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은 임진왜란 다음해인 1593년 8월 15일 초대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됐습니다. 앞서 말했듯 통일된 지휘체계의 필요성이 대두됐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은 삼도수군 통제사로 내정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되기 한달 전인 1593년 7월 15일, 이순신은 한산도로 본영을 옮겼습니다. 한산도 통제영의 건축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이순신은 한산도 곳곳으로 진을 옮기며 왜군을 공격했습니다. 전라도로 가는 바닷길을 틀어막기 위해서였습니다.
1593년 3월 8일, “한산도로 돌아왔다”는 표현이 처음으로 「난중일기」에 등장합니다. 이때는 한산도에 시험적인 진을 설치해 활용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3개월 뒤인 6월 21일 한산도 망항포로 진을 옮겼습니다. 7월 10일에는 “한산도 끝에 있는 세포로 진을 옮겼다”고 일기에 나옵니다. 7월 14일엔 한산도 두을포로 진을 옮깁니다. 한산도에 지은 정식 통제영으로 진을 옮긴 것입니다. 이순신은 삼도수군 통제사에서 해임되고 의금부로 이송될 때까지, 약 4년 동안 이곳에서 활동했습니다.
난중일기에는 “한산도 뒷산 마루에서는 다섯섬과 대마도가 보인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세종대왕 때 대마도 정벌의 출발지도 한산도였습니다. 여수와 부산의 한가운데에서 일본의 대마도까지 볼 수 있다니, 정말 요지 중의 요지입니다. 그후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궤멸될 때, 배설 장군이 열두척의 배를 빼돌리면서 한산도에 불을 놓았습니다.
배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 삼도수군 통제사 원균이 말이 통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 둘 다였겠지요. 어쨌든 배설은 열두척의 배를 이끌고 한산도로 가서 그곳의 시설과 물자를 모두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 무렵 칠천량에서는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궤멸당하고 있었습니다. 상관인 원균의 지시를 무시하고 도망친 것은 군법상 명령불복종에 해당됩니다.
명량대첩 기적 만든 열두척
그러나 경상우수사 배설 영감을 무작정 비난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의 수군과 열두척의 배가 고스란히 이순신의 손에 들어갔으니까요. 그 열두척의 배가 없었다면, 제아무리 이순신이라고 해도 명량해전의 기적을 만들어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배설은 이순신에게 열두척의 배와 군사를 인계한 뒤에 결국 탈영하고 말았습니다. 이순신은 이를 괘씸하게 여겼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배설은 경상북도 선산(지금의 구미)에서 체포돼 처형당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이순신이 배설을 못 잡은 게 아니라, 복잡한 상황을 고려해서 판단을 미뤘던 것 같습니다. [본사 제휴 The Scoop=장정호 교육다움 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