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상(李衡祥 : 1653~1733) “타인을 해하는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타인에게 행하지 말며, 사사로이 이익을 탐하는 욕심이 마음에서 싹트게 하지 말며, 게으름이 몸에 배지 않도록 하라(惡言不出於口 悖行不加於人 利欲不萌於心 怠慢不設於身)” 1703년에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제주의 비루한 풍속을 일체 개혁하여 유교적 풍속[儒俗]으로 바꾸게 했던 이형상이 생전 일상에서 경계로 삼던 잠언(箴言)의 한 구절이다. 그는 25세 되던 1677년(숙종 3)에 사마시, 1680년에 문과시에 급제한 후 내직에서 4년, 외직에서 8년, 모두 12년간 관직에 있었던 이외에는 81세로 일기를 마칠 때까지 학문에만 전념하여 60여종 200여 책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의 유고 병와집이 1774년(영조 50) 손자에 의해 간행되었는데, 그중 제주도 관계저술인 남환박물지(南宦博物誌)와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가 유명하다. 남환박물지는 1년 3개월간의 목사직을 이임하고 영천(永川)의 호연정(浩然亭)에서 완성한 지지(地誌)로, 1만3850자에 제주도 및 그 주변 도서의 자연 역사 인물 산물 풍속 방어 등에 대한 기록을 담아내고
제주목사 이익태와 지영록 제주목사 이익태(李益泰:1633~1704)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대유(大裕)다. 1668년(현종 9)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제주목사로는 1694년(숙종 20) 이기하(李基夏)의 후임으로 부임하여 1696년(숙종 22) 9월에 물러났다. 1. 지영록의 ‘표류기’ ‘당시 목사는 이원진, 판관은 노정, 대정현감은 권극중이었다. 계사(1653년;효종4) 7월 24일 서양국만인(西洋國蠻人) 헨드리크 얀센 등 64명이 함께 탄 한 배가 대정현 지방 차귀진 밑의 대야수(大也水) 연변에서 부서졌다. 익사자 26명, 병사자 2명, 생존자 36명이었다.’ 목사 이익태가 지은 지영록 ‘서양국표류기’의 첫머리에 기록된 내용이다. ‘켈파르트’로 제주를, ‘꼬레’로 조선을 서양에 처음 알린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 14년간 이역의 하늘 아래서 겪은 경험과 애환, 조선의 지리 풍속 정치 군사 교육 등 제반사정을 『하멜표류기』를 통해 서방세계에 최초로 알렸던 그의 막연하던 표착지(漂着地)가 이렇게 지영록의 ‘서양국표류기(西洋國漂
광해군(光海君, 1575~1641) 조선왕조 500여년 간 제주에 유배된 이들은 2백여 명에 이른다. “조선조 제15대 군주”, “제주에 유배된 임금”. 이중 광해군은 지존의 왕좌에 있던 인물로, 유배인 명단에서 단연 처음으로 꼽힌다. 광해군은 인조반정에 의해 “혼란무도(昏亂無道)” “실정백출(失政百出)”이란 죄목으로 인목대비의 명령에 따라 폐위되었다. 처음에는 강화도의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로 이배되었다.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에 있는 광해군 묘역 1637년(인조 15) 6월 16일 폐주(廢主)를 제주에 안치하기 위하여 호송 경호 책임 별장 이원로(李元老)등이 광해를 압송하여 어등포(지금의 구좌읍 행원리 포구)에서 1박, 다음날 제주성 안으로 들어와 망경루 서쪽에 안치소를 마련하였다. 이때 이원로가 이곳이 제주라고 알리자, “어째서 이곳에……!”라 하며 매우 놀랐다고 전한다. 또한, 마중 나온 목사가 “임금이 덕을 닦지 않으면 주중적국(舟中敵國:한 배 안에 적의 편이 있다는 뜻으로, 군주가 덕을
