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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01)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무측천(武則天 : 624-705), 이름은 조(曌), 당 고종(高宗)의 황후였고 무주황제(武周皇帝)라 칭했다. 14세에 입궁해 당 태종(太宗)의 재인(才人)이 되고 고종 때에 소의(昭儀)가 됐으며 영휘(永徽) 6년(655)에 황후가 돼 정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고종이 죽자 중종(中宗)을 세워 황제를 대신해 정사를 맡았다. 나중에 중종, 예종(睿종)을 폐위하고 재초(載初) 원년(690)에 스스로 성신황제(聖神皇帝)라 칭했다. 역사에서는 ‘무주(武周)’라 부른다. 수십 년 동안 정사를 맡아 전시(殿試) 제도를 개창했으며 농상(農桑)을 장려했다. 잔혹한 방식으로 통치했고 잘 생긴 남자 노리개인 남총(男寵)을 뒀다. 공과가 분명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705년에 중종이 복위하고 그해 겨울에 병으로 죽었다.

 

중국의 능침(陵寢) 제도가 천여 년 동안 발전하다가 능묘 앞에 비를 세우는 제도가 당나라 때 굳어진다. 그러나 여황제 무측천의 묘 앞에는 글자가 없는 ‘무자비(無字碑)’가 세워져 있다. 무측천은 여장부다. 건괵(巾幗)으로 수미(鬚眉, 남자)를 대신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다. 그런데 왜 후대에 ‘무자비’를 남겼을까?

 

 

 

 

건릉(乾陵)은 섬서(陝西)성 건현(乾縣) 서북쪽의 양산(梁山) 위에 건축됐다. 당 왕조 3대 황제 고종(高宗) 이치(李治)와 후에 당을 주(周)로 바꾼 여황제였던 무측천의 합장묘다. 당대(唐代) 관중(關中) 18릉 중 가장 장관인 지세를 자랑한다. 건릉의 도로는 양산을 따라 점차 내려오는데 양쪽에는 크고 작은 석각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원남성(原南城) 주작문(朱雀門) 밖 넓은 터에 동서 양쪽에 높이 6미터가량의 묘비 두 개가 세워져 있다. 서쪽은 ‘술성비(述聖碑)’로 무측천이 문장을 짓고 당 중종이 쓴 당 고종의 문치, 무공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동쪽은 글자를 세기지 않은 그 유명한 ‘무자비’다.

 

무측천은 중국 역사상 무척 기이한 여성이다. 무측천은 14세에 당 태종의 재인(才人)이 돼 태종을 모셨다. 태종이 죽자 무측천은 관례대로 감업사(感業寺)라는 비구니 암자에 보내졌다. 고종은 태자로 있을 때부터 무측천을 마음에 뒀다. 즉위 후 2년이 되던 해에 무측천을 비구니 암자에서 데리고 와 소의(昭儀)로 봉했다. 나중에 황후로 세울 생각이었다. 이 일은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무측천이 암암리에 결탁한 관리들이 “이것은 폐하의 집안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고 고종에게 탄원했다. 그러자 고종은 원래의 왕(王) 황후를 폐하고 무측천을 황후에 앉혔다. 무측천이 황후가 된 후 과단성이 있으면서 악랄한 방법으로 그녀를 반대했던 대신들을 하나하나 벼슬을 깎거나 유배를 보내 버렸다. 태종의 오른팔이었던 장손무기(長孫無忌)도 죽임을 당했다.

 

고종이 체력이 약해지고 병이 많아지자 660년 무측천은 고종의 위탁을 받아 정사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무측천에게 권력이 생기자 점점 고종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고종은 대권이 남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재상 상관의(上官儀)에게 무측천을 폐위하는 문제를 상의했다. 이 사실이 무측천에게 알려지자 무측천은 즉시 명령을 내려 상관의를 주살해 버렸다. 이때부터 크고 작은 정무는 무측천이 고개만 끄덕이면 됐다.

 

684년 고종이 병사하자 무측천은 잇따라 두 아들을 황제에 앉혔다. 중종 이현(李顯)과 예종(睿宗) 이단(李旦)이다. 그러나 두 아들 모두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중종을 폐하고 예종을 연금시켰다. 자신은 태후 명의로 정사를 봤다. 그러자 대신들과 종친들이 반대에 부딪쳤다.

