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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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태(永泰)공주(?-701) 이선혜(李仙蕙)는 당나라 중종(中宗)의 딸로 위후(韋后)의 소생이다. 당나라 중종의 제7황녀로 부마도위(駙馬都尉) 무연기(武延基)에게 출가했으나 조모 측천무후에 의하여 대족 원년(701) 17세 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무후가 사망한 신룡 2년(706), 영태공주라는 시호를 받아 건릉에 배장 됐다.
여황(女皇) 무측천(武則天)은 선천적인 정치적 동물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친족을 포함해 어떤 사람이든 자기의 권위에 도전하면 주살해 버렸다. 자신을 거역하기만 해도 죽음으로 되돌려 줬다. 『자치통감』의 기록에 의하면 고종(高宗)과 무측천의 손녀 영태공주와 그의 남편 무연기(武延基, 무측천의 종손), 그녀의 오빠 의덕(懿德)태자 이중윤(李重潤) 등이 무측천의 남총(男寵[사전적 의미로 남총이란 ‘예쁘게 생긴 남자가 특별한 사랑을 받는 일’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중국어의 의미 ‘총애를 받는 남자’라는 의미로 썼다) 장역지(張易之), 장창종(張昌宗) 형제의 못된 짓에 불만을 품고 암암리에 의론하다 무측천의 분노를 샀다. 결과는 죽음이었다. 자살하라고 명을 받았으니.
그러나 1960년에 출토된 「영태공주 묘지명」 이후 영태공주의 사인과 역사서에 기록된 사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 알려졌다. 묘지명에 “교룡이 웅(雄, 남편)을 죽임에 놀란 후 난(鸞)새는 수심으로 외로운 그림자 드리우다 괴화(槐火) 아직 옮기지도 않았는데 백주(柏舟)만이 공허하다”고 돼 있다. ‘괴화’는 옛날 중국에서 계절이 바뀔 때 목재를 태워 역병을 방지하였는데 겨울에는 홰나무를 태웠다. 괴화를 옮기지 않았다는 말은 계절이 바뀌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백주’는 『시경』의 시편으로 수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남편 무연기가 피살되고 나서 영태공주는 그를 위해 수절해 홀로 살았다는 의미가 된다.
묘지명에 의미 있는 구절이 또 있다. “옥구슬이 잉태했으나 헐리어 10리에 향기가 없음을 원망하나니. 아름다운 꽃 봄에 지니 두 남자의 밀약(密藥)을 원망하나니. 옥피리 소리 구름 속으로 날아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니. 오호 애재라! 대족 원년 9월 4일에 죽으니 춘추 열입곱이라.” 이를 보면 영태공주가 임신했다는 말이 되고 ‘밀약’ 즉 비밀스런 약을 두 남자가 줬다는 말이 된다. 풀어보자.
무측천의 남총에 대해 불만을 품고 사사로이 의견을 나누다 발각된다. 그리고 죽임을 당한다. 그런데 당시 무측천은 나이가 많아 정사는 중종이 맡았다. 무측천은 자신이 직접 피를 보지 않으려 했다. 아들 중종에게 명한다. 중종을 어쩔 수 없이 무덕기와 의덕태자를 죽인다. 그렇다면 영태공주는? 결혼한 지 1년여였던 영태공주는 회임 중이었다. 당율(唐律)에 회임한 여자는 죄를 주지 않는다고 돼 있다. 즉 회임한 여인은 해산하고 나서 치죄했다. 그리고 영태공주는 중종 자신의 딸이 아니던가? 죽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무측천이 누구인가? 죽음을 묻지 않더라도 치죄는 해야 한다. 그래서 곤장으로 대신했다. 물론 곤장 때문에 유산했고.
두 남자, 바로 무측천의 남총인 장 씨 형제를 가리킨다. 두 남자는 영태공주를 위로하기 위해 약을 들고 찾아 간다. 유산 후 몸을 보해야 하기 때문에 특별히 제조한 것이라 안심시킨 후 마시게 하는데. 그것이 독약이었다. 그렇게 영태공주는 죽었다. 이 추론이 맞는가?
