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도(本島)는 교통불편(交通不便)의 관계상(關係上) 자연 상업도 미비부진(微微不振)하더니 근래(近來) 해륙교통기관(海陸交通機關)이 완비(完備)와 대판직항로(大阪直航路)가 개통(開通)된 이래(以來) 제주성내(濟州城內)를 중심(中心)으로 각지(各地)에 상업(商業)이 점차 은성(漸次 殷盛)하야 활기(活氣)를 정(呈)하고 남선(南鮮)의 유수(有數)한 상업지대(商業地帶)로 굴지(屈指)케 되엿다. 이출품(利出品)은 수산물(水産物)을 위주(爲主)로 면화(棉花) 관물(冠物) 추용(椎茸) 우피(牛皮) 양말등(洋襪等)인바 연액(年額) 백만원 내외에 달(達)하며 이입품(移入品)은 백미(白米) 맥분(麥粉) 면사포(綿紗布) 인촌(燐寸) 석유 기타 잡화 등인바 연액(年額)이 역백만원(亦百萬圓)에 달(達)한다고 한다(동아일보 1926년 10월 27일). 1915년 정미(精米) 1석(石)의 가격은 경성지역에서는 상 12.68엔, 중 12.19엔, 하 11.67엔이며 목포에서는 상 12.35엔, 중 12.04엔, 하 11.60엔으로 제주도는 이보다 30% 정도 비쌌다. 이는 제주도의 쌀(水稻) 생산량이 아주 적어 그 대부분을 타 지역으로부터 수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18년 정미 1
▲ 사라봉 쪽에서 찍은 제주읍의 전경.[사진=제주도청] 일반적으로 사회구성원들의 건강상태와 영양상태를 살펴보는 적절한 자료로 신장, 체중, 흉위 등에 대한 조사가 주로 활용된다.1930년대 중반 제주지역과 서귀포지역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여 이루어진 신체검사 기록을 토대로 당시 제주도민들의 건강상태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기록은 제주읍 9016호 중 600호, 서귀읍 400호 총 1000호를 대상으로 하여 7,8,12,13,14,18,19,21세에 해당하는 제주읍 남녀 502명, 서귀면 248명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1930년대 조선인 남자 성년의 평균신장은 160~165cm, 여자의 경우 148~1499cm였다. 나이를 19세 이상으로 보고 제주도와 비교해 보면 제주읍인 경우 남녀 모두 평균 이상이다. 서귀포 19세 남자만 평균에 미달한 것으로 나타난다. 19세 이상 제주읍 남녀 모두 표준치 보다 앞선다. 1937년 기준으로 19세이면 1918년 출생인구로 생활수준의 변화가 영양상태에 반영되었을 나이이다. 제주시 12세 남자의 수치는 주변 나이와 비교하여 보았을 때 오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제주읍의 경우 19세의 연령층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신장이
일반적으로 당시 생활수준을 측정하기 위해 가장 먼저 살펴보는 것이 상식물(常食物) 현황이다. 어떤 식품을 어느 정도 먹었느냐는 그 가정의 경제상태, 개인의 건강, 영양상태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당시 우리나라는 미식국가(米食國家)였지만 제주도는 농업특성상 보리, 조, 피 등 전작물(田作物)을 상식(常食)으로 하고 이에 육류, 어류들을 추가 섭취했다. 당시 제주지역의 영양섭취는 지역, 지역과 경제수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조, 보리를 주식으로 했고 육류, 어류 등과 같은 부식물의 섭취는 비정기적으로 특별한 날에만 섭취했다. 물론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중산간마을이 경제적으로 나아 보이며 산촌이 가장 열악한 환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계절적으로는 겨울이 가장 곤궁(困窮)한 시기로 식사횟수가 2회로 줄고 내용물도 밥 대신 죽으로 대체된다. 소채류 중심의 부식이 주를 이루며 겨울, 산간마을과 같이 경제적 상황이 어려운 경우 피밥을 상용(常用)하며, 식사횟수 역시 2회로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식사횟수가 2회로 줄어든 것은 중산간마을이나 해안마을도 마찬가지다. 이 같은 상식(常食) 외로 가족의 경제상황에 따라 평소보다 특별히 더 먹는 날이