 

서경업(徐敬業)은 양주(揚州)에서 무측천을 반대하여 기병했다. 무측천은 재상 배염(裵炎)을 찾아가 상의하자 배염은 “태후께서 정권을 황제에게 돌려주시면 서경업의 반란은 자연스레 평정될 것입니다”고 간언했다. 무측천은 배염도 서경업과 같이 자신을 실각시키려고 한다고 생각하고 분김에 배염을 감옥에 가둬 버렸다. 그리고 30만 대군을 보내 서경덕의 반란을 잠재웠다. 연이어 종친 월왕(越王) 이정(李貞)과 낭아(琅玡)왕 이충(李沖)이 무측천을 반대해 기병했으나 무측천에 의해 진압됐다.

 

이런 몇 차례의 크고 작은 변란을 무측천이 진압하자 다시는 무측천을 반대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무측천은 자신의 통치가 공고하게 되자 집정하는 태후의 지위에 만족하지 못하게 됐다. 한 승려가 무측천의 생각을 읽어 불경을 위조해 무측천에게 바쳤다. 그 불경에는 무측천이 원래 아미타불이 환생한 사람으로 부처님께서 그녀를 세상에 내보내 당 왕조를 대신해 천하를 통치하도록 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690년 무측천은 국호를 당에서 주(周)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가 되니 그녀가 중국역사상 유일한 여황제다.

 

 

 

 

무측천은 자신의 정치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혹리(酷吏)를 이용해 당의 종실과 인척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당에 충성하는 여러 대신들을 주살한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다른 부류의 인재들을 등용했다. 중하층 지주 출신의 관리를 과감하게 중용하고 상벌을 엄격하게 적용했다. 직분에 맞지 않으면 즉시 파면하거나 죽였고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능력 있는 인재들은 중용했다. 대권은 자신이 장악하고 자세히 살펴 정확한 판단을 내렸으며 각 분야의 충언을 싫다하지 않고 들었다. 자기의 측근을 엄격하게 통제해 월권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녀가 임용한 재상과 장수들은 당시로써는 최상의 인선이었다. 나중에 당 현종(玄宗) 개원(開元) 연간에 활약한 명신들 중 무측천이 당초(唐初)에 인선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앉아 조정 대신들을 대대적으로 바꾸면서 자신이 통치한 반세기 동안 정관(貞觀) 시기의 획득한 성취를 공고히 했다. 국력이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무측천은 8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에 황위를 중종에게 넘겨줬으며 정권도 이 씨에게로 돌아갔다. 그 과정은 이렇다.

 

신룡 원년(705) 정월 22일, 재상 장간지(張柬之)는 주도면밀하게 모든 것을 준비한 후 궁정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사를 둘로 나누어 황궁으로 쇄도해 먼저 남총(男寵[사전적 의미로 남총이란 ‘예쁘게 생긴 남자가 특별한 사랑을 받는 일’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중국어의 의미 ‘총애를 받는 남자’라는 의미로 썼다]) 장역지(張易之), 장창종(張昌宗) 형제를 죽인 다음 무측천을 압박해 황위를 이현(李顯)에게 양위하게 했다. 번득이는 칼날 아래서 무측천은 하는 수 없이 황제 자리를 아들 이현에게 물려주었다. 4일째 되던 날 이현이 황제 자리에 오르니 이가 바로 중종이다. 국호는 다시 당으로 바뀌었다. 이 사건은 역사에서는 ‘5왕의 변’이라 부른다.

 

무측천은 당 고종이 죽자 그를 위해 비를 세웠다. 그런데 그녀는 왜 자신이 죽으면 묻힐 능 앞에 비는 세웠으면서 전(傳)을 쓰지 않았을까? 천년 동안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하여 황릉 건축사에 일대 현안이 됐다. 명대(明代) 황릉 중 효릉(孝陵)과 장릉(長陵) 이외에 다른 황제들은 비를 세우지 않았다. 기록할만한 공이 없거나 황음무도하고 무능하면 무자비를 모방하여 하기도 했다.