목사 임진(林晋:1526~1587)과 판관 조인후(趙仁後) ‘무인으로 명망이 있어 영남․호서남․서북변의 5도절도사를 역임하였으며, 장수 노릇 수십 년간 재리(財利)를 전혀 챙기지 않아 집에 좋은 방석 하나 없었고, 영변부와 탐라부에는 정청비(政淸碑)가 서 있다(諱晉 以威名 爲嶺南湖西南西北邊五道節度使 爲將數十年 不私貨利 家無厚茵 寧邊耽羅府 皆有政淸碑).’ 목사 임진(林晋:1526~1587)의 묘비명에 새겨져 있는 글이다. 무인이지만 청렴으로 선정을 베풀었던 관직생활을 알 수 있다. 판관 조인후 또한 김상헌의 『남사록』 관풍안 명환조에 ‘폐습을 없애고 학문을 일으켰으며 청렴, 간명하였고 자신을 단속 잘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과 조인후 이 둘은 서로 의기투합하여 도민을 잘 보살폈음을 다음 두 가지 일을 통해 알 수 있다. 1.. 귤림서당의 전신인 충암사 건립 임진은 1577년(선조 10) 8월에 제주목사로 도임하여 2년 후인 1579(선조 12) 10월에 떠났다. 그가 재임 하는 동안 기억할 만 일로는, 제주판관 조인후(趙仁後-재임기간:1577.5~1578.3)가 임진 목사와 의논하여 귤림
1435년(세종 17) 목사 최해산 때에 제주목관아의 소실은 조선건국 이래 제주에 관한 공문서뿐만 아니라 관아에 보관하고 있었을 고려시대 탐라 관련 기록을 모두 소진하고 말았다. 이전의 기록이 모두 화마에 잿더미로 변해버렸으니 천년 왕국 탐라의 실체는 유명무실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에 이원진은 제주를 떠나던 해에 『동국여지승람』과 충암 김정의 「제주풍토록」을 전거로 삼아 제주의 연혁뿐만 아니라 풍속과 산물(産物) 등을 총망라한 『탐라지』를 찬술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이원진의 『탐라지』 제주목, 건치연혁조의 다음 기사에서 그의 탐라지 편찬 동기를 살필 수 있다. ‘…위 아래 천여 년 사이에 반드시 주승(州乘)이 있어서 당시의 일을 기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1435년(세종 17) 안무사 최해산 때에 관부(官府)의 실화(失火)로 문적(文籍)이 모두 불타버렸으니, 애석한 일이다.’ 한편, 이원진은 직접 찬술한 『탐라지』를 제주유생 고홍진(高弘進;1602~1682)에게 교정하여 간행하도록 하였다. 고홍진은 현 제주시 이호동 출신으로 훗날 명도암 선생으로 유명한 김진용 등과 함께 1618년 제주에 유배를 온 간옹 이익의 문하에서
목사 이괴(李襘 : 1607~1666) 1954년 담수계(淡水契)에서 발간된 『증보탐라지』에는 이괴에 대해, ‘1658년(효종 9) 4월에 도임하고 그 후 2년이 지나서 경자년(현종 1년;1660) 5월에 교체되자 떠났다. 산마감목관(山馬監牧官)을 계설(啓設)하였다. 남성(南城) 안에 장수당(藏修堂)을 건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산마감목관 계설 헌마공신(獻馬功臣)으로 유명한 김만일의 3남인 김대길(金大吉:1608~1668)은 아버지에 이어 1658년 말 208두를 헌납하여 산장(山場)에 방목하게 된다. 이는 목사 이괴가 조정에 계청(啓請)하여 산마감목관제도를 설치하게 한 데서 기인한다. 김대길에게는 이러한 공로로 이괴의 장계에 의해 감목관 벼슬이 내려지고 특명으로 감목관직을 대대로 그 자손에게 세습하게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김석익은 『탐라기년』에서 ‘효종 9년(1658)에 김만일의 아들 김대길과 큰 손자 김려가 또 산장(山場:현재의 녹산장)에서 방목하던 2백여 마리를 바쳤다. 이때에 조정에서 김대길을 산마감목관으로 삼고 6품의 관등을 내리고, 특별히 명령하여 그 자손으로 그 직분을 세습하게 하니 이로부터 음
