 공업은 가내공업, 수공업 수준으로, 수공업은 직물, 죽세공, 조선모자 등이 제조에 불과하였었고 고구마, 감자 등을 원료로 하는 전분공장, 수산물 가공 공장, 식료품 제조 공장이 있었다. 이나마도 해방 이후 원료공급 부족으로 가동이 중단된 상태였다.

 

해방 직후 제주도내 대부분의 점포는 상품 없는 점포로 전락되어 보통 상품은 과실, 과자 등을 위주로 하는 미국 및 일본상품을 약간 진열하는 수준이었다. 매일 한 점포 평균 매상은 1000원 내외였다.

 

반면 정기시장에서는 보통 점포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상품, 특히 일본제 상품들이 범람(밀수상품 위주)하였는데, 이러한 암상인(暗商人)의 활동 증가로 일반 상거래가 쇠퇴하고 암시장(暗市場)이 왕성하였던 특징이 있다.

 

또한 도내 상품 대부분은 밀무역(密貿易) 상품이었고 따라서 정상 점포의 상인은 그 취급을 꺼려하여 대부분 암상인에 의한 암시장 거래가 활발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해방 이후 일본 상품 및 일본군이 잔존한 군수품으로 인한 졸부가 다수(多數)이나 이 거부(巨富)층은 대부분이 부산, 서울, 인천, 목포 등지로 이주하였다. 해외로부터 귀환한 본도 출신 동포들은 기왕부터 각자 고향에 경제적 준비와 저축을 하고 있었고 입국 당시 어느 정도의 현금과 물자를 반입하여 왔음으로 현재 서울 등지에서 보는 비참한 생활풍경은 발견하기 어렵다. 다소의 이익만 있으면 노고(勞苦)를 불문코 남녀노소가 목포 등 육지부 연안에 왕래하여 소위 ‘봇다리’ 장사를 하고 다니는 광경과 부녀자가 수천리 태평양 파도를 횡단하여 일본 등 외국과 무역을 하고 있는 사실은 도민의 경제력과 활동적 기상, 해양적인 왕성(旺盛)을 표시한다(조선은행 조사부, 1948, 조선경제연보).

 

미군정 당국은 대외무역을 철저히 미군정 통제 아래 두고자 하였다. 한마디로 미군정기의 무역은 관영(官營)무역 내지 국영(國營)무역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군정 당국은 무역업자의 난립을 막기 위하여 무역업 자체를 처음부터 허가제로 운영하였다.

 

즉 모든 물자의 해외교류는 물론, 각종 재산의 반입과 반출, 해외여행 육․해․공의 각종 운반수단 그리고 이들을 위해 이용되는 항구나 공항 등을 모두 미군정의 강력한 통제 하에 두었다.

 

심지어 쌀과 같은 주곡은 수출금지 품목으로 묶고 그것을 어기면 강력하게 처벌했다. 수입의 경우 총수입의 80~90%가 국가에 의한 국영무역이었고 민간에 의한 수입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미군정 3년간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약 4억 634만여 달러의 원조(援助)를 공여(供與) 받았다. 미군정의 원조는 1945년도 494만여 달러, 1947년 1억 7537만여 달러, 1948년도 1억 7959달러이다.

 

제주도 상공과(商工科)에서는 1947년 1월 10일 현재 각 읍․면을 통하여 면포 1만7220마, 인견 3180마, 성냥 병형(竝型) 1만4440개, 본견반견 4000마, 미곡수집용 면포 6만2760마 군화 698족 단화 986족 성냥병형(竝型) 2만4000개 성냥덕용(德用) 7808개 화장비누 1800개를 일반에게 배급하였다.

 

또한 제주도 상공과에서는 1947년 3월에 금융조합연합회를 통하여 일반에게 양말 2522족 면포류 7만425마 운동화 6466족 고무신 2만2981족을 배급 또 광목 4만6000마를 일반 가정에 배급하였다. 그러나 이는 도민의 수요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것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미군정기 제주도 경제는 전반적으로 혼란과 과도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통하여 경험했고 경제활동에 대한 의지, 생산활동 능력 등을 바탕으로 해방 직후 혼란기에도 제주도민들의 경제활동과 일상생활을 평상 수준 이상으로 유지시키려는 노력을 지속하였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제주대 사범대를 나왔으나 교단에 서지 않고 동국대에서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2011) 학위를 받았다. 제주도 경제특보에 이어 지금은 지역산업육성 및 기업지원 전담기관인 제주테크노파크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겸임교수로 대학,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등이 있으며『문화콘텐츠기술과 제주관광산업의 융복합화연구』(2010),『제주형 첨단제조업 발굴 및 산업별 육성전략연구』(2013),『제주자원기반 융복합산업화 기획연구』(2011) 등 보고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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