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이 매섭게 회초리를 든 총선이 끝나고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새 ‘선거 효과’는 사라져가는 모습이다. 총선에서 나타난 민심을 겸허히 수용하겠다고 자세를 낮추더니만, 22대 국회 출범을 앞두고 국회의장과 여야 정당 원내대표로 거론되는 인사들의 면면과 출사표를 보면 걱정이 앞선다.
제1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선 이른바 ‘찐명(진짜 친이재명)’계가, 여당인 국민의힘에선 ‘찐윤(진짜 친윤석열)’계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새로 시작하는 국회의 주요 포스트가 계파색 짙은 강경파 인사로 채워지면 당내 갈등은 물론 여야 관계가 삐걱대며 국정 현안과 개혁 과제들이 표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민주당 몫 국회의장 후보로 거론되는 인사들은 “기계적 중립은 없다”며 선명성 경쟁을 하고 있다. 국회법은 의장의 당적 보유를 금지한다. 대한민국 입법부를 상징하는 대표성, 국가 의전 서열 2위의 위상, 비중이 큰 의원외교 업무 등에 합당한 품격을 갖춘 의장을 기대해서다. 중립성 원칙을 무시하면서 소수 정당을 배려하는 초당적 국회 운영 의지와 정치적 균형추 역할을 팽개쳐선 곤란하다.
게다가 민주당 차기 원내대표 후보로는 강성 친명계 인사로 교통정리가 되는 분위기다. 국민의힘에서도 대표적 찐윤 의원이 원내대표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다. 강성 국회의장에 역시 강성인 여야 원내대표가 조합을 이루면 22대 국회 운영이 순탄치 않을 게다.
총선에서 표출된 민심은 여야 모두 계파 갈등에서 벗어나 민생 현안을 챙기고, 여야 간 협치를 통해 국회가 제대로 일을 해달라는 것이다. 여야는 국회의장ㆍ원내대표 인선부터 총선 민심을 받들어야 마땅하다.
이번 총선에서 지역구 총득표율은 민주당 50.5%, 국민의힘 45.1%다. 5.4%포인트 차이로 민주당은 71석을 더 얻었다. 한 표라도 많으면 승리하는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로 인한 결과다. 다른 후보를 선택한 표는 사표死票가 됐지만, 그들의 의견도 충분히 존중돼야 한다. 민주당은 제1당 다수의 힘을 보다 좋은 정치, 유능한 국회를 만드는 데 써야 할 것이다.
총선 패배에도 꿈쩍 않던 윤석열 대통령이 국정 운영 지지도가 급락하자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회담 제안 이후 일주일이 지나도록 의제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일정을 잡지 못하는 등 진통을 겪었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2년이 돼가는 시점에 처음 만나기로 한 마당에 과연 회담의 성과를 얼마나 내겠는가. 의제에 연연하지 말고 일단 만나고, 향후 만남을 정례화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대통령과 야당 대표 회담은 의제보다 만남 자체가 절실하다. 두 사람이 만나 대화하고 의견을 조정해야 풀릴 수 있는 국정 현안이 한둘이 아니다.
전공의에 이어 일부 의대 교수들이 병원에 나오지 않는 등 의료 파행 사태가 두 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 고물가ㆍ고금리ㆍ고환율 등 3고(高)로 국민과 기업들이 힘들어 하고 있다. 국가의 미래가 걸린 노동ㆍ연금ㆍ교육 개혁은 진전이 없다. 2월 신생아 수가 사상 처음 2만명 밑으로 내려갈 정도로 저출산 대책이 겉도는 가운데 지역소멸 위기가 엄습하고 있다.
나라 밖 상황도 불확실성을 더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분쟁이 장기화하며 에너지 가격과 식량 공급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남북관계의 불안정성이 커지고, 미국-중국간 패권 다툼이 격화하고 있다.
반도체와 인공지능(AI), 자동차, 2차전지, 온라인 플랫폼 등에서 글로벌 경제전쟁이 치열하다.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 물 부족, 대기오염, 감염병, 농수산물 생산 피해와 식량 공급 차질 등의 위기는 이미 지구촌 곳곳의 일상에 침투했다.
여당은 용산 대통령실만 바라보지 않고, 경제난과 민생 대책을 적극 마련하고, 야당과의 대화 및 협치에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새로 구성될 22대 국회는 구태를 벗고 달라져야 한다. 국민은 많이 토론하고 충분한 타협의 과정을 거쳐 의사결정을 하는 성숙한 국회를 보고 싶다.
소선거구제의 한계와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폐해를 바로잡는 선거제도 개편 논의도 시급하다. 선거 때마다 단골 공약으로 내놓은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도 작은 것부터 하나라도 실천하길 기대한다.
국민은 총선을 통해 정치권에 독선과 불통 대신 정치 복원을 주문했다. 윤 대통령이 1년 5개월 만에 기자 질문을 받고 비서실장과 정무수석의 인선을 직접 발표했지만, 대통령실의 변화는 여러 측면에서 더 절실히 요구된다. 정부ㆍ여당을 심판한 국민 마음이 어디 있고, 정부ㆍ여당에 뭘 바라는지 핵심을 제대로 인식하고 솔선 쇄신해야 할 것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양재찬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