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셰린의 ‘절친’ 콜름이 파우릭에게 느닷없이 절교를 선언하고 파우릭이 나타나면 자리를 피하고 멀리하자 파우릭은 무언가 가벼운 오해 때문에 콜름이 삐친 모양이라고 생각한다. 오해가 있었다면 풀어줘야겠다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콜름의 집을 찾아가지만 집은 비어 있다. 파우릭은 콜름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요량으로 빈집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둘러본다. 무료하게 콜름의 빈집을 둘러보던 파우릭의 표정이 차츰 묘해진다. 콜름의 집은 파우릭의 집과 다름없는 시골의 평범한 농가인데, 그 안에 채워진 물건들은 파우릭의 그것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생경한 것들이다. 축음기가 있고, 세계지도도 있고, 이국적인 가면과 꼭두각시 인형도 놓여있다. ‘절친’이라고 생각해왔던 콜름에게 낯섦을 느끼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 물건들은 콜름의 ‘기억’들이다. 파우릭에게는 없는, 파우릭과는 너무나 다른 가치들에 관한 ‘기억’들이다. 서로 공유하는 기억이 없다는 것은 공유하는 가치가 없다는 것과 같다. 관객들은 그 장면에서 파우릭과 콜름은 친구가 될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눈치챈다. 어쩌면 콜름은 그저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파우릭과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떨었을 뿐, 파우릭을 친구나 우
“어서 차라리 어두워 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벽촌의 여름날은 지리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폐결핵 요양차 잠시 벽촌 시골마을에서 지내던 이상의 단편 수필 「권태」의 도입부 문장이다. 아무런 변화도, 할 일도 없는 벽촌에서의 무료함에 이상은 진저리친다. 무료함을 견디지 못한 마을 아이들은 논두렁에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누구 ×이 더 굵은지 ‘×싸기 시합’을 하면서까지 필사적으로 무료함과 싸운다.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의 무대는 아일랜드에 인접한 ‘이니셰린’이라는 가상의 작은 섬이다. 그 분위기는 문득 이상의 수필 「권태」를 떠올리게 한다. 이니셰린이라는 말은 아일랜드어로 ‘아일랜드의 섬’이라고 한다. 아일랜드도 섬이니 섬에 딸린 섬인 셈이다. 가뜩이나 외부와 단절된 섬에서 또 한번 단절된 곳이다. 갈라파고스 섬이 외부와 단절돼 진화가 멈춰버렸듯 이니셰린도 시간이 멈춘 듯하다. 바쁜 현대인은 가끔씩 일부러 바쁜 시간을 시간을 쪼개서라도 ‘멍 때리기’를 하는 모양인데, 24시간 멍 때릴 일밖에 없는 무료한 이니셰린 섬 사람들에게 무료함이란 맞서 싸워야만 하는 끔찍한 괴물이다. 이니셰린의 둘도 없는 친구인 파우릭과 콜름은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권태로운 섬에서
마틴 맥도나(Martin McDonagh) 감독의 2022년 작품 ‘이니셰린의 밴시(The Banshees of Inisherin)’는 제목만큼이나 독특하고 흥미롭다. 그해 베니스 영화제를 석권하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여러 부문에서 최고의 후보에 올랐다. 더스쿠프의 ‘영화로 본 세상’, 이번엔 이 영화를 펼쳐봤다. 영화는 ‘이니셰린’이라는 아일랜드 가상(假想)의 작은 섬에서 벌어지는 파우릭(콜린 파렐)과 콜름(브렌던 글리슨)이라는 두 친구 사이에 절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소 황당하고 엽기적인 사건을 다룬다. 두 인물이 벌이는 짓들은 분명 황당한 코미디에 가까워 보인다. 그런데, 그 사건이 벌어지는 배경에 1922~1923년 터진 아일랜드 내전이란 비극적 역사를 밑그림으로 놓으면 대단히 마음 착잡해지는 비극적 블랙코미디가 보인다. 아일랜드 내전을 깔고 있는 이 영화의 각본을 쓰고 영화로 만든 인물은 짐작대로 아일랜드 출신이다. 맥도나 감독은 런던에서 차별받는 아일랜드 출신 가난한 노동자 부모 밑에서 태어나 ‘무학(無學)’에 가까움에도 탁월한 재능을 꽃피운 입지전적인 작가이자 감독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자부심은 남다르다. 맥도나 감독은 “스토리텔러의 유일한
