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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온...을사늑약 비분강개 집의계 구성

이기온(李基瑥 : 1834~1886)

 

"무릇 사람이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천지를 공경하고 신명(神明)을 숭례하며 충군애국하는 것이 떳떳한 길이다. 이것이 우리 선조들의 유명(遺命)이거늘. 슬프다, 우리 태조께서 조선을 건국하신 지 300년이 흘러오는 중엽에는 왜국과 청국의 침입으로 고난을 받아왔다. 이제 고종 광무에 이르러서는 수고당(守古黨)과 개화당(開化黨)의 분쟁과 간신 모리배의 집권으로 말미암아 국력이 쇠진했다. 왜구는 그 시기를 타서 광무9년 을사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이다. 이게 합방의 흉계임을 알게 되고 장성(長城)의 기우만(奇宇萬)의 의거를 일으킨 때를 맞추어 동지 약간인과 더불어 의논하고 집의계를 결성하는 바이다."

 

1905년 11월 일본과의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해 12월 제주의 젊은 유림 12인이 집의계를 결성하고, 오라동 연미 마을의 망곡단에 모여 위의 집의계 선언문을 낭독하고 ‘조선의 치욕을 설욕하겠다’고 다짐한다. 이 모임의 이면, 그들을 정신적으로 이끈 스승이 있었으니 귤당(橘堂) 이기온(李基瑥:1834~1886)이 그들의 스승이었다.

 

이기온의 자는 온옥(昷玉) 호는 귤당으로, 광해군 때 유배왔던 간옹(艮翁) 이익(李瀷)의 8대손이다. 조선조 고종 때의 선비로 노사 기정진의 문하에서 유학의 진수를 익혔다. 최익현이 제주에 유배되었을 때 교유하였다.

 

이기온에 대한 행적은 자세하지 않다. 대신 그의 아들 진옹(震翁) 이응호(李應鎬:1871~1950)와 관련하여 전하는 전설이 많다. 그 중 4․3때 집이 전소될 때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숱한 문적과 유품 등 중에서 족보와 함께 ‘탁라국기’만을 구했다는 전설은 유명하다. ‘탁라국기’는 향토사학의 태두로 불리는 심재 김석익의 저술인 ‘탐라기년’과 쌍벽을 이루는 저술로, 나라 잃은 젊은이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탐라의 역사를 기년체로 저술한 역사서이다.

 

전라도의 기정진에서 제주의 이기온으로, 최익현에서 이응호로, 그 사상적 맥은 이렇게 이어지면서 위정척사운동은 바다 건너 작은 섬 제주에까지 항일사상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기온의 글은 시 한 편도 찾아볼 수 없다. 4․3때 화재로 모두 소실된 듯하다. 대신 방선문에 가면 그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애각을 볼 수 있다. 1875년(고종 12)에 귀양이 풀린 면암이 귤당과 함께 한라산을 오르면서 거쳐 갔던 자취를 기념하여 후에 이기온의 제자들이 새겨 놓은 듯하다.

 

 

 

유람 후에 최익현이 ‘유한라산기’를 남기게 되는데, 전하는 몇 편의 한라산기행문 중 백미로 꼽히는 글이다. 아래에 이를 소개한다.

 


최익현(崔益鉉)의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

 

1873년(고종 10) 겨울, 나는 조정에 죄를 지어 탐라로 귀양 갔다. 하루는 섬사람들과 산수에 대해서 말을 나누다가 내가 말하였다.

 

“한라산의 명승은 온 천하가 다 아는 바인데도 읍지(邑誌)를 보거나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구경한 이가 매우 드무니 못가는 것이오, 아니면 가지 않는 것이오?”

 

그들이 대답하였다.

 

“이 산은 뿌리가 4백리에 뻗쳤고 높이는 하늘에 닿아서 잴 수가 없습니다. 5월까지도 눈이 녹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상에 있는 백록담은 여러 신선들[群仙]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는 곳으로 아무리 맑은 날이라 할지라도 항시 흰 구름이 끼어있습니다. 세상에서 영주산(瀛洲山)이라 일컫는 곳으로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입니다. 어찌 평범한 인간들이 쉽사리 유람할 수 있겠소이까?”

