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과 달랐다. 독주였던 2014년 지방선거와 달리 운동장은 이미 기울어 있었다. 승부수를 던졌다. 탈당의 카드를 꺼냈고 도지사직도 일찍 벗어 던졌다. 더블 스코어 격차이던 지지율 차는 어느 순간 팽팽한 접전으로 바뀌더니 선거 막판 10%P 이상 격차로 역전됐다.
두달도 안돼 그는 다시 돌풍을 일으켰고 막판까지 그의 고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제37대에 이어 다시 제38대 제주도지사의 영예를 안은 원희룡(54).
그는 ’제주의 자존심’이라고 불렸다. ‘제주의 자부심’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가 있었기에 고작 말이나 키우는 제주가 아니라 ‘어엿한 인재를 배출한 제주’란 소리도 나왔다. ‘대입 학력고사 전국 수석, 사법고시 전체 수석’이란 타이틀로 그는 그렇게 제주의 자존을 세웠다.
서울대 법학과를 다니던 그는 한때 노동운동의 길에 뛰어들어 제주인의 걱정(?)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더니 떡하니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그리곤 잘 나가던 검사직을 택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검사복을 벗고 정치에 입문했다. 그것도 서울의 ‘교육1번지’인 서울 양천갑을 근거지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내리 3선을 하더니만 그 시절 여당 내 ‘소장 개혁파의 원조’란 닉네임도 꿰찼다. 서울시장 후보로 꾸준히 이름을 올렸고, 여당 사무총장·최고위원을 지내며 차기 대선 주자로도 꼽혔다.
제주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치고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것도 그가 처음이고, 여권의 최고위원 자리에 오른 것도 그가 처음이다. 물론 대권 주자로 거명된 것 역시 그가 처음이다.
그는 2012년 6월부터 1년간 유럽과 중국에서 머물렀다. 2011년 19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40대 젊은 당 대표’에 도전했다가 4위로 최고위원에 선출되는 데 그친 이후 선택이다.
그렇게 칩거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2013년 말부터 심심찮게 그가 제주도지사 후보감(?)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여전히 서울시장감이지 무슨 소리냐”는 반박이 지속됐고, 본인도 손사래를 쳤다. 심지어 제주 몇몇 인사들이 그를 북경으로 찾아가 ‘제주지사 출마’를 권유했지만 그에게서 돌아온 답은 ‘난 아니다’였다.
그러나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그 시절 여권인 새누리당의 필승카드로 부상했다. 이름하여 ‘중진차출론’. 그는 고뇌했다. “회유와 설득, 종용을 뛰어 넘어 압박으로까지 다가왔다”는 고백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의 ‘라디오 정치’는 조금씩 강도와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고 급기야 ‘100% 여론조사 경선’ 수용을 전제로 한 ‘출마’의사로 변화했다.
민선 6기 제주도지사 선거판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돌연 등장한 전폭기의 출현 앞에 거함 우근민 현직 지사는 ‘경선 불수용’ 카드를 내던지고 고뇌의 길로 접어 들었다.
그는 2014년 3월 16일 출마를 공식선언, 첫 제주도지사 도전의 길에 들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알려면 제주를 보라”는게 그 시절 선언이었다. 그가 양손으로 치켜 든 카드엔 “어머니, 원희룡입니다. 제 전부를 바치겠습니다”라고 적었다.
“명절인사 드리러 오지 않았다. 이제 제주를 다시 일으켜 세우러 왔다. 일하러 왔다”고 그는 말했다. “제 가슴이 물으면 하늘이 대답하고 제주도민이 결정할 것”이라고 외쳤다. “제주의 발전을 입증, 대한민국의 변화를 이끌어내겠다”고 호소했다.
그리고 그는 제주의 노정객 신구범을 꺾고 제37대 제주도지사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낙선한 신구범 전 지사를 그의 인수위격인 새도정준비위 위원장으로 모시며 그의 ‘협치’ 행로를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시작한 제주도지사 역할을 사실 너무도 버거웠다. 그가 취임하기 직전 도정 책임자인 우근민 지사에게 그는 부탁했다. “50층을 웃도는 신제주 드림타워 인·허가는 후임 도정에 맡겨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우 지사는 퇴임을 불과 수 주 앞두고 허가를 내주고 말았다.
드림타워와 신화역사공원을 비롯해 그의 민선 6기 도정사는 중국 자본과의 치열한 전투였다. 정치·외교적인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 제주의 환경용량을 벗어난 인·허가를 재정비했다. “신뢰할 수 없는 지도자”란 중국 언론의 욕을 먹으면서도 그는 끝까지 밀고 갔다.
실제로 그의 재임중 중국 자본이 신청한 대규모 개발사업은 모두 거절 당했다.
더욱이 그는 제주를 잘 몰랐다. 제주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대학입학으로 제주를 떠난 뒤 살아보지 못한 터였다. 제대로 모르니, 이른바 ‘궨당문화’에 익숙지 못하니 그에게 타박이 뒤따랐다. ‘오만과 불통의 도지사’란 닉네임이 어느덧 그의 꼬리를 물었다.
전임 도정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조배죽’ 세력의 훼방과 방해도 끊임 없었다. 그랬기에 그는 ‘전임 도정을 중심으로 한 제주판 적폐세력과의 전쟁’이라고 이번 민선 7기 선거를 규정했다.
2018년 그는 달라졌다. ‘제주가 커지는 꿈’을 슬로건으로 내건 그는 ‘도민과 함게 무소속 7번’이란 선거기호를 내밀었다. “도민 속에서, 도민과 함께 하겠다. 진정성을 갖고 가슴으로 소통하겠다. 통합과 포용의 마음으로 뜻을 모아 가겠다. 거듭난 원희룡을 지켜봐달라”고 호소했다.
4년 도정 마음을 닫아가던 도민들이 다시 마음을 열었다. 무엇보다 그가 일궈낸 성과를 무시할 수 없었다. 경제성장률과 고용률 전국 1위, 실업률 전국 최저, 대중교통 만족도 전국 1위에 이어 급기야 지난해엔 그의 취임 초 3369억원이던 제주도 외부차입금을 모두 갚아 ‘빚 없는 제주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만과 불통으로 불렸지만 하지만 그는 그렇게 성과로 말했다. 더욱이 이번 선거기간 중엔 도민들만 보면 납작 엎드렸다. “더 낮게 겸손하게 임하겠다”며 “원희룡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이번 선거기간중 “4년 임기 중 당적을 갖지 않을 수도 있지만 도민들의 명령이라면 민주당 입당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벌써부터 정치평론가들은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난 이번 지방선거에서의 유일한 ‘원희룡의 무소속 신화’를 주목하고 있다. 향후 벌어질 정계개편에서의 그의 ‘역할’은 이제 주변이 아닌 중심이다.
그의 민선 7기 임기가 마무리되는 시점은 2022년 6월 말이다. 꼭 한달 전에 ‘차기 장미대선’이 치러진다.
“대한민국의 1%가 제주도라고 하지만 미국의 0.1%인 아칸소가 어엿한 대통령을 배출한 신화가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다”고 그는 말한 바 있다.
제주를 교두보로 그가 펼칠 새로운 제주의 미래가 이제 그 꽃을 피워가고 있다. [제이누리=양성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