흑인 남학생에게 플린 신부가 동성 성추행을 했다는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마침내 흑인 남학생의 어머니인 밀러 부인을 학교로 부른다. 영문도 모른 채 학교에 찾아와 교장선생님이기도 한 알로이시우스 수녀로부터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야기를 들은 밀러 부인의 반응은 의외로 시큰둥하고 담담하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도 그녀의 시큰둥한 반응에 당황한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그 끔찍한 의혹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밀러 부인에게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한 문제이며, 부인께서도 저와 함께 반드시 밝혀야 하는 문제’라고 다그친다. 그런 알로이시우스 수녀에게 밀러 부인은 오히려 눈을 똑바로 뜨고 분노한다. 밀러 부인이 분노한 이유도 밝혀진다. 그 학생이 본래 동성애 성향이 있다는 것이며, 이 문제를 남편이 알면 아마도 아이를 ‘때려죽일 것’이라고 으르렁대듯 수녀에게 퍼붓는다. 또한 아이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흑인인 자기 아들이 요행히 얻은 백인학교 입학 기회를 살려 무사히 졸업하는 것이지, 신부와 그런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렇게 천지분간을 못한 채 아들 신세 망치려드는 알로이시우스 수녀를 질책한다.
영화 속에 ‘빌런’이 존재한다면, 영화 ‘다우트’ 속의 빌런은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몫이다. 통상 영화 속 빌런들이 적극적으로 악(惡)을 행한다면,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적극적인 악의 의지를 실행한다기보단 자신도 모르게 인식상의 오류를 저질러 악역이 돼버리는 빌런인 듯하다. 알로이시우스 수녀가 범하는 인식의 오류는 중학생만 돼도 배우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데카르트(Descartes)의 유명한 명제를 지키기 않기 때문이다. 이성적 판단에 따라 주관적 진리에 도달하는 과학적 방법을 정립한 데카르트의 본래 명제는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하고,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dubito ergo cogito, ergo sum)’는 삼단논법이다. 데카르트의 가르침은 ‘의심을 하기 때문에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주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고, 그러므로 비로소 내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코기토(인식ㆍcogito)’는 2가지로 나뉜다. ‘의심(doubt)’은 감각적 직관에 의한 ‘감성적ㆍ감각적 인식’이다. 이는 사물의 외면적인 느낌과도 같은 것이다. 반면 ‘생각(thi
중학교 2학년짜리 흑인학생을 ‘성추행’한 혐의를 두고 알로이시우스 수녀와 플린 신부는 거칠게 충돌한다. 드러난 사실(fact)은 간단하다. 수업 중에 플린 신부의 호출을 받아 사제관에서 플린 신부를 ‘독대’하고 온 학생의 입에서 술 냄새가 나고, 학생이 불안해했다는 것이다. 그럼 사실이 곧 진실일까. 플린 신부는 육식, 포도주, 담배를 즐긴다. 플린 신부가 사제실에서 남학생과 독대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기호(嗜好)에 관한 사실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진실(truth)’이 달라진다. 플린 신부를 학생들을 아끼고, 그저 유쾌하고 호탕한 인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실들은 반대로 플린 신부의 성향을 탐욕적이고 쾌락적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서 해석하면 플린 신부가 ‘아동 성추행’을 했으리라고 추정할 수도 있고 그것이 알로이시우스 수녀에겐 ‘진실’이 된다. 사실과 진실이라는 말은 비슷한 말 같지만, 실은 정반대 의미를 갖고 있다. 사실은 변하지 않고 고정적이지만, 진실은 유동적이다. 사실은 눈에 보이지만 진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영역이다. 진실이란 존재하는 사실을 해석하는 것이다. 해석은 사람마다 주관적이어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극단적인 ‘의심’은 명쾌하게 해결되지 못한 채 영화가 끝난다. 플린 신부는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의심을 이기지 못한 채 결국 사임한다. 