묘지명을 쓴 인물은 태상소경(太常少卿) 겸 수국사신(修國史臣) 서언백(徐彦伯)이다. 서언백은 당시 유명한 문장가였다. 그래서 영태공주의 묘지명이 명문이라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묘지명이지 않던가? 문장이 아름답기만 하면 뭐할 것인가, 당연히 고인에 대한 사실을 적어 놔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무측천이 살아 있다. 그렇다면 사실을 노골적으로 적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내용은 정확하나 우의(寓意)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거짓을 쓰면 사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래서 “물 한 방울도 새지 않도록” 조금도 빈틈이 없이 은유적이나마 사실을 기록한다. 그것이 영태공주의 묘지명이다.
무측천이 직접 자신의 손으로 손녀와 손녀사위, 손자를 죽이지는 않은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타인의 손을 빌어 죽인 것은 자신이 직접 하는 것보다도 더 파렴치한 것이 아니던가? 영태공주를 죽음으로 몰아간 요인은 무측천이다. 왜 그런가?
역사서 기록을 보면 무측천이 이중윤, 영태공주, 무연기를 ‘9월 임신(壬申)’에 죽였다고 돼 있다. 바로 9월 3일이다. 이 날은 묘지명에 기록된 영태공주가 죽은 날 ‘9월 4일’보다 하루 앞이다. 따라서 영태공주의 죽음은 이중윤, 무연기와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다. 그리고 당대는 부권사회다. 연좌제가 엄연히 존재했다. 9족을 멸하던 야만의 사회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남편인 무연기를 죽였는데 아내를 살려뒀을까. 살려둔다 해도 남편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유산까지 했으니, 독살이 아니라 강변한다 해도 17세의 여인의 미래는 불 보듯 뻔하지 않던가.
그리고 무측천은 자기가 낳은 딸을 눈 하나 깜짝도 하지 않고 죽이지 않았던가. 그런 그녀라면 손녀쯤이야. 무측천이 자기가 낳은 딸을 죽인 이야기를 살펴보자.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은 딸이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어머니 무측천이 손으로 목 졸라 죽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불을 덮어 두었다. 마치 아기가 잠을 자고 있다는 듯이. 고종이 딸을 보러 오자 무측천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고종을 맞이했다. 고종이 이불을 걷고 보니 자기 딸이 죽어있는 게 아닌가. 급히 무측천을 돌아보며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무측천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 놀란 얼굴을 했다가 이어 대성통곡을 했다. 고종은 무측천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울기만 하자 궁녀들을 불러 누가 왔었냐고 물었다. 그 말은 누가 와서 아기 공주를 죽였냐고 묻는 것과 다름없었다. 궁녀들은 방금 왕(王) 황후가 왔다갔다고 대답했다. 고종은 아기 공주를 죽인 것이 무측천이 꾸민 계략임을 모른 채 “황후가 내 딸을 죽였구나”라고 단정하고 왕 황후를 폐위시킨 후 무측천을 황후에 앉혔다. 그렇게 무측천은 자신이 황후가 되려는 야망을 성공시켰다. 무측천과 같이 독재적인 사람은 마음속에 권력이외에는 아무 것도 두지 않는다. 궁중의 잔혹한 투쟁을 경험했던 무측천은 혈육의 정은 어찌 되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런데 잔혹한 무측천을 그저 독한 여자였기에 그랬다고만 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보다도 독한 남자들도 많다. 이런 유형의 남녀가 중국사에는 왜 그리도 많을까? 동양인의 DNA가 원래 그래서 그런가? 아니면 무엇 때문일까? 바로 ‘전제(專制)’의 역사 때문이다. ‘제국(帝國)’이기 때문이다. 전제와 제국이 만나 ‘전제주의’의 ‘제국’ 시대가 부른 피비린내로 중국의 역사를 썼기 때문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