목사 이약동(李約東;1416~1493) 제주시 아라동 산천단. 그 해묵은 곰솔나무 그늘 아래에는 자연석 한 면을 다듬어 ‘漢拏山神古墠碑(한라산고선비)’라는 글씨가 새겨진 옛 비가 있다. 조선 성종 때의 제주목사 이약동(李約東;1416~1493)이 백록담에서 지내던 한라산신제의 폐해를 알고 이곳으로 옮긴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다. 이약동이 제주목사로 도임한 것은 1470년(성종 1) 10월이었는데 심재(心齋) 김석익(金錫翼)의 『탐라기년(耽羅紀年)』을 보면, 이 무렵 제주도에서는 매년 겨울 백록담에서 한라산신제를 지냈는데 동상에 걸려 죽고 다치는 사람이 많이 발생하였다. 이약동은 많은 사람이 눈 쌓인 한라산에 오르며 추위와 싸워야 하고 또 기상이 악화될 때에는 희생자까지 내게 한다는 것은 사실을 알고 신단을 산천단으로 옮겨 이곳에서 제사를 봉행하도록 했다. 이때부터 이곳을 산천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비는 산천단의 설단 내력을 기록한 지문비(誌文碑) 1기(基)와 함께 1978년 고(故) 홍순만 제주문화원장이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한편, 지문비는 모두 2기로 달필의 초서로 새겨져 있는데 마모가 심하고 연대와
목사 기건(奇虔:?~1460) 조선시대 제주에 부임했던 제주목사는 1392년 조선 개국에서 1910년 합일합방 이전까지 286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중 전설, 사적 등 제주에 행적이 남겨진 이들을 쫓아 기록한다. 세종 때 제주목사로, 기건(奇虔:?~1460)은 조선시대 제주를 거쳐 간 280여 목사 중 청렴으로 그 이름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성품은 고집스러웠지만 청렴하고 근신하였다. 일찍이 안무사가 되었을 때, 제주에서 나는 전복을 바다에서 캐는 것을 백성들이 심히 고통스럽게 여겼다. 건(虔)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 것이 이와 같은데, 내가 차마 이것을 먹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결국 먹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청렴함에 감복하였다.’ 이원진(李元鎭)의 『탐라지』에 있는 기건에 관한 기술이다. 또한 기건 재임당시 제주에는 사람이 죽으면 관에 넣어 땅에 묻지 않고 골짝의 구덩이에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에 기건이 관을 만들고 염(殮)을 하여 장사 치르는 법을 가르쳤다 한다. 이와 관련한 전설로, 하루는 꿈에 3백여 사람들이 목사 앞에 나타나 고맙다고 절을 하며 말하기를 &ld
심재(心齋) 김석익(金錫翼: 1885~1956) 향토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식으로 알고 있는 심재. 심재는 지금의 제주시 이도동 동광양(東光陽)에서 1885년(고종22)에 태어나 1956년 세상을 떠났다. 관향(貫鄕)은 광산, 자(字)는 윤경(允敬)·홍점(鴻漸), 심재(心齋)․일소도인(一笑道人)․해상일사(海上佚史) 등은 그의 호이다. 심재는 8세가 되던 해부터 그의 할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다. 1900년 16세가 되던 해에는 본도에 귀양 온 아석(我石) 이용호(李容鎬:1841~?)에게 나아가 가르침을 받았고, 20세 때 부해(浮海) 안병택(安秉宅:1861~1936)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경서(經書)·역사서(歷史書)·제자류(諸子類)·시문집(詩文集) 등의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두루 통하였다. 당시 전라도 광주에 기거하던 부해 안병택은 조천읍 조천리 출신으로, 조선조 6대 성리학자 중 한 분인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에서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으로 이어지는 도학(道學)의 학통을 이어받은, 당대에 명망 높은 선비였다. 이러한 큰 스승 밑에서 심재는 제주의 향토사를 처음으