 

나는 그 말을 듣자 자신도 모르게 놀랐다. 그 후 1875년(고종 12) 봄에 나라의 특별한 은전[特恩]을 입어 귀양살이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마침내 한라산을 찾을 계획을 하고 제주선비 이기온(李基溫)에게 앞장서서 길을 안내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어른[冠者]이 10여명에 종[下隸] 5~6인이 따랐으며 때는 3월 27일이었다.
일행이 남문을 출발하여 10리쯤 가니 길가에 한 시내가 있는데 한라산 북쪽 기슭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모여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언덕 위에 말을 세워 놓고 벼랑을 의지하여 수십 보를 내려가니 양쪽으로 짙푸른 절벽이 깎아지른 듯 서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커다란 암벽이 가로질러 문의 형태로 걸쳐져 있었는데 그 길이와 너비는 수십 인을 수용할만하며 높이도 두 길은 되어보였다.

 

암벽에는 ‘방선문(訪仙門)’과 ‘등영구(登瀛丘)’란 여섯 글자가 새겨있고 또 다녀간 사람들의 제품(題品)들이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영주십경(瀛洲十景) 중의 하나이다. 문의 안팎이며 위아래에는 맑은 모래와 흰 바위들이 잘 연마되어 그 매끈함이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하였다. 수단철쭉꽃이 좌우에 열 지어 자라고 있는데 바야흐로 꽃봉오리가 탐스럽게 피어나고 있어 그 또한 유별난 경치였다. 잠시 동안 이리저리 돌아보며 돌아갈 뜻이 없었으나 다시 언덕으로 올라와 동쪽으로 10리쯤 가니 마을이름이 다시[竹城]라는 곳이었다. 인가가 꽤 많은데 집들이 모두 대나무에 둘러싸여 있었다. 다같이 지낼 수 있는 넉넉한 집 한 채를 얻어 숙소를 정하니 날이 저물었다.

 

하늘이 시커멓고 바람은 고요한데 비가 올까 걱정되어서 뒤척이면서 밤을 새웠다. 새벽에 일어나 종자에게 날씨를 보라했더니 대답하기를,

 

“어제 초저녁보다 오히려 나쁜 편입니다.”

 

하며 이어 말하는 것이었다.

 

“이대로 돌아갔다가 후일 다시 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거의 열 명 중에 칠팔 명이 그리 하거늘 나는 억지로 술 한 잔을 마셔 불콰해진 바람에 한 보시기의 국물을 들이키고는 마침내 여러 사람의 의사를 어기고 말을 채찍질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자갈 깔린 오솔길이 자못 험하고도 좁았다. 5리쯤 가니 큰 언덕이 있는데 이름이 중산(中山)이라 했다. 대개 관원들이 산행할 때 말에서 가마로 갈아타는 곳이었다. 홀연 어두운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비추니 바다 빛이며 산과 계곡이 차례차례로 드러나기에 말을 이성(二成)에게 주어 돌려보냈다. 간편한 복장에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서 걸어가는데 주인 윤규환(尹奎煥)이 다리가 아프다는 말을 하고 돌아갔다. 그 나머지는 한 꿰미의 물고기처럼 나란히 열을 지어 내 뒤를 따랐다. 한줄기 희미한 오솔길에 나무꾼의 흔적은 조금 있었으나 올라 갈수록 험준하고 좁아지고 가기가 힘들어갔다. 구불구불 돌아서 20리쯤 가니 구름처럼 자욱이 몰려오던 안개가 말끔히 걷히고 날씨가 활짝 개었다. 일행 중에 당초에 가지 말자고 하던 자들이 날씨가 좋다면서 떠들썩하였다. 내가 말하였다.

 

“이 산행의 중도에서 흥을 깬 것은 자네들일세, 무상한 인간들 같으니… 어찌 조용히 삼가지 않는고.”

