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우리나라 최초로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여 기념식 및 각종 행사를 하였다. 1922년 3월 16일 동경에서 방정환(方定煥)선생이 어린이의 고유문화와 예술 활동을 진작시키며, 어린이의 인권의식을 고취할 목적으로 색동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1923년 ‘어린이날 선언’의 직접적 배경이 되었다. 오월 일일이 왔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어린이에게도 사람의 권리를 주는 동시에 사람의 대우를 하자고 떠느는 날이 도라 왔다. 조상적부터 아해나 어른이나 사람의 허물을 쓰고 사람으로 살지 못한 것은 우리의 골수에 박힌 원한이다. 지금에 우리 조선사람은 어른이나 아해나 누가 사람의 권리가 잇스며 사람의 대우를 밧는가 생각하면 실로 긔가 막히는 일이다. 첫재 먹을 것 입을 것이고 편안히 쉬일 집이 업는 터이라 사람 노릇을 하야 할지라도 할 수가 업는 것은 자연한 형세이라. 이에 뜻 잇는 몃 사람의 발기로 이러나게 된 소년운동협회(少年運動協會)라는 곳에서 졀믄이나 늘근이는 임의 희망이 업다. 우리는 오즉 남아지 힘을 다 하야 가련한 우리 후생(後生)되는 어린이에게 희망을 주고 생명의 길을 열어주자 하는 취지로 오늘 오
또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경제학·사회복지학 분야에 능통한 진관훈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의 ‘제주근대경제사 신문읽기’입니다. 비록 지금의 경제시스템과 여건이 구비돼 있다하지만 제주 역시 과거의 실타래가 얽히고 설킨 땅입니다. 기업과 산업이 척박했던 제주에도 그 맹아가 등장하던 시기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제주사회와 경제상황을 살핀 ‘신문’을 통해 그 시절의 기업·경제가 지금 우리 제주의 삶과 어떻게 연관·연동되고 있는지 가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단언컨대 제주사 정립을 위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분야는 화전(火田史) 연구다. 30여 년 전 한국사를 전공하던 선배가 ‘제주근대사 연구의 시작은 화전연구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화전의 존재와 의미, 무엇보다 화전연구의 중요성을 전혀 몰랐다. 제주지역의 전통농업 역시 화전을 빼고 논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제주의 전통농업 측면에서 화전을 살펴보고 다음 기회에 제주근대사 측면에서 본 화전과 화전민을 정리하려 한다. 제주도에서는 신라시대 이전부터 화전농업이 이루어 졌다. 김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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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경제학·사회복지학 분야에 능통한 진관훈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의 ‘제주근대경제사 신문읽기’입니다. 비록 지금의 경제시스템과 여건이 구비돼 있다하지만 제주 역시 과거의 실타래가 얽히고 설킨 땅입니다. 기업과 산업이 척박했던 제주에도 그 맹아가 등장하던 시기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제주사회와 경제상황을 살핀 ‘신문’을 통해 그 시절의 기업·경제가 지금 우리 제주의 삶과 어떻게 연관·연동되고 있는지 가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고구마는 학명을 lonmoesaBattas라 하야 선화과(旋花科)의 다년생 초본이오. 원포(園圃)의 경작물인 것이니 그 원산지에 대하야 제설(諸說)이 잇스나 중앙아미리가(亞米利加)의 소산인 것을 콜롬보가 신세계 발견 후 토산(土産)으로 서반아(西斑亞)로 지래(持來)하야 구주(歐洲)로 아세아 제지(諸地)로 전파된 것이라. 고구마가 조선에 들어온 것은 무론 오래지 아니한 일이다. 본대 서반아인의 손에 인도양을 지나서 마닐라, 몰루카, 말레제도(諸島)로 전파되고 갱진(更進)하야 중국, 대만, 유구(琉球), 일본 등 차서(次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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