소백(小栢) 안달삼(安達三 : 1837~1886) 자는 행오(行五), 호는 소백(小栢),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조천읍 조천리에서 태어나 영주10경을 처음 품제한 매계(梅溪) 이한우(李漢雨)에게 한문을 배운 전남 장성에 살고 있던 호남의 명유(名儒) 노사 기정진(奇正鎭:1798년~1879년)의 문하에서 배웠다. 그런데, 스승으로부터 “경학(經學)에 밝고 경술(經術)을 숭상한 탐라의 선비”라고 극찬 받았다. 그리고 당대 ‘도덕과 학문을 겸비한 선비’로 명성이 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안처사라 일컬었다고 한다. 1883년 10월 승보초시(陞補初試)에 합격하였다. 해은(海隱) 김희정(金羲正)과도 교류가 깊었으며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이 제주로 유배왔을 때 적려(謫廬)를 출입하며 교분을 쌓았고, 면암 선생의 학풍을 제주에 알렸다. 아들인 병택(秉宅)을 전남 장성으로 이사시켜 노사의 문하에서 배우게 하였으며, 병택은 노사의 적전(嫡傳)이 되었다. 그의 학문이 아들 에게 이어져 제주의 한학수준을 높여주는데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 것이다. 한편, 그의 호 소백은 노사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고향인 제주로 돌아올 때 스승이 잣나
해은 김희정(金羲正.1844~1925) 김희정은 조천읍 조천리 출신으로, 자는 우경(佑卿), 호는 해은(海隱) 또는 포규(蒲葵)로 당대 도학(道學)으로는 같은 마을의 소백(小栢) 안달삼(安達三.1837~1886)을, 시학으로는 김희정을 꼽았다 할 정도로 시로 이름을 날렸다. 영주십경을 처음 품제한 매계 이한진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고종 때 제주에 귀양왔던 면암 최익현의 문하이다. 평생 조천에 은거하며 훈학에 종사하였는데 도내 각처에서 찾아와 배운 문하생이 많았다 한다. 1869년(고종6년)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1871년(고종 8년) 이후 제주 오현(五賢)에 대한 제사를 지낼 곳이 없어지자 1892년(고종 29) 해은의 발의로 오현단을 쌓고 석실서원(石室書院;橘林書院)을 개설하였다. 현 오현단 경내의 조두석(俎豆石)은 해은이 사림의 자문을 얻어 세워 1년에 한 번 오현에 분향 천신(薦新)하도록 한 것이다. ▲ 오현단 내에 세워진 조두석 최근 그의 시문집이 발굴되어 필자에 의해 번역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중 제주발전연구원, 『제주발전포럼 제41호』(2012. 4)에 게재되었던 해은의 ‘한라산기’를 소개한다(원문 생략). 한라산기 나의
이기온(李基瑥 : 1834~1886) "무릇 사람이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천지를 공경하고 신명(神明)을 숭례하며 충군애국하는 것이 떳떳한 길이다. 이것이 우리 선조들의 유명(遺命)이거늘. 슬프다, 우리 태조께서 조선을 건국하신 지 300년이 흘러오는 중엽에는 왜국과 청국의 침입으로 고난을 받아왔다. 이제 고종 광무에 이르러서는 수고당(守古黨)과 개화당(開化黨)의 분쟁과 간신 모리배의 집권으로 말미암아 국력이 쇠진했다. 왜구는 그 시기를 타서 광무9년 을사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이다. 이게 합방의 흉계임을 알게 되고 장성(長城)의 기우만(奇宇萬)의 의거를 일으킨 때를 맞추어 동지 약간인과 더불어 의논하고 집의계를 결성하는 바이다." 1905년 11월 일본과의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해 12월 제주의 젊은 유림 12인이 집의계를 결성하고, 오라동 연미 마을의 망곡단에 모여 위의 집의계 선언문을 낭독하고 ‘조선의 치욕을 설욕하겠다’고 다짐한다. 이 모임의 이면, 그들을 정신적으로 이끈 스승이 있었으니 귤당(橘堂) 이기온(李基瑥:1834~1886)이 그들의 스승이었다. 이기온의 자는 온옥(昷玉) 호는 귤당으로, 광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