교구를 떠난 플린 신부가 다시는 사제를 못하게 됐다면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완승’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플린 신부는 다른 교구로 옮겨 간다. 표면적으로 보면 플린 신부의 ‘의혹’을 증명하지는 못했지만 결국 플린 신부가 교구를 떠났으니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절반의 승리’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알로이시우스 수녀로선 속 터지게도 플린 신부는 다른 교구로 영전(榮轉)해 이동한다.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사실상의 패배’라고 할 수밖에 없다. 플린 신부의 영전 소식을 알게 된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혼란스럽고 참담하다. 그럼에도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플린 신부가 ‘흑인아동 성추행범’이라는 자신의 의심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제임스 수녀를 붙잡고 “나는 그 사람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아직도 그 사람이 의심스러운 것을 어쩔 수 없다”고 비장하게 말한다. 문득 ‘지동설’을 주장하다 종교재판에서 ‘지동설’을 입증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의 주장이 잘못됐다
뉴욕시에서 가톨릭 교단이 운영하는 한 중학교에서 젊은 제임스 수녀가 역사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어느날 수업시간에 학교의 주임 신부인 플린 신부가 흑인 학생 한명을 사제실로 호출한다. 플린 신부를 만나고 교실로 돌아온 중학교 2학년 흑인 학생 입에서는 술 냄새가 나고, 매우 혼란스러운 기색이다. 제임스 수녀는 이 ‘사소한’ 사건을 교장선생님이기도 한 알로이시우스 수녀에게 보고한다. 영화 ‘다우트’에서 벌어지는 의심의 광풍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플린 신부를 만나고 온 그 학생에게서 왜 술 냄새가 났는지, 왜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는지 여러 해석이 가능한 일이다. 플린 신부의 해명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성당 미사를 돕는 일을 맡고 있는 이 학생이 미사에 사용되는 미사주를 몰래 마시는 것을 알고 불러 훈계했다. 이 학생은 가정문제로 우울해서 미사주를 훔쳐 마셨다.” 이 해명이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별것도 아닌 사건이다. 그러나 플린 신부가 눈엣가시와 같았던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플린 신부를 공격하기 위해 이를 극단적으로 확대해석한다. ‘돼먹지 못한 진보적인 신부들이 대개 그렇듯 플린 신부도 본래 동성애자였으며, 플린 신부는 이 학교에 부임하자마자 따돌림당
플린 신부는 새로 부임한 교구의 수녀원장 알로이시우스 수녀가 ‘이유 없이’ 자신에게 무척이나 적대적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수녀원장실로 찾아가 대화를 시도한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에게 ‘아동 성추행’이라는 무시무시한 혐의가 씌워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수녀원장실에서 플린 신부와 알로이시우스 수녀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다. 그 논쟁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점점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논쟁은 격렬한데 논쟁이 왠지 논리적이지 않아서다. ‘아동 성추행’ 혐의를 아무리 부인해도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의심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플린 신부가 뭔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태세를 전환해 공격모드로 나선다. 플린 신부 : “그래 좋다. 나도 가끔 죄를 지을 때가 있다. 그러는 당신은 정말 완전무결하고 한번도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는가?” 알로이시우스 수녀 : “물론 나도 죄를 짓는다. 그때마다 나는 신 앞에 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한다.” 플린 신부 : “바로 그거다. 나도 죄를 지으면 신께 고백하고 회개한다. 그러면 된 게 아닌가?” 알로이시우스 수녀 : “아니다. 