 

왜 여황제는 자신을 위해 남다른 무자비를 세웠을까? 무측천이 ‘무자비’를 세운 것은 자신의 무량한 공덕을 과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자신의 공이 하늘과 같이 무량한데 어떻게 문자로 표현할 수 있냐는 것이다. 『논어』의 “백성들은 덕이 있다고 칭송하지 않았다(民無德而稱焉)”라는 뜻을 취하여 ‘무자비’를 세웠다고 본다.

 

사실 무측천은 정치적인 면에서는 공이 많다. 무측천이 655년 황후가 되고 나서 최고 50년간 정치에 참여하거나 장악했다. 당 고종이 사후부터 계산하면 혼자 21년을 집정했다. 690년 주나라로 개칭하고서 죽을 때까지 15년간 정치를 주물렀다. 경제적으로 농상(農桑)을 장려하고 수리사업을 했으며 농지제도를 정돈하고 부역을 감해주면서 생산력이 높아졌다. 사람을 씀에 간언을 잘 들었고 적재적소에 인재를 등용했으며 파격적으로 능력 있는 사람들 중용했다. 군사상에 있어서는 변방의 방어를 강화하고 주변국과의 긴장 관계를 완화시켰으며 각 민족 간의 왕래를 중시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비범한 정치적 재능을 발휘해 전 세대의 ‘정관지치(貞觀之治)’를 발전시켰으며 이후의 ‘개원성세(開元盛世)’의 기초를 닦았다. 그 치세의 공적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평가 받는다.

 

무측천이 ‘무자비’를 세운 것은 자기 스스로 지은 죄업이 너무 많아 비문을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여겨 그렇게 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녀가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패거리를 결성했다. 가혹한 관리를 활용한 것이나 위법적으로 형벌을 남용했고 자신과 다른 패당을 죽여 없앴으며 자식들을 참살한 것 등 못할 짓을 너무 많이 한 것도 사실이다. 경제적인 면에서 당나라 초기처럼 때로는 U자형으로 오르락내리락했고 군사적으로 서쪽 변경지역을 빼앗았다가 상실했고.

 

어떤 사람들은 봉건 정통론 관점에서 무측천을 비판하기도 한다. 이 씨의 당을 무 씨의 주(周)로 바꾸어 버렸으니 조상을 뵐 낮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전통적 관념으로 보면 천륜과 인륜을 저버린 것이니 비문을 남길 수 없어 무자비로 남겨 뒀다는 얘기다.

 

 

 

 

다른 관점도 있다. 무측천은 자신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무자비’를 세워 후세 사람들에게 그의 공과를 평가받도록 했다고 보기도 한다. 즉 자신의 공과나 시시비비를 후세 사람들이 평가할 수 있도록 유언을 남겨 무자비를 세우게 했다고 보는 것이다. 또 다른 쪽에서는 무측천은 근본적으로 무자비를 세우라는 유언을 남긴 적이 없다고 한다. 중종 이현이 보기에 자신의 어머니의 공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드높아 무자비를 세웠다고 한다. 효심이 지극해 모친의 권위를 대대손손 전하기 위해 세웠다는 말이다.

 

또 다른 관점도 있다. 무측천이 비록 고종과 합장했지만 사실상 그녀는 군림천하 했었고 주나라를 세웠는데 비석에 글자를 세기면 황제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황후라고 해야 할지 결정할 수 없어서 무자비를 세웠다고 본다. 여황제이기는 하지만 부권사회에서 고종과 합장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호칭을 붙여야 하는지 선택할 수 없는 상태라면, 재삼재사 고려해도 묘답을 찾을 수 없을 때라면 ‘무자(無字)’가 좋을 수도 있기는 하다. 심지어 무측천은 여자로 특히 부녀자를 경시하던 전통사회였고 왕조에 저지른 죄과가 있기 때문에 비를 세워 후대에 전할 가치가 없어 비를 세우지도 않았는데 후세의 호사가가 ‘무자비’를 세웠다고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다.

 

무측천의 능 앞에 세워져 있는 ‘무자비’는 글자를 새기지 이유를 지금까지도 알 수 없다. 의견이 분분한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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