공업(工業)은 아직 유치(幼稚)하야 목하 자급자족(目下 自給自足)의 역(域)을 탈(脫)치 못하엿스나 농한기(農閑期)를 이용(利用)하야 가정공업(家庭工業)으로 소규모(小規模)의 주조(鑄造) 조선즐관물(朝鮮櫛冠物) 모자(毛子) 양태(涼太) 암건(岩巾) 탕건(宕巾) 망건(網巾)등(等)을 제조(製造)하며 근래 관힐(瓘詰) 패구(貝釦) 양말(洋襪) 주류(酒類) 조면등(繰綿等)의 공장(工場)도 설치(設置)되여 그 산액(産額)도 불소(不少)하야 본도 공업계(工業界)의 신기원(新紀元)을 작(作)하엿다(동아일보 1926년 10월27일). 일제강점기 지역자본에 의한 민족적 제주경제를 견인했던 제주근대 기업가로 앞서 소개했던 박종실, 강성익, 황순하, 최원순, 이윤희 외에 최윤순과 김근시의 기업활동과 경영활동 역시 모범적이라 여기서 소개하고자 한다. 김근시(金根蓍)는 제주지역의 면화매매 및 가공업 발전에 기여했으며 면화가공․판매업을 중심으로 해운업, 운송업, 소주제조업 등 여러 업종에서 제주기업가로서 활동하였다. 최윤순(崔允淳)은 해운업, 면화가공․판매업, 자동차운송업, 소주제조업, 어업운반업, 목재업 등 다양한 부문에서 기업활동
그들은 이러한 노동은 물론 저 험(險)하고 박(薄)한 자연을 상대로 싸워가며 영위하는 그들의 원시적 자족적경제(自足的經濟)에서 나오는 “부득기(不得己)"한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저러한 노동을 하지 안코서는 저 소박한 원시적 생활조차도 할 수 없으리 만치 그들의 노동은 너무나 과하고 너무나 무거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즉도 노동함으로써 그들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역사적 조건은 없섯든 것이다. 인류가 원래 가젓섯고 또 장래에 반드시 가지리라는 저러한 순진한 노동생활을 우리는 불완전하나마 그들의 현실에서 발견할 수 잇는 것이다. 다만 그들의 저러한 노동생활에 시민적왜곡(市民的歪曲)과 사위(邪僞)가 석기지 안은 채로 그들의 생활이 문화적으로 향상될 수 잇다면 하는 기원(祈願)을 마지 안는다. 지금의 그것은 비록 순진하나마 너무나 원시적이고 너무나 비문화적(非文化的)인 까닭이다 그들의 “노동”은 너무나 과(過)하고 그들의 영양(榮養)은 너무나 조박(粗朴)하며 그들의 생활은 너무나 비문화적이다. 그들의 노동이 문화생활을 영위하는 인류로서의 생활상 필요한 노동의 형태로서 향상된다면 그 얼마나 다행이랴!(동아일보 19
1960년대 후반, 즉 감귤농사가 보편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제주지역에서 단순히 땅을 많이 가진 것만으로는 그리 유세할 거리가 못되었다. 오히려 ‘땅부자 일부자’라고 땅 많은 집에 시집가는 새색시를 보며 ‘시집가서 소처럼 일만 하겠네’ 라며 안타까워했다. 제주도의 전통농업은 낮은 토지생산성을 노동생산성(특히 여성노동의 강화)으로 충당하는 조방적 농업방식이었다. 즉, 화학비료와 제초제가 나오기 전에는 제주지역 농지 대부분이 토질이 안 좋았고 검질(잡초)이 많아 농사는 그야 말로 ‘검질과의 전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며느리에게는 잡초가 많은 진밭을 주고 딸에게는 잡초가 덜한 뜬밭을 준다고 했다. 제주농가에서는 땅의 크기가 아니라 논(水田)과 촐왓(茅田)를 포함하여 5가지 형태의 토지를 골고루 소유하고 있어야 진정한 땅부자로 인정받았다. ▲ 지세명기장 본문 일제강점기 제주지역 농어촌 마을에서는 어느 정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을까. 일제강점기 과세의 기준이 되었던『地稅名寄帳』을 기초자료로 하여 일제강점기 제주지역 농어민들의 토지 소유 면적과 지가(地價)을 살펴 볼 수 있다. 이 글