 

조금 가니 산골물이 바위 밑에서 쏟아져 나와 굽이굽이 아래로 흘러가거늘 잠시 평평한 돌 위에 앉아 갈증을 풀고 산골물의 흐름을 따라 서쪽으로 갔다. 비탈진 돌길 몇 계단을 지나 또다시 돌아서 남쪽으로 가니 아름드리 고목을 뒤덮은 진초록 등나무 덩굴이며 제멋대로 우거진 원시림이 하늘을 가리고 길을 막는 바람에 뒤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10리쯤 가다가 우연히 가느다란 조릿대가 군락지를 이룬 걸 보게 되었는데 그 아름다운 기운이 사람을 엄습해 왔으며 또 앞도 활짝 트여서 바라볼 만 하였다. 다시 서쪽을 향하여 1리쯤 가니 석벽이 누대처럼 뾰족하게 우뚝 치솟은 것이 가히 수천 길은 되어보였다. 이를 삼한시대의 봉수터 유적이라고 하나 근거될 만한 것이 없어보였다. 이 역시 시간이 모자랄까 염려되어 가보지 못하고 또 몇 걸음 가노라니 졸졸 흐르는 실개천을 만났다. 상류로 흔적이 나있거늘 그것을 따라서 위로 올라가니 깊숙하고 가파른 곳에는 눈과 얼음이 보이고 구상나무며 잡목이 우거져 하늘을 가리고 주위를 뒤덮고 있었다.

 

머리를 숙이고 엎드려서 몸이 위험한 것도 지대가 높은 것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간 것이 거의 6~7리였다. 비로소 상봉이 보이는데 흙과 돌이 섞인 평평하지도 않고 비탈지지도 않은 원만하고 후덕스럽게 보이는 정상이 가까이 이마 위에 있었다. 초목은 나지 않았고 다만 초록빛 이끼와 향긋한 향기만이 돌바닥을 쫙 덮고 있어 앉아서 휴식을 취할 만하였다. 높고도 밝은 전망이 툭 트여 활찐 펼쳐지니 가히 해와 달을 옆에 끼고 풍우(風雨)를 다스릴 만하였다. 세상의 일을 잊고 홍진에서 벗어난 뜻이 의연하였다. 얼마 후 시커먼 안개 한 무리가 어둑하게 몰려오더니 서쪽에서 동쪽까지 산등성이를 휘감았다. 괴이쩍었으나 예까지 와서 한라산의 진면목을 못 본다면 소위 높이가 구인(九仞)이나 되는 산을 쌓았는데 단 한 삼태기[簣]의 흙을 얹지 못하여 완성하지 못하는 꼴과 같으니, 제주 섬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수백 보를 가니 움푹 꺼진 곳의 북쪽 가장자리에 당도하였다. 내려다보니 상봉이었다. 여기에 이르매 홀연 한가운데 푹 꺼진 구덩이가 있는데 바로 이것이 백록담이란다. 주위는 1리가 넘고 수면은 맑고 잔잔한데 절반은 물이요 절반은 얼음이었다. 그리고 홍수나 가뭄에도 물이 줄거나 불지를 않고 얕은 데는 옷 걷고 건너갈 만하고 깊은 곳은 빠지면 위험할 정도였다.

 

맑고 밝으며 깨끗하고 정결하여 털끝만치도 속세의 더러운 기운이 없으니 은연히 신선의 족속들이 사는 곳이었다. 사방을 에워싼 산봉우리들도 높고 낮음이 한결같으니, 참으로 하늘이 내린 성곽이었다. 석벽에 매달리며 내려가서 못을 끼고 남쪽으로 가다가 주저앉아 약간의 휴식을 취했다. 일행은 다들 지쳐서 힘이 다하여 여력이 없었다. 서쪽 방향의 가장 높은 데가 절정(絶頂)이었으므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조금씩 올라갔다. 따라오는 자는 겨우 3인 뿐이었다.

