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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72주년 제주인기협 기획] ⑤ 미국 책임규명과 4.3 ‘이름 찾기’

 

지난해 6월 20일 미국 유엔 본부. 미국 현지 시간으로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3시간 동안 유엔본부 회의실에서 뜻깊은 심포지엄 행사가 열렸다.

 

‘제주4.3의 진실, 책임 그리고 화해’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심포지엄에는 유엔 외교관을 비롯한 38개 국내‧외 협력단체 관계자 등 150여명이 회의장을 가득 메웠다.

 

주유엔대한민국대표부가 주최한 이날 심포지엄에서 기조 발표에 나선 강우일 주교는 “제주4.3은 미국과 한국 정부 당국이 저지른 인권과 인간 생명에 대한 대대적인 위반이자 범죄였다”면서 “처형과 학살을 한국 경찰과 군인이 저질렀지만, 정책을 수립하고 명령을 이행한 이들은 미군 지도부였다”고 밝혔다.

 

4.3 당시 민간인 학살의 책임이 당시 미 군정에도 있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한 것이었다.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도 ‘제주4.3과 미국의 책임’ 발표에서 “미국인 대다수가 2차대전 종전 후 한국 상황과 무관한 방관자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일제에 부역했던 한국인들을 지원하며 3년간 한국 군부와 군경을 이끌었다”면서 “4.3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1에 해당하는 3만명 가량이 학살당한 데 대해 미국의 실질적 책임은 면할 수 없다”고 문제를 제기한 부분도 눈길을 끈다.

 

미 국무부의 동북아실장을 지냈던 존 메릴 박사도 “한국은 1948년 8월까지 미군정의 통제 아래 있었기 때문에 미국 역시 상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미군은 결과에만 주목하느라 종종 지역 치안부대의 폭행을 못 본 체했고, 진압작전은 악랄하고 무자비하게 전개되었다”고 미 군정이 책임을 피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지난해 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 주도로 6개월 동안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등에서 진행된 현지 자료조사에서도 주목할 만한 자료가 다수 확인됐다.

 

현지 조사팀은 당시 미 군정의 최고 책임자인 하지 중장이 남한 단독선거를 앞두고 1948년 3월 3일 유엔 임시위원단과 덕수궁에서 회의를 가진 자리에서 ‘정치범(political prisoner)’의 정의 문제를 놓고 언쟁을 벌였던 부분에 주목했다.

 

당시 연합군최고사령부의 관련 자료에 따르면 유엔 임시위원단은 남한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는 찬성도 반대도 할 수 있으니 그들을 ‘정치범’으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했고, 이에 대해 하지 중장은 “선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파괴하는 자들을 어떻게 정치범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동기는 정치적일지 모르나 범죄자일 뿐”이라고 반박, 논쟁이 벌어졌다는 내용이다.

 

이 자료 내용을 두고 조사팀은 ‘정치범’과 ‘범죄자’는 대응 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들어 “하지 중장의 이같은 답변은 5.10 선거를 반대한 제주 지역에서 미군의 지휘 아래 한국 군경과 우익단체에 의한 무차별 학살이 저질러지게 된 배경을 설명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4.3 발발 후 한 달 가량 지난 1948년 5월 미군 70명이 제주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미 극동군사령부의 문서 자료 외에도 1948년 7월 2일자 미 국무부 문서를 통해 하지 중장의 정치 고문인 제이콥스(Joseph E. Jacobs)가 당시 제주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브라운 대령의 보고 내용을 토대로 ‘제주도민의 80%가 공산주의자와 관계돼 있거나 공포 때문에 그들과 협조하고 있다’고 국무부에 보고한 내용이 담겨 있는 것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특히 조사팀은 미 극동군사령부 문서를 통해 당시 주한미군사고문단장이었던 로버츠 준장이 1948년 1월 28일 ‘공산주의자들을 싹쓸이하기 위해 제주에 1개 대대를 추가 파병하겠다’고 한 채병덕 당시 참모총장의 서한에 대해 “최고 수준의 사고(top level thinking)”라고 극찬한 부분과 ‘초토화작전’을 의미하는 ‘싹쓸이(cleaning-up)’ 등의 단어가 보고서에 자주 언급된 부분을 주목하기도 했다.

 

 

양정심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은 4.3 70주년을 맞아 지난 2018년 제주4.3희생자유족회 주최로 ‘제주4.3, 미국의 책임을 묻는다!’라는 주제로 열린 심포지엄에서 ‘제주4.3과 미국 – 학살의 책임을 기억하기’ 주제발표를 통해 미 군정이 4.3 당시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양 실장은 "미 군정이 현장에 직접 나서지는 않았지만 모든 작전계획을 세우고 경비대와 경찰을 통해 진압을 시행했다"면서 미 육군통신대가 촬영한 ‘May Day’라는 기록영화에 미군 군용기에서 찍은 제주도 전경과 딘 군정 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김익렬 국방경비대 9연대장의 이륙장면, 미군들의 도열, 딘 군정장관과 맨스필드 제주 군정관의 담소 장면, 딘 군정 장관의 제주도 바다와 마을 시찰 장면 등이 담긴 점을 들어 “일명 ‘오라리 사건’은 경찰이 오라리를 방화하고 마을 사람들을 죽인 사건을 무장대에게 덮어씌운 조작 사건”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4.3 발발 직후 딘 군정장관이 강경 진압을 주장했고 제주의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초토화 작전 뿐이라는 의사를 자신의 정보장교들을 통해 제주 지역 책임자들에게 수시로 전달했으며, 대한민국 정부 출범 이후 벌어진 군경 토벌대의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을 방조했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했다.

 

4.3평화재단은 최근 발간한 ‘제주4.3사건 추가진상조사보고서 Ⅰ’을 마무리하면서 “추가진상조사의 또 하나의 당면 과제는 미국자료 조사”라고 미국의 책임을 규명하는 일이 ‘현재진행형’임을 강조했다.

 

4.3 당시 미국의 역할과 책임 문제를 규명할 수 있는 근거를 찾기 위해 2019년부터 본격적인 미국 현지 방문조사 등을 실시하고 있으며, 수집된 조사 자료를 토대로 자료집을 만들고 국외 자료를 중심으로 추가진상조사보고서 후속 작업을 이어가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또 지난 2008년 4.3위원회에서 발간한 백서 『화해와 상생』에서 미진한 분야로 제기했던 4.3의 역사적 평가와 진압작전에 대한 지휘체계 규명이 다뤄지지 못해 다음 집필 과제로 넘길 수 없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4.3 진상조사보고서에서 후대 사가들의 몫이라고 했던 4.3의 정명(正名), 즉 바른 이름 찾기도 여전히 남아있는 과제라고 추가진상보고서에서도 밝혔듯이, 4.3의 ‘이름 찾기’는 어쩌면 미국의 책임 규명 작업과 이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숙제다. [미디어제주=홍석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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