용서받을 수 있는 죄도 있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도 있다. 당신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영화는 뉴욕시 브롱크스 교구에 주임 신부로 새로 부임한 플린 신부의 첫 강론으로 시작한다. 모두 새로 부임한 주임 신부의 첫 강론에 귀를 기울인다. 플린 신부는 “하늘의 별자리를 의심하지 말아야 하듯 하나님의 말씀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연하면서도 훌륭한 말을 남긴다. 경청하고 있던 신도들 모두 고개를 끄덕이지만, 유독 한 사람만 다르게 행동한다. 다름 아닌 알로이시우스 수녀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플린 신부의 강론을 듣지 않는다. 그저 예배석을 돌아다니며 자세가 불량하거나 딴짓하는 학생들을 단속하고 쥐어박을 뿐이다. ‘진보적인’ 신부의 강론 따윈 듣고 싶지 않다는 ‘보수적인’ 수녀원장의 소극적인 저항인 듯하다. 거기까지는 심정적으로 이해가 된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플린 신부를 적대하는 알로이시우스 수녀를 지켜보는 관객들은 조금씩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플린 신부의 강론이 끝나고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자신의 심복인 제임스 수녀에게 ‘플린 신부의 강론이 어땠냐’고 묻는다. 편견 없는 젊은 제임스 수녀는 훌륭했다고 답한다. 알로이시우스 수녀가 듣기에도 플린 신부의 강론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진보적’인 신부라 해도 그 ‘진보성’이 하나님의 말
영화의 두 주인공인 알로이시우스 수녀와 플린 신부가 시각적으로 가장 명확하게 대비되는 부분은 웃음이다. 엄(격)ㆍ근(엄)ㆍ진(지)의 화신과도 같은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얼굴에서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파안대소는 고사하고 미소나 하다못해 ‘썩소’조차 비치지 않는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항상 긴장하고 항상 엄숙하며 항상 못마땅한 표정이다. 반면 플린 신부의 얼굴은 언제라도 웃을 준비가 돼 있는 듯한 느낌이다. 엄숙하고 경건한 강론을 하면서도 표정이나 말투가 그다지 엄ㆍ근ㆍ진하지 않다. 학생들에게도 항상 웃고, 동료 신부들과의 식사 시간에는 시시한 농담을 하면서 낄낄거리느라 말을 잇지 못할 정도가 되기도 한다. 문득 철학자이자 기호학자인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가 풀어낸 그의 유일한 소설 「장미의 이름」이 겹친다. 이 소설에서도 수도원에서의 ‘웃음’이 문제가 된다. 수도원장 호르헤 신부 앞에서 수도사가 웃는다는 건 기존의 질서와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마음가짐이다. 그러므로 용서할 수 없는 행위다. ‘웃음’은 인간을 원숭이로 만들어버린다고 치를 떤다. 결국 수도원이 소장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을 금서로 봉인한다.
알로이시우스 수녀원장은 금욕적이다. 얼굴에서 육기와 기름기를 제거해버린 수도승과 같은 모습이다. 기름기와 더불어 웃음기까지 제거해 버렸다. 어쩌면 진정한 수녀다운 모습이다. 교장 선생님으로서도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매사에 철두철미하고 교구 학교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하다. 수녀가 금욕적이고 교장 선생님이 학생들을 엄격하게 훈육한다는 것이 문제 될 건 없다. 더구나 수녀원과 교구는 뉴욕시의 브롱크스(Bronx)에 속해 있다. 브롱크스는 영화의 배경인 1960년대부터 ‘브롱크스에 비하면 할렘은 베벌리힐스’란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로 흑인들이 밀집하고 온갖 범죄가 만연한 지역이다. 그렇게 경제적으로 취약하고 우범지역에 속한 학교이다 보니 알로이시우스 수녀도 학생들에게 더욱 엄격하게 대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특히, 영화 속에 등장하는 학생들은 악명 높은 브롱크스 지역의 8학년생들이다. 우리나라 학제로 치면 ‘무서운 중2들’이다. 그런 알로이시우스 수녀에게 금욕적이지 않아 보이는 데다 학생들을 엄격하게 훈육하지도 않는 플린 신부가 불안하고 못마땅해 보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묘한 장면이 엉뚱한 삽화처럼 끼어든다. 알로이시우스 수녀원장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