 

이 봉우리는 평평하게 퍼지고 넓은 게 그리 아찔하게 높아 보이지는 않으나 위로는 별자리를 우러르고 아래로는 인간세상을 굽어보며 좌로는 해 뜨는 부상(扶桑)을 돌아보고 우로는 서양(西洋)에 접했으며 남으로는 중국의 소주[蘇州]와 항주[杭州]를 가리키고 북으로는 내륙(內陸)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점점이 널려있는 섬들이 큰 것은 구름장만 하고 작은 것은 달걀만큼 한 것 등등 모두 놀랍고도 괴이한 천태만상이었다. ‘바다를 본 자는 다른 물은 물로 보이지 않으며, 태산(泰山)에 올라보면 천하가 좀스럽게 보인다.’ 하였는데 성현(聖賢)의 역량을 어찌 우리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또 소동파로 하여금 당시에 이 산을 먼저 보여줬더라면 소위 그의 ‘허공에 떠 바람을 다스리고[憑虛御風]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르노라[羽化登仙]’ 는 시구가 어찌 적벽(赤壁)에서만 알맞았으랴!

 

내가 회옹(晦翁)의 시구, ‘낭랑하게 읊조리며 축융봉을 나는 듯이 내려간다[朗吟飛下祝融峰]’를 읊조리며 백록담 가로 돌아와 보니 종자들이 이미 밥을 정성껏 지어놓았다. 곧 밥을 나누어 주고 물도 돌렸는데 물맛이 맑고도 달았다. 나는 일행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이 맛이 바로 신선의 금장옥액[金漿玉液]이 아니더냐!”

 

북쪽으로 1리 지점에는 혈망봉(穴望峰)과 예전에 정상에 올랐던 이들의 이름을 새긴 마애각이 있다고 하는데 이미 해가 기울어서 시간이 없었다. 산허리에서 게걸음으로 동쪽 석벽을 넘고 벼랑에 개미처럼 붙어서 5리쯤 내려갔다. 그리고 산남으로부터 서쪽으로 돌아들다가 안개 속에서 우러러보니 백록담을 에워싸고 있는 석벽이 마치 대나무를 쪼갠 듯 오이를 깎은 듯 높은 하늘에 치솟아 있었다. 기기괴괴하고 형형색색한 것이 모두 석가여래(釋迦如來)가 가사(袈裟)와 장삼(長衫)을 입은 형용이었다. 20리쯤 내려오니 날은 이미 황혼이었다. 일행에게 내가 말하였다.

 

“듣건대 여기서 인가(人家)까지는 매우 멀다는데 밤공기도 그리 차지 않으니 도중에 피곤해서 쓰러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여기서 노숙하고서 내일 홀가분하게 길가는 것이 어떠한가?”

 

일행이 모두 말하였다.

 

“좋습니다.”

 

마침내 바위에 의지해서 나무를 걸치고 불을 피워 따뜻하게 한 뒤, 앉아서 한 잠을 자고 깨니 이미 날이 밝아 있었다. 밥을 먹고서 천천히 걸어가는데 간밤의 이슬이 마르지 않아서 옷과 버선이 다 젖었다. 얼마 후 또다시 길을 잃어 왼쪽으로 갔다 오른쪽으로 갔다 이리저리 헤매었다. 그 피곤함이 마치 구절양장[九羊腸]과 십구당(十瞿塘:중국 양자강 상류에 있는 험한 협곡) 같았으나 아래로 내려가는 형편이어서 어제에 비하면 평지나 다름없었다. 또 10리를 내려와 영실(靈室)에 이르렀으니 높은 봉우리 깊은 골짜기요, 우뚝우뚝한 괴석들이 웅장한 위엄을 보이며 늘어서있는데 이것들 모두가 부처의 모습이요, 그 수가 백이나 천 단위로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 이름인즉 천불암(千佛巖)으로 또한 오백장군(五百將軍)이라고도 불리는 곳이었다.

 

산남에 비교해보면 이곳이 더욱 기이하고 웅장하였다. 그리고 산 아래에는 계곡물이 바다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는데 다만 길가라서 얕게 드러나 보이는 것이었다. 광대싸리풀이 있는 곳에서 조금 쉬고는 이내 출발하여 20리쯤 걸어서 서쪽으로 골짜기어귀를 나오니 감영의 군졸들이 말을 끌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인가에 들어가 밥을 지어 허기를 때우고 날이 저물 무렵 성으로 돌아왔다.

