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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의 '길 가는 그대의 물음' ... 제주문화이야기(52) 이웃나라 제주도를 침략한 왜구 ①

글을 열며

 

페르낭 브로델은 말한다. “한반도는 일본 열도, 만주, 시베리아, 중국에 둘러싸인 독특한 전략적 위치의 희생양이 되었다.” 맞는 말이다. 한반도에 속한 제주도는 어떤가? 바다 한가운데 섬 제주도는 과거 고려(원나라), 조선의 유형지가 되었고, 말이 주인이 되는 섬이었다. 

 

제주도는 지정학적으로 일본의 대륙 진출이나 남태평양, 동남아시아에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가 되는 지역이다. 왜구들만이 아니라 동인도 회사의 네덜란드·영국·프랑스인들이 바타이유-나가사키 혹은 인도-홍콩-상하이-오사카 항로 중 물, 식량, 땔감 등을 공급받을 수 있는 중간 거점지역으로 이용되었다. 특히 군사적으로 중국의 일본 침략과 일본의 중국 침략을 위한 전략적인 섬이었기에 조선의 변경은 곧 안보의 최전방이 되었다.

 

한편 역사적으로 한반도 본토 정부는 제주 섬 주민들의 숨통을 한시라도 놓지 않는 바람에 생산력이 매우 낮았다. 과다한 진상으로 인력의 강제 동원되고 말(馬)과 남자들이 필요한 만큼 부족해지자 남자가 비어있는 자리에 여정(女丁)이라는 이름으로 여자들을 성담에 올렸으나 대안이 되지는 못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끝내 200여 년 동안 출륙금지령을 내리고 중앙집권화의 길을 갔다. 성리학의 예의는 과도한 요역(徭役)과 진상이 필요하면서 사람의 경작할 노동력과 노동시간을 빼앗아버려 생산력이 낮아져 섬의 경제적 규모가 빈약하게 작아졌다. 그러므로 제주인들은 자신의 역할 부담을 위해서는 여러 개의 계를 들어야만 충당할 수 있었고 지금도 생활 속에 그 여진이 남아있다.

 

또한 왜구들은 바깥 세력으로써 급작스러운 곤란을 가져다주는 환난이었다. 해안 지역을 수시로 침략하여 살인, 납치, 강간, 약탈을 일삼고는 동쪽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그러나 조선 후기가 되면서 왜구는 사라져도 왜구의 본성은 그대로 남아있어 조선 말기에도 왜구는 사라져도 일본인이라는 이미지 속에는 여전히 왜구의 얼룩이 드리워져 있었다.

 

외세의 일관된 특징이 있다면 분명 어떤 구실과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약소국의 생존도 약자처럼 유리한 위치에 제대로 설 수 없으므로 늘 불안하다. 섬의 안보는 모든 역량을 집중할 때 비로소 지켜지고, 국가는 그 이름을 앞세워 안보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힘의 토대는 규모 있는 경제가 말해준다. 

 

한번 사람이 어딘가에 발자국을 남기면 꼭 누군가도 그 길을 따라간다. 처음의 길이 아니었던 것이 대로(大路)가 되는 것처럼 처음의 침탈이 어려운 것인데 두 번, 세 번이 될수록 지리·지형·정보가 축적돼 더욱 손쉽게 다시 그곳을 지배하려고 한다.

 

제주라는 지형이 왜구의 상륙을 더디게 하는 천연 요새이기는 했으나, 섬사람들이 스스로 편의를 위해 만든 물길을 열어버려 포구나 하천 하구가 다시 그들의 적당한 상륙 지점이 되었다. 대개 왜구가 침략한 마을들은 앞바다가 트이고 선박이 드나들기 좋은 지형을 가진 곳이다. 화북포가 그렇고, 천미포가 그렇고 모슬포가 그러했다. 편리한 대신 매우 쉽게 어려움을 가져다주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하물며 외부적 요인이 어려움을 가져다줄 때는 내부적 요인은 더욱더 큰 위기를 빨리 부른다.

 

21세기 제주를 새로운 문명의 땅으로 이끌지는 못해도 여전히 제주인들은 상상 속에서라도 이어도를 꿈꾼다. 그러나 우리는 구식이 될 수는 없다. 상상은 결코 현실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없는 것에서 있음이 나올 수 없는 것처럼, 현실은 현실적으로만 사고할 때 이루어진다.

 

왜구는 한때 역사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 집단, 국가인 한에서는 언제라도 왜구의 길과 같은 본성을 숨기고서 다른 어떤 이름으로 혹은 어느 장소에 제2, 제3의 왜구의 모습으로 재등장할 수가 있다. 서양 세력을 보면 오늘 우리가 경계해야 할 시대정신이 또 다른 왜구를 분쇄하는 것이다. 동맹도 이익을 위해서는 협박하는 오늘날 국제정치에 또 다른 왜구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기우(杞憂)일까? 

 

 

왜구의 구분에 대하여

 

왜구라는 말은 원·명나라 혹은 고려·조선의 기록에서 살상과 약탈을 저지르는 일본인 혹은 일본인 집단체로 부르는 개념으로 인식되고 있다. 왜구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전기(前期)에 걸쳐서 일본인으로 구성된 무장 집단에 의해 행해진 약탈 및 납치 행위’라고 정의하고 있다.

 

일본 학계에서는 왜구의 구분을 전기 왜구(前期倭寇)와 후기 왜구(後期倭寇)로 나누어 말한다. 전기 왜구란 14~15세기의 왜구를 통칭하며, 후기 왜구는 16세기의 왜구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전기 왜구는 일본인으로 구성된 집단인 데 반해, 후기 왜구는 일본인이 10~20% 정도이고 대부분은 중국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이 일본 왜구 연구자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사실 왜구를 전기 왜구(前期倭寇)와 후기 왜구(後期倭寇)로 처음 구분한 일본인 학자는 1959년 다나카 다케오(田中健夫)로 이 말을 유행시킨 인물이다. 왜구에 대한 이 이분법적 구분은 지금도 왜구 연구자들에게 즐겨 사용하는 역사 개념이 되고 있다.

 

또 다케오는 왜구라는 개념이 성립되고 고려인이 그것에 대한 인식이 고정된 시점을 1350년 경인년 이후의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14~15세기 왜구가 전기 왜구의 출발이라고 설정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무라이 쇼스케(村井章介)는 다나카가 전기 왜구 구분에서 누락시킨 13세기 왜구를 문제 삼아 다시 ‘초발기 왜구’라고 새롭게 규정하면서 3분법을 주장하고 있다.

 

한편 이에 대해 역사학자 김보한은 다나카의 전기·후기 왜구 구분과 누락된 13세기 왜구를 보강한 초발기·전기·후기 왜구라는 무라이의 구분이 시대적인 전개 과정에서 불안정하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의 논지에 대한 대안으로 일본사 시대 구분을 새롭게 적용하여 가마쿠라기·무로마치기·센고쿠기 왜구라는 개념으로 3구분법을 제안하고 있다.

 

이를테면 가마쿠라기 왜구는 1223년부터 1323년까지 왜구를 말한다. 무로마치기 왜구는 시기적으로 고려말과 원말·명초가 겹치는 시기에 출현하기 시작해 지역적으로는 고려의 남해·서해안을 거쳐 산둥반도와 중국 연해로 연결되는 무역로를 따라 동아시아까지 활동했던 15세기 왜구를 말한다. 센고쿠기의 왜구는 16세기에 활동했던 왜구로 설정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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