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이세민이 섬동도(陝東道) 행태(行台)를 역임할 때 고조 이연은 그에게 관할지 내의 사무를 관장하도록 조서를 내렸다. 이세민은 관할지역 내의 전지(田地)를 전쟁에 공이 있는 회안왕(淮安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당(唐) 태종(太宗 : 599-649) 이세민(李世民),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둘째 아들이다. 수(隋)나라 말기 아버지와 함께 ‘진양(晉陽)’에서 기병해 당
당(唐) 고조(高祖 : 566-635) 이연(李淵)은 당 왕조의 건립자다. 귀족 출신으로 당국공(唐國公)을 세습 받아 수(隋)나라 말기에 기병해 장안을 빼앗고 618년 당나라를 건립했다. 재위 기간에 아들들 사이에 황위를 다투다 현무문(玄武門) 사변 이후 퇴위했다. 황위를 둘째 아들 이세민(李世民)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태상황(太上皇)이 됐다. 둘째 아들 이세민이 바로 중국인들이 현명한 군주 중 한 명으로 추숭하는 당태종(唐太宗)이다. 617년(수隋 대업大業 13년) 고대 병가의 요충지 진양성(晉陽城)에서 수나라에 대항하는 전쟁이 벌어졌다. 이연, 이세민 부자는 병사들을 이끌고 수 왕조를 무너뜨렸는데 이것이 중국 역사상 유명한 ‘진양기병(晉陽起兵)’이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흥기하는 과정 중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역사서에 기록돼 있다. 그런데 ‘진양기병’의 주모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누구는 고조 이연이 주동자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이연의 아들 태종 이세민이라고 하기도 한다. 당나라 초기부터 쟁론이 끊이지 않고 아직까지도 정론이 없다. 『신당서』와 『구당서』는 당나라 역사를 참되게 기록한 역사서
전족(纏足)이란 중국에서 여자의 발을 인위적으로 작게 하기 위해 헝겊으로 묶던 풍습이다. 중국 고대에 대다수의 여자들은 기다란 포로 자신의 발을 단단하게 묶어 발의 형태를 변형시키고 3촌(寸) 이상 자라지 않게 만들었다. 이를 ‘삼촌금련(三寸金蓮)’이라 부른다. 전족의 모양이 연꽃과 비슷하고 또한 중국에서 ‘귀함’을 표현할 때 ‘金’자를 붙이기 좋아하는 습속에 의해 중국 고대 여성의 전 족은 ‘금련’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다. 미인의 상징으로 삼았다. 그러나 남녀 불평등의 악습에 의한 것으로 지금은 철저하게 폐지됐다. 중국 고대 부녀자들의 ‘전족’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의론이 분분해 아직까지 통일돼 있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대우(大禹) 치수 때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대우가 도산(涂山) 씨의 여인을 아내로 맞았는데 도산 씨는 여우 요정으로 발이 작았다. 어떤 사람은 또 은나라 말기 주(紂)왕의 비 달기(妲己)에서 비롯됐다고 하기도 한다. 여우 요정이 변해 아름다운 달기로 변했는데 그만 발만 그대로였다. 그러자 포로 발을
과거(科擧)는 중국 고대의 관리를 심사하고 선발하는 제도의 하나다. 천하의 학생들이 자신의 재능에 의거 응시할 수 있었다. 과거에 합격하면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고 후한 녹봉을 받을 수 있었다. 과거시험에 합격을 하지 못하면 재차 삼차 응시할 수 있었다. 이 제도는 평민들이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평가받는다. 중국 고대에 국가는 사람의 추천에 의해 대부분의 관리를 임용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편협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능력 있는 인재들이 조정에 아는 사람이 없어 관리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후에 인재를 발굴하고 임용하기 위해 현재의 연합고사와 같은 형식의 과거 제도를 만들었다. 과거제도가 만들어지자 정부가 관리를 선발하는 주요 수단이 됐고 뜻이 있는 인재들이 출세하는 기회가 됐다. 1천여 년의 역사 속에서 과거제도는 끊임없이 개선돼 왔고 청(淸)나라 광서(光緖) 황제가 모든 향시(鄕試)를 중지시키면서 과거제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다면 과거제도는 어떻게 창립된 것인가? 일설에 따르면 과거제도의 초기 형태는 수문제 집정(581) 이후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당시 수문제는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를 폐지하고 처음 과거를 치렀으며 수양제
