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라산 중턱의 마방목지에 가면 드넓은 초원에서 뛰노는 제주마를 볼 수 있다.
많은 관광객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한번쯤 들러 예쁜 추억을 남기는 명소다.
오래전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는 제주마에 대해 과연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제주마를 일컬어 흔히 부르는 '조랑말', '과하마'라는 말은 맞는 말일까.
◇ 말의 산지 '제주' 그 유래는
언제부터 제주에서 말을 키우기 시작했던 것일까.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제주에서 말 사육은 탐라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의 시조인 고을나·양을나·부을나 세 신인(神人)이 땅에서 솟아나 나라를 세웠다는 '탐라건국신화'에 그 일말의 단서가 남아있다.
세 신인은 사냥하며 가죽 옷을 입고 고기를 주식으로 생활하다 벽랑국에서 온 세 공주와 혼인한다.
중요한 건 세 공주가 당시 제주에는 없던 새로운 문물을 함께 들여오는데, 바로 오곡의 씨앗과 망아지·송아지 등 가축이다.
역사를 반영한다는 '신화'(神話)의 속성상 이는 수렵의 시대가 저물고 농경과 목축의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문헌 기록으로는 고려 문종 27년(1073년)에 탐라가 고려 조정에 말을 진상했다는 첫 기록이 있어 서기 1000년경 말이 본격 사육됐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제주도가 말의 산지로 유명하게 된 것은 몽골(원나라)이 고려 원종 14년(1273년) 삼별초(三別抄) 군을 제주에서 완전히 진압한 뒤 군마 생산·공급 기지로 제주(탐라)를 주목하면서부터다.
몽골은 고려 충렬왕 2년(1276년) 제주 성산읍 수산리 지역에 몽골식 목마장을 설치하고 몽골마 160필과 말을 관리할 전문 인력인 목호(牧胡)를 보내 말을 기르게 했다.
제주는 공민왕 23년(1374년)까지 약 100년간 원나라의 직할 목장으로 운영되면서 말을 공급했다.
세계를 호령하던 원나라가 아시아의 동쪽 끝 작은 섬 제주에 굳이 목마장을 설치하면서까지 말을 공급하도록 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따뜻한 기후와 드넓은 초지가 있는 제주의 자연환경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주강현 전 제주대학교 석좌교수는 저서 '제주기행'에서 "몽골제국의 세계 경영 차원에서 본다면 탐라의 훌륭한 초지가 눈에 들어온 것은 당연지사다. 맹수 없는 초원인데다가 격리된 섬이라 가축이 도망치지 못하니 이만한 목장터가 아시아에 또 있겠느냐"고 설명한다.
주 교수는 "원은 고려인의 손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목호를 파견해 자체적으로 종마를 선택했다. 심지어 고려인의 목장 접근을 금했다. 몽골의 목축 기술 노하우는 당대의 '비밀스러운 하이테크놀로지(최첨단 기술)'였기 때문이다. 원의 목호는 풍부한 양마 기술로 순종 몽골종 말을 길러내어 군용 혹은 교통용으로 제공했다"고 말한다.
◇ "제주 목장 말이 날로 키가 짧고 작아지니…"
몽골에서 들여온 말이 그대로 제주마로 이어진 것일까.
세종 3년인 1421년 세종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주(濟州) 목장(牧場)의 말이 날로 키가 짧고 작아지니 그 이유를 따져 본다면, 그 주(州)의 사람과 장사하는 무리가 왕래할 즈음에 문득 몸이 작은 말을 목장에 놓아두므로 이로 인해 번식하는 말이 모두 키가 짧고 작아지니 장사치들이 지나다닐 때 그 곳에 있는 수령들은 엄중히 사찰하게 하여 만약 어기는 자가 있으면 수령까지 아울러 죄를 주도록 하소서….'
이 같은 상소문이 조정에 오르게 된 배경은 이렇다.
100년 가까이 제주에 정착해 말을 키우던 목호들이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반발해 1374년 반란을 일으켰다.
일명 '목호의 난'이다.
고려는 최영 장군을 보내 반란을 진압했고 이 과정에 목호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문제는 원 나라의 목축 기술이 일반 제주 사람들에게 전해졌을 리 만무했다.
그동안 말 전문가인 목호들에 의해 엄격하게 관리되던 몽골의 말이 사실상 방치되다시피 하면서 자연스럽게 당시 제주를 오가던 장사치들의 말들과 섞이게 된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의 토종마는 부여·고구려·동예 때부터 즐겨 타고 다녔던 과하마(果下馬)였다.
과하마는 말 그대로 키가 3척(90.9㎝)으로 몸집이 작아 과일나무 아래를 능히 지나갈 수 있다는 뜻으로 우리나라에 일반적으로 널리 퍼진 말이다.