 

대략 이 산에 대해서 말하자면, 백두산(白頭山)을 뿌리로 하여 남으로 4천리를 달려 영암(靈岩)의 월출산(月出山)이 되고, 또다시 남으로 달려 해남(海南)의 달마산(達摩山)이 되었으며, 달마산은 또 바다로 5백리를 건너 추자도가 되었다. 다시 5백리를 건너 서쪽으로 대정현(大靜縣)에서 일어나 동쪽은 정의현(旌義縣)에서 그치고 중간이 불끈 솟아올라 산의 절정(絶頂)이 되었는데 동서의 길이가 2백리요 남북이 1백리를 넘는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 산이 지극히 높아 하늘의 은하수를 잡아당길만하므로 한라산이라 이른다 하고, 또 어떤 이는 이 산의 성품이 욕심이 많아서 그해 농사의 풍흉을 관장된 자의 청탁(淸濁)을 보아 가려내며, 이국의 선박이 여기에 정박하면 모두 패하여 돌아가는 까닭에 탐산(耽山)이라 이른다 하였다. 또 어떤 이는 이 산의 형국이 동쪽은 말[東馬], 남쪽은 부처[南佛], 서쪽은 곡식[西穀], 북쪽은 인물[北人]이라고 하나 이는 모두다 근거 없는 말들이다. 다만 풍수지리상의 형국설만을 가지고 그 흡사한 부분을 상상해본다면 산세가 구불거리며 높았다가 낮아지고 하며 마치 달리는 듯한 것은 말과 흡사하고, 위태로운 바위와 층암절벽이 죽 늘어서서 두 손을 맞잡고 읍하는 듯한 것은 부처와 같으며, 평탄하고 광활한 곳에 산만하게 활짝 핀 듯한 것은 곡식과 유사하고, 북쪽을 향하여 감싸 안은 듯한 산세가 어여쁘고 수려함은 사람과 비슷하다. 그런 고로 말은 동쪽에서 생산되고, 절간은 남쪽에 모였으며, 곡식은 서쪽이 잘되고, 뛰어난 인물은 북쪽에 많을뿐더러 나라에 대한 충성심도 각별하다는 것이다.

 

한 점 탄환(彈丸)처럼 외로운 섬이지만 망망대해의 지주(砥柱)요, 우리나라 삼천리를 지키는 문이므로 왜구들이 감히 엿보지를 못한다. 산과 바다에서 나는 맛이 좋은 음식 중에 임금님께 바치는 것이 여기에서 많이 난다. 공경대부와 백성들의 일상에 쓰이는 물건하며 제주의 6~7만 호가 경작하고 채취하는 자원 역시 모두 이 산에서 얻어 충족 되고 있다. 그 혜택과 이로움이 백성과 나라에 미치는 바가 금강산이나 지리산처럼 사람에게 관광이나 제공하는 산들과 어찌 같이 놓고서 말할 수 있으랴!

 

뿐만 아니라 이 산은 한갓진 바다 가운데 있기에 드맑고 기온도 몹시 차므로 품은 뜻이 견고하고 근골이 강한 자가 아니면 결코 올라갈 수가 없다. 그리하여 산을 올라간 사람이 수백 년 동안에 목사를 지냈던 몇 사람에 불과했을 뿐이요, 예전 현인들의 위대한 문장으로는 한 번도 그 진면목이 발휘된 작품을 얻지 못하였다. 그런 까닭에 세상의 호기심 많은 자들이 신선이니 하는 황당 허무한 말로 어지럽힐 뿐이고 다른 면은 전혀 소개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이 산이 지니고 있는 본연의 모습이겠는가. 우선 이 글을 써서 이곳을 유람하고자 하나 가지 못하는 자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을해(1875년, 고종 12) 5월에 최익현 찬겸(贊謙)이 적는다.
출전 : 역주 증보탐라지, 제주문화원, 2005
 

 

글=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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