수(隋) 왕조는 두 명의 황제, 38년 만에 멸망한다. 581년 양견(楊堅)이 북주(北周)를 대신해 칭제(稱帝)하고 국호를 수(隋), 대흥(大興, 현 서안)을 수도로 정했다. 9년에 진(陳)을 멸하면서 동쪽과 남쪽은 바다에 접하고, 서쪽은 지금의 위구르 동부까지, 서로는 운남(雲南), 광서(廣西) 북부까지, 북쪽으로는 고비사막에 이르는 지역을 강역으로 삼았다. 양제(煬帝) 10년(611)부터 농민봉기가 계속 일어나 수나라는 멸망했다. 중국 이천여 년의 봉건 역사 중 많은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수(隋)나라도 건국 초기에는 ‘강성한 군대’를 보유했고 ‘만리 강역’을 이루었지만 2대밖에 전하지 못하고 멸망한다. 이러한 상황은 특수한 사례에 속한다. 수나라가 2대에 망한 이유는 당연히 두 명의 황제 때문이다. 멸망을 초래한 수양제 양광(楊廣)이 수 왕조의 멸망의 가장 큰 원흉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의 강산은 부친이 가업을 승계한 것처럼 그저 전승받은 것으로 천하를 놓고 쟁패해본 경험이 없었다. 양광은 황음무도하고 흥청망청했다.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키고 무분별한 전쟁을 도발함으로써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수서R
수(隋) 양제(煬帝 569-618) 양광(楊廣), 수문제의 아들로 12년 동안 재위했다. 즉위 후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켰다. 궁전을 건축했으며 운하를 파고 황제의 전용도로를 건설했다. 모든 공정에 인력과 물자를 너무 많이 소모해 국운이 점차 쇠했다. 도처에서 봉기해 결국 수 왕조는 멸망한다. 그는 강도(江都)에서 금군(禁軍)장군 우문화급(宇文化及)에 의해 목 졸려 죽었다. 일설에는 부친 수문제를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고 하기도 한다. 수나라는 단명한 왕조다. 2세까지 전후 37년밖에 되지 않았고 문제나 양제 모두 비명횡사했다. 그래서 능묘의 규모에 있어 진한(秦漢) 능묘처럼 웅장하지도 않고 한당(漢唐)의 황릉처럼 그리 장관도 아니다. 그리고 수양제의 능묘도 수양제를 안장한 묘지가 아니다. 그가 난세에 죽었기 때문에 몸과 머리가 다른 곳에 묻혔다. 현재의 능묘는 후세에 만든 것으로 황음무도했던 양무제가 어디에 묻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수양제는 대단한 폭군이었다. 그는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는 데에만 눈독을 들였다. 성격이 잔혹하고 주변 나라들에 자신을 과시하는 데에 힘을 쏟아 주변 민족들에게 부귀만을 자랑했다. 수양제의 추악함과 폭정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
수(隋) 문제(文帝 541-604) 양견(楊堅)은 수 왕조를 건립했다. 581년에서 604년 재위했던 홍농(弘農) 화음(華陰, 현 섬서[陝西]) 출신이다. 북주(北周) 시기에 재상을 역임했고 대정(大定) 원년(581)에 정제(靜帝)를 폐하고 황위에 올랐다. 개황(開皇) 7년 후양(後梁)을 멸하고 이듬해 진(陳)을 멸망시켜 남북조 대립 국면을 끝내고 중국을 재통일했다. 재위 시 농경을 제창하고 관제를 고쳐 나라가 흥성했다. 인수(仁壽) 4년(604)에 죽었다. 태자 양광(楊廣)에 의해 피살됐다고 하기도 한다. “아내를 두려워한다”는 말은 현대인들이 농담을 할 때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남자들이 자기 부인을 두려워하고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 봉건통치 시기가 부권 위주의 시기였기에 여인들은 가정에서 이렇다 할 지위를 가지지 못했다. 중국어에 ‘嫁鸡随鸡,嫁狗随狗(가계수계,가구수구)’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닭에게 시집가면 닭을 따르고 개에게 시집가면 개를 따른다는 말이다. 이 말처럼 여자는 출가 후에 싫든 좋든 일생토록 남편을 따라야 했다. 당시 남자는 한 집안의 주
고대 서역의 누란 왕국은 기원전후 비단길에 번성했다. 교역의 중심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국도는 누란성(현 위구르 로프노르 서북 공작하(孔雀河) 북쪽 기슭)이다. “사자(使者)들이 길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다”고 당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낙타 방울소리가 끊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 방울의 물처럼 뜨거운 태양 속으로 증발해 버렸다. 1980년 4월 위구르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연구팀이 ‘새도 날지 않은 황사’ 속의 로프노르에서 탐사하다가 옛 누란 왕국의 철판하(鐵板河) 삼각주 지역에서 3800년 전의 여자 시신을 발굴해냈다. 미라 상태였다. 얼굴은 청수하고 짙은 눈썹에 큰 눈을 가졌으며 코가 높고 움푹 들어간 눈은 살포시 감고 있었다. 뾰족한 턱, 얇은 입술. 피부는 고동색이요 길고 긴 속눈썹, 몸에는 솜털이 나 있었다. 고고학자들이 그녀의 얼굴과 팔다리를 만져보니 탄력이 있었다. 황갈색의 머리카락은 한 올 한 올 땋아 어깨 위에 보풀보풀 드리워져 있었다. 머리에는 전모가 씌워져 있었다. 전모에는 기러기 깃털이 꽂혀 있었다. 상체는 직조된 모포로 감싸 있었고 가슴께 모포는 뾰족하게 깎