이 토종말을 토마(土馬) 또는 향마(鄕馬)라고도 했고, 원나라에서 들어온 말을 호마(胡馬)라 불렀는데 이들 말들이 교잡하면서 점차 체구가 왜소한 말들이 나오게 됐다는 것이다.
목호의 난과 고려에서 조선으로 전환하는 격변의 과정을 거듭했다고 하더라도 불과 50년도 안돼 벌어진 사건(?)이었다.
군사적으로나 교역품 등으로 중요한 품목이었던 말의 품질 변화는 큰 문제였다.
게다가 섬 전체에 목마장이 산재해 있어 말들이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등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자 조선은 세종 12년(1430년) 한라산 기슭을 10개의 구역으로 나눠 10소장(所場·목마장)을 설치하고 그 경계에 돌담인 잣성을 쌓아 체계적으로 사육하기 시작했다.
품종 개량에 대한 시도도 있었다.
전성원 제주대학교 동물생명공학전공 석좌교수에 따르면 재래종인 토마와 외래종인 호마를 인위적으로 교잡해 큰 품종으로 개량하기도 했지만 큰 말은 대부분 명나라로 징발돼 크기가 작은 말만 제주에 남게됐다고 한다.
이후 오랜 세월 말들이 제주 섬 안에서 번식, 제주 환경에 적응해가면서 체구는 왜소하지만 체질이 강건하고 지구력이 뛰어나면서도 온순한 유전적 특성을 가진 '제주마' 품종으로 발전했다.
참고로 제주마와 조랑말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렇지 않다.
제주도축산진흥원에 따르면 조랑말은 과거 140㎝ 미만의 작은 말들을 총칭해서 표현하는 말로 서양의 셔틀랜드 포니, 동양의 과하마, 제주마 등을 포괄하는 의미다.
제주마는 현재 별도의 품종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 "제주마 작다고 얕보지 말아요!"
제주마를 작다고 얕봐선 안된다.
제주마의 크기는 숫말은 체고(발굽에서 등까지 높이)가 125∼128㎝, 암말은 118∼125㎝ 정도다.
제주마와 더러브렛의 교잡종인 '한라마'(체고 130∼150㎝), 경주마인 '더러브렛'(160㎝)과 비교해 크기가 작은 편이다.
하지만 성격이 온순해 사람을 물거나 차는 버릇이 없고, 체질이 건강해 병에 대한 저항력과 생존력이 강하다.
지구력이 강해 무거운 짐을 싣고도 다른 경주마보다 더 오래 견디고 더 멀리 간다고 한다.
제주마의 빠르기는 시속 42㎞ 정도다.
지구상의 가장 빠른 포유 동물인 치타(시속 120㎞), 경주마(시속 65㎞)보다 느리지만 3000∼5000m 장거리 대회가 열린다면 제주마가 더 잘 뛸 것이라 전망하기도 한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일제강점기 때 제주마가 군마로 활용되기도 했다.
과거 밭농사와 농산물 운송, 이동 등 주요 수단이었던 제주마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중요성이 점차 줄어들었다.
1960년대 이후 농기계 보급과 운송수단이 발달하는 등 산업화가 진행됐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제주에서 연간 1만∼2만 마리가 체계적으로 사육됐지만, 1980년대 들어서 최저 1347마리까지 줄어드는 등 제주마는 멸종위기로 치달았다.
제주도는 제주마의 멸종을 막기 위해 1985년 '제주마 혈통정립 및 보존에 관한 학술연구 용역'을 실시하고, 연구용역 결과에 따라 순수혈통 제주마 64마리(암말 55, 수말 9)를 선정했다.
도는 이듬해인 1986년 2월 8일 이들 제주마를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현재 제주도 축산진흥원에서 보호하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주마는 총 167마리다.
적정 사육두수(150마리) 초과 마필에 대해서는 문화재 지정 해제 후 공개경매를 통해 도내 사육 희망자에게 분양하고 있다.
천연기념물이 아닌 도내 일반 농가에서 키우는 제주마는 5780마리다.
이경진 제주도축산진흥원 마필연구팀장은 "제주마의 체계적 혈통관리를 위해 아비마와 어미마, 망아지 삼자간 유전자 분석을 통해 친자확인을 거쳐 제주마로 등록하는 등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변지철 기자]
[※ 이 기사는 '제주기행'(주강현, 도서출판 각, 2021), '아름다운 제주'(강정효, 한그루, 2020), '신비 섬 제주 유산'(고진숙, 블랙피쉬, 2023), 마육식품학(전성원, 주식회사 부크크, 2020), '제주도 제주마'(제주도, 제주도인쇄정보산업협동조합, 2002) 등 책자를 인용·참고해 제주마를 소개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