올해가 세계자연유산 거문오름 국제트레킹 10주년인 걸로 보아 벌써 10년 전 일이다. 거문오름 트레킹 첫해 첫날, 지금은 군대 간 아들과 거문오름 갔다가 우연찮게 귀인(貴人)을 만났다. 거문오름 옆 백하마을에서 태어나 거문오름에서 생활한 적도 있으신 이○○할머니(당시 81세)를 만난 것이다. ▲ 거문오름 숯가마 이 할머니는 1940년부터 1960년말까지 거문오름에서 소와 말을 키우며 농사도 짓고, 숯을 구어 팔고 양애, 드릅, 늘굽 등을 경작하며 살았다. 이할머니가 ‘우리오름’ 이라고 부르는 거문오름에는 사람들이 거주하던 움막터(농사나 숯을 구울 때, 소나 말을 방목했을 때 임시 거처지), 화전민 거주터, 종가시나무와 붉가시나무 등으로 숯을 구었던 숯가마터(돌가마)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 할머니가 이 오름에서 농사짓고 숯을 굽게 된 것은 1940년경 이할머니 시아버지가 현금 100만원을 주고 이 거문오름을 산 뒤 부터이다. 1960년대 말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 거문오름 소유가 몇 번의 재판과정을 거친 뒤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때 까지 이할머니는 숯을 구어 성안에 가서 숯 10가마니에 좁쌀 서말 받고 팔아 생활하였다고 한다.
▲ 산지항 개발 이전 산지포 부근(사진으로 보는 제주 100년) 제주도의 가장 오래된 항구는 건입포(建入浦)로 산지천이 바다로 유입되는 산지천 하류 일대로 추정된다. 기원전 100년~기원후 500년경부터 건입포가 제주와 육지를 잇는 입출항 포구(浦口)로서 외부와의 교역에 이용되었다. 제주에서 처음으로 항구가 건설된 것은 1735년 김정 목사가 부역으로 산지항 방파제 80간(間)과 내제(內堤)를 쌓은 것이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산지항 항만 개발이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다. ▲ 산지항 개발 이전 산지포 부근(사진으로 보는 제주 100년) 제주도 산지항(濟州島 山池港)은 암초(暗礁)가 만코 수심(水深)이 천(淺)할뿐 아니라 방파(防派)할만 곳이 업슴으로 풍랑(風浪)만 심(甚)하면 선박(船舶)의 출입(出入)이 도저(到底)히 불가능(不可能)하야 지방발전(地方發展)에 막대(莫大)한 지장(支障)이 됨으로 일반(一般)은 차(此)를 유감(遺憾)으로 사(思)하던바 당국자(當局者)의 진력(盡力)으로 래칠월초순(來七月初旬)부터 삼개월(三個月)의 기간(期間)과 삼천만원(三千萬圓)의 예산(豫算)으로 일만칠천여평(一萬七千餘坪)이나 매립(埋立)하고 일백육십간(一百六十間)이나 되는 방파제(
▲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를 보면, 제주도에는 제주성내(城內)를 중심으로, 남동으로는 성산포 및 정의읍까지, 남서로는 모슬포 그리고 한라산을 횡단하여 서귀포에 이르는 길과 기타 도로가 있다. 이 도로들은 한라산의 경사면과 직각 또는 평행을 이루고 있다. 1910년대 초 제주도내 도로는 성내를 기점으로 해서 성산포로 가는 길, 정의읍으로 가는 길, 대정읍을 거쳐 모슬포로 가는 길, 연안(沿岸) 각 마을을 거쳐 섬을 일주(一走)하는 길, 한라산 중턱을 횡단하여 서귀포로 가는 길 등 4~5개 노선에 불과했다. 이 도로들은 배수시설이 없고 교량이 가설되어 있지 않아 비만 오면 마치 하천과 같이 도로를 따라 많은 빗물이 흘러 내려 사람이나 마차의 통행이 어려웠다. ▲ 도로 만들기 부역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이 ‘신작로(新作路)가 생겨났다. 신작로 즉, 제주도 해안 일주도로는 1912년부터 1914년간 당시 도당국과 경찰서가 협력해 일주도로 건설 계획을 세우고 지방비 보조와 도민의 부역환산금(夫役換算金)으로 건설됐다. 제주도민의 부역과 노선이 지나가는 곳이면 무조건 강제기부(寄附)에 의존해 도내 각 해안마을을 연결하는 도로를 건설한 것이다. 이어 1914년부터
