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4월 30일 자살하기까지 마지막 14일간을 베를린 시내 지하방공호인 퓌러붕커 속에 머물렀던 히틀러는 자신의 비참한 말로를 오로지 ‘남 탓’으로 돌리며 평소의 발작이 극한으로 치닫는다. 히틀러의 모습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건 슬픈 일이다.
![히틀러는 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렸다.[사진|더스쿠프 포토]](http://www.jnuri.net/data/photos/20250417/art_17455417634666_425048.jpg)
히틀러는 끝까지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개전은 전세계를 말아먹는 유대인들의 음모 때문이었으며, 유대인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성전(聖戰)’이 패전으로 몰린 것은 ‘계몽’되지 못한 일부 무지몽매한 독일인과 휘하 장군들의 무능 탓으로 돌린다.
몇차례에 걸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사막의 여우’라 불리며 연합군을 떨게 했던 아프리카 전차부대 사령관 에르빈 롬멜(Erwin Rommel) 장군을 비롯한 ‘유능하지만 계몽되지 않은’ 장군들을 대부분 처형하거나 숙청해 버린 터라 ‘계몽은 됐지만 무능한’ 장군들만 남은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영화 속에서 소련군이 무풍지대를 달리듯 베를린 시내까지 진격한 것도 소련군과 내통한 ‘반국가적인’ 베를린 시민들의 탓으로 돌려 그 바쁜 와중에도 친위대를 동원해 그들부터 처형한다. 휴전협상파인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 장군에게 처형명령을 하달하고, 중립국으로 탈출을 시도한 무장친위대 대장인 헤르만 페겔라인(Hermann Fegeline) 장군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사살한다.
권력 집단이라기보다 거의 조폭 집단에 가까워 보인다. 히틀러는 그들 때문에 모든 일을 망쳤다고 포효한다. 방공호로 숨어들기 직전 1945년 3월 19일 이미 히틀러는 ‘만약 우리가 패전한다면, 그때까지도 살아남아 있는 독일국민들은 쓰레기들일 뿐’이라며 독일의 모든 사회간접시설을 파괴해버리라는 악명 높은 ‘네로 포고령(Nero Decree)’을 발령한다.
남아있는 독일인 모두 죽여버리라는 명령이다. 전쟁 중에 퇴각하면서 적들이 그 지역의 식량과 시설을 획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파괴하고 퇴각하는 소위 ‘청야淸野 작전’과는 그 본질이 다른 포고령이었다. 적군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파괴명령이다. 더구나 그 포고령 명칭을 네로로 정한 히틀러의 정신세계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위대한 자신에게 ‘뒷담화’나 해대는 인간들이 모인 로마가 ‘너절해 보인다’고 모두 불태워버리라는 명령을 내려 100만 로마시민 중 10만명 가까이 태워 죽인 인물이다. 광기에 사로잡힌 네로와 마찬가지로 히틀러는 연합군보다 자신을 암살할 궁리나 하면서 살아남아 있는 독일국민들이 더 혐오스러웠던 모양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파면 이후에도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더스쿠프|뉴시스]](http://www.jnuri.net/data/photos/20250417/art_17455417630374_a72d3d.jpg)
지난해 12월 3일 밤 발령된 ‘계엄 포고령’은 히틀러의 네로 포고령만큼이나 황당하다. 계엄대통령이 나라가 두 동강 나고 망하든 말든 의사들도 ‘처단’하고, 자신을 반대하거나 비협조적인 인사들을 ‘싹 다 잡아들이라’고 했다 하고, 그의 지시를 받은 장군들이 ‘수거 대상’이라고 명명한 명단을 작성했다고 한다.
‘수거’라는 말은 쓰레기에만 쓰는 말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네로와 히틀러만 국민을 쓰레기처럼 수거 대상 취급했던 것도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도 자신이 한강 다리 끊고 도망가는 바람에 피난도 가지 못했던 10만여명의 국민들을 부역자라는 이름으로 수거해서 처단했던 역사가 있다.
모든 독재자는 궁지에 몰리면 예외없이 반성 대신 숙청에 나선다. 모두 자신의 실정失政의 책임을 고스란히 애꿎은 국민에게 떠넘기고 ‘적반하장(賊反荷杖)’의 모범을 보였던 인물들이다. 히틀러와 네로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이승만의 말로도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소요나 반란 때문에 망한 왕조나 정권은 없다. 내부가 먼저 붕괴했기 때문에 소요와 반란이 발생했을 뿐이다.
상대선수가 비틀거리는데 저절로 쓰러지기를 기다리며 지켜볼 만큼 대자대비(大慈大悲)한 권투 선수는 없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려들어 개 패듯 팬다. 그 선수를 ‘악마’라고 비난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국제정치학자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의 지론은 명확하다. 국정책임자의 ‘남 탓’은 최악의 무책임한 리더십이다. 왈저는 ‘은행이 강도를 당하면 그것은 강도를 탓할 일이 아니라 은행을 탓해야 한다’고 판결한다. 역사적으로 침략을 당한 모든 나라들은 침략을 자초했을 뿐이라고 정리한다.
침략의 세계적 ‘맛집’이자 ‘핫플’이었던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겠다. 혹시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고 똥개가 똥을 마다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강도들이 경비가 허술한 은행을 지나칠 리 없고, 한입에 주워 먹을 수 있는 나라를 보고도 강도가 안 될 나라도 없다.
그럼에도 비상계엄령 발동에 자신들의 무능의 책임은 ‘1’도 없고 오직 야당과 좌파, 빨갱이, 중국간첩 등등 때문이었다고 ‘남 탓 정신’을 최후의 순간까지, 파면돼서까지 발휘하는 전 대통령과 전 집권당, 또한 그들의 남 탓 신공에 손뼉을 쳐주는 많은 사람을 보노라면 우리에게 면면히 내려오는 남 탓 정신이 우리나라를 역사적으로 이름난 침략의 ‘핫플’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때 ‘중립적’이라는 말은 자칫 ‘둘이 똑같다’로 변질하기 쉽다. ‘둘 다 똑같다’고 혀를 차면 뭔가 점잖아 보일지 모르겠지만 세상은 그 자리에서 맴돌 뿐이다. 오늘의 상황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대통령도 잘못했지만, 야당도 잘못했다’는 ‘양비(兩非)론’이 적절한 것인지 의문스럽다.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때 ‘중립적’이라는 말은 자칫 ‘둘이 똑같다’로 변질하기 쉽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http://www.jnuri.net/data/photos/20250417/art_17455417627331_9c2335.jpg)
‘비기다’를 영어로 ‘tie’나 ‘draw’를 많이 쓰는 모양인데, 비기다라는 우리말보다 영어가 한결 직관적이다. 분명히 달라야 할 둘을 한통속으로 같이 묶어버리거나(tie), 아니면 ‘같이 죽자’거나 ‘나 대신 네가 죽어라’라고 물귀신처럼 질질 끌고 들어가는(draw) 모습이다. 양비론이 대개 그러하다.
남 탓의 대가 히틀러가 만든 생지옥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족을 모두 잃고 홀로 살아남아 평생을 인권운동에 바친 엘리 위젤(Eliezer Wiesel·1928~2016년)의 1986년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문의 끝부분은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있을 거다. “우리는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줘야만 할 때가 있다. 그때에도 중립을 지키는 것은 가해자에게 도움이 되지 피해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의 침묵은 괴롭히는 사람을 돕고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을 더욱 괴롭게 한다.” 피해자는 대한민국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