누란(樓蘭, Loulan)은 현 중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 타클라마칸 사막의 동쪽 끝, 로프노르(방황하는 호수로 불렸던 내륙호) 주변에 번영했던 고대 왕국이다. 본래는 크로나이나(Kroraina)를 국명으로 했다. 누란은 중국어의 와전이라고 한다. B.C 2세기부터 그 존재가 알려졌다. 흉노와 한족 세력 간에 끼어있으면서도 교통로상의 중요성 때문에 번영을 구가했고 독자적인 문화를 쌓았다. 중앙아시아의 원주민과 티베트계와 이란계의 혼혈민족으로 그 위에 인도계의 지배층이 있었다고 한다. 누란 고성(古城)의 흥망성쇠는 천고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누란 오아시스는 왜 쇠퇴했는가? 누란 고성의 흥망성쇠는 어떻게 된 것인가? 누란 사람들은 어떻게 생활했을까? 이런 문제는 천년을 내려오며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누란은 신강 위구르 자치구 타클라마칸 사막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어 지세가 험하고 모래언덕이 종횡으로 교체한다. 풍식 작용으로 인해 형성된 ‘야르당(Yardang)’이 파도처럼 펼쳐져 있다. 주변에는 식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담황색이요 담회색의 모래바다다. 생명이란 찾아보기 힘든 황량하고 적막한 세계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수없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 467-499)인 탁발원굉(拓拔元宏)은 탁발홍(拓拔弘)의 장자다. 재위기간 중 문치를 행했고 한족의 재원들을 중용하여 정사에 대해 질의했으며 여러 사람의 건의나 의견에 대해 언제나 과감하게 받아들였다. 독서를 즐겼다. 학식과 식견이 풍부해 통치기간 중 국가는 점점 부강해 졌다. 나중에 여러 차례 제(齊)를 공격했는데 군중에서 병사했다. 재위기간은 29년이다. 제왕(帝王)의 사랑을 얘기할 때 사람들은 서한(西漢) 성제(成帝)와 조비연(趙飛연), 당 현종과 양귀비, 송 휘종(徽宗)과 이사사(李師師)에 대해 얘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북위 효문제 탁발원굉과 풍(馮) 씨의 사랑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러나 효문제가 친정 후에 계속 풍태후가 추진하던 개혁을 진행하고 선비(鮮卑) 성씨를 한족의 성씨로 바꿨으며 복식을 한족화하고 낙양으로 천도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북방의 유목민족이었던 선비족들이 중원으로 들어오면서 자신들의 습속을 일신해 새로운 문명을 창출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 효문제가 애정 생활에 있어 곡절을 겪은 것은 빛나는 업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일찍이 효문제는 임(林)
유욱(劉昱)은 유송(劉宋) 후폐제(後廢帝, 463-477년)로 중국 남북조 시대 유송의 제8대 황제(재위 472-477년)다. 자는 덕융(德融)이며 소자(小字)는 혜진(慧震)으로 명제의 맏아들이다. 폐위당하여 시호가 없는 대신 후폐제(後廢帝)로 불린다. 창오왕(蒼梧王)으로 강등당해 창오왕으로도 불린다. 포악한 황제여서 그를 폐위하려고 몇 번이나 반란이 일어났다. 제4대 황제 효무제의 28명의 아들 중에 아버지 명제가 황족 16명을 죽였고 남아 있던 황족 12명은 그가 모조리 죽였다. 15살 때 내시에게 피살당했다. ‘부복관태(剖腹觀胎)’는 칼로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관찰하는 행위를 말한다. 현대인들도 이런 방식으로 임신부를 위해 태아를 검사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중국 고대에 기록돼 있는 잔인무도한 혹형(酷刑)이다. 남송(南宋) 시기의 황제 유욱은 상(商)나라 주(紂)와 같은 폭군의 대명사이다. 그는 포악하기 그지없었고 제멋대로 행동했다. 잔혹 무비했다. 살인을 좋아하고 매일같이 거리로 나와 흉기를 가지고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였다. 살인을 하지 않았던 날은 괴로워했었다고 한다. 한 신하가 간언을 하자 옆에 있는 다른 장수에게 명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