▲ 1922년 제주상선주식회사 설립을 마치고 찍은 기념사진 1931년 11월 27일 제주성내에서 동아일보 제주지국 주최로 주요도시 순회좌담회가 열렸다. 제주의 산업발전책(産業發展策)을 주제로 한 이 좌담회의 참석자는 도평의원(道評議員) 최원순(崔元淳), 면협의원(面協議員) 이윤희(李允熙) 잡화동업조합장(雜貨同業組合長) 박종실(朴宗實), 동아통항조합(東亞通航組合) 홍순녕(洪淳寧), 자동차업 강성익(康成益) 식산지점(殖産支店) 양계무(梁啓武) 변호사 양홍기(梁洪基) 등이다. 이 날 참석한 제주기업가 최원순은 제주의 산업발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제주(濟州)는 농업(農業) 이외(以外)에는 산업(産業)이란 전무(全無)하고 그도 또한 토지가 척박(瘠薄)한 관계상(關係上) 속맥(粟麥) 이외 농업물(農業物)이 극(極)히 소량(少量)임니다. 그러함으로 농업 이외 어떠한 산업(産業)을 물론(勿論)하고 장려(獎勵)할 필요가 잇슴니다. 기중(其中)에서도 제주는 사방(四方)이 해안(海岸)인 지리적(地理的) 관계(關係)로 보아 수산업(水産業)이 가장 적당(適當)하고 둘재 초원(草原)이 광대(廣大)하니 목축업(牧畜業)이 발전할 수 잇다고 생각함니다. 그리
일제강점기 초기 제주도의 공업은 유치한 수준, 단계로 제주도의 자원, 즉 자연환경을 이용한 약간의 자원을 가공하는 수공업 제품들 예를 들면, 죽제품, 조선모자, 탕건, 양태 등이 주를 이루었고 이외에 주로 자급적 성격을 지닌 약간의 면직물 제품이 존재했었다(高禎鍾, 「濟州島便覽」, 1930). 제주 지역에서 가장 특징 있는 민속공예는 말총으로 만드는 관모공예로, 그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갓공예이다. 이 밖에 조선 시대부터 병사의 군모인 털벙것(털벌립), 패랭이(대패랭이), 정동벌립(정당벌립)이 활발하게 만들어져 진상품으로 납품되었다. 그러나 단발령 이후 제주지역 관물공업, 관모공예는 급격히 쇠퇴해 갔다.갓은 모자 부분과 차양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갓의 모자 부분(총모자라고 한다)과 탕건, 망건을 짰다. 탕건은 선비들이 집에 있을 때 머리에 쓰는 모자이며, 망건은 상투를 틀기 위해 머리를 빗어 올리고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이마에 두르는 넓적한 띠이다. 갓의 차양은 갓양태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양태라고 부른다. 총모자와 양태의 수요는 일제강점기에 주춤했다가 해방 후 급격히 쇠퇴하였다. 상공업(商工業)도 물론 원시
청암(晴岩) 박종실(朴宗實)은 근대 무역인으로 한국해운업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제주지역 근대경제 형성에 기여한 제주의 대표적 기업가이다. 박종실은 신용과 근면, 절약을 상인정신으로 삼았으며 신용제일주의의 기업가정신을 바탕으로 현금과 부동산 그리고 상품에 분산 투자하여 위험도를 낮추며 시세변동에 탄력적으로 대비하는 방식을 가진 사업가였다. 이러한 박종실의 경영철학은 ‘신용제일주의’, ‘삼균배지론(三均配之論) 투자관’, ‘합리적 기업경영관’ 등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사람은 인정과 도덕이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하늘이 그를 멀리한다.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가 잘해서 일이 잘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어쩐지 하느님이 도우셔서 일이 잘된 것 같이 생각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만족함을 알고 늘 만족한 마음을 가지면 일생동안 욕된 일이 없고, 욕망을 멈추는 것을 알고 늘 억제하면 일생 부끄러움이 없다(知足常足 終身無辱 知止常止 終身無恥). 평생 ‘신용이 생명이다’를 강조했던 박종실은 신용, 근면, 절약 중에서 특히 신용을 생명처럼 중요하게 생각하여 항상 신용제일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