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따라 햇볕이 따사롭게 창가를 두드리며, 어머니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정월 바람이 무색하도록 노랗게 피어난 배추꽃도 어머니의 마음을 포근하게 어루만진다. 마당을 비추다가 어머니의 품을 파고드는 햇볕이, 산산이 부서지며 어머니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햇볕과 바람의 재롱에 마음이 녹아든 어머니가 당신의 18번 고백을 노래하듯 털어놓는다. “우리집은 남향이난 이추룩 또똣헌 게 이(이렇게 따뜻하구나)! 경 허난 니네 아방이 집은 남쪽으로 들어앉아사 헌댄 고라신고라(그러니까 너희 아버지가 집은 남쪽으로 자리해야 한다고 말했나 보다). 오늘은 해가 들어왕 굴묵을 때주난(들어와서 난방을 해주니까), 아방이 왕 보민 잘도 좋아허키여만은(아버지가 와서 보면 무척이나 좋아하겠다만은)... 경헌디(그런데), 허태행씨는 어디로 가신고? 난, 니영 살아도 영 궁금헌디(너랑 살아도 이렇게 재미없고 외로운데), 니네 아방도 나추룩 잘 살암신가, 이?" 요즘들어 20여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들먹이며, 궁금증과 외로움을 드러내시는 어머니가, 한편으론 걱정스럽고, 다른 한편으론 안쓰럽다. 올해 102세가 되신 어머니가 새삼스레 아버지의 안부를 묻고 궁금증을 드러내시니, 무어라 대답할 말
제리 룬더가드(Jerry Lundergaard)는 아내를 납치해서 장인에게 몸값을 받아내려는 창의적인 사기극을 벌인다. ‘전대미문’의 일인 만큼 이 사건을 맡은 미네소타의 한적한 소도시 브레이너드(Brainerd)시의 순박하고 임신 7개월에 몸도 무거운 ‘아줌마’ 여자경찰서장 마지 군더슨(Marge Gunderson)에게 조금은 버거워 보인다. 선입견과 편견이 발동한다. 경찰관 1명이 사살당하고, 그 자리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남녀 2명이 역시 사살당한 ‘강력사건’의 유일한 단서는 경찰관이 죽기 직전에 남긴 이 말뿐이다. “임시번호판도 없는 자동차를 발견했다. 검문하겠다.” 마지는 그 번호가 자동차대리점에서 아직 출고하지 않은 자동차에 붙어있는 표식번호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제리의 자동차대리점에 찾아가 ‘수석 세일즈맨’인 제리를 만나 “최근에 사라진 자동차가 없었느냐”고 탐문한다. 유난히 해맑고 단정해 보이는 제리는 선한 미소를 머금고 “그런 일 없다”고 친절하게 응대한다. 이름을 보아하니 제리(Lundegaard)는 마지(Gunderson)와 마찬가지로 노르웨이ㆍ덴마크계 사람이기도 하다. 마지는 선해 보이는 ‘고향사람’ 제리를 100% 신뢰한다. 대신 그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 지구촌 많은 나라에서 중시하는 과세의 기본 원칙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노동으로 소득이 생기면 근로소득세를 낸다. 사업을 해서 소득이 생기면 사업소득세를 낸다. 부동산을 사고팔며 이익을 거두면 양도소득세를 낸다. 은행 예금에 몇푼 이자가 붙어도 이자소득세를 낸다. 그런데 소득이 있는데도 세금을 내지 않는 분야가 있다. 바로 주식이나 채권 투자로 벌어들인 소득, 이른바 금융투자소득이다. 상장주식을 거래하며 몇천만원, 억대의 양도차익이 생겨도 세금을 한푼도 내지 않는다. 고소득층일수록 금융상품을 활용해 조세 회피를 할 수 있다는 문제점이 지적됐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 금융투자소득세다. 금투세는 2020년 문재인 정부가 금융세제 선진화 방안의 일환으로 추진해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했다. 조세의 형평성을 높이고 투자유형·금융상품별로 제각각인 과세 체계를 바로잡자는 취지였다. 금투세는 주식·채권·펀드·파생상품 등 금융상품 수익이 5000만원 이상이면 20%(지방세 포함 22%), 3억원을 초과하면 25%의 세금을 매기는 것이 골자다. 금투세는 당초 2023년부터 시행할 예정이었다. 개인투자자들이 반발하자 2022년 말 여야가
한 해를 무탈하게 보내게 됨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2023년을 보내는 12월의 끝 무렵, 그 마지막 주는 참으로 힘이 들었습니다. 아마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 가는 저녁 무렵이었던 듯 합니다. 어머니가 동녘방에 가시더니 무언가를 가슴에 소중히 품고 오셨습니다. 어느날 마치 골목에서 정신 없이 놀던 아이들이, “춘자야, 저녁 먹으라”고 부르는 목소리에, 저마다 집을 향해 신바람나게 달려갈 때의 상기된 얼굴을 닮았습니다. “정옥아, 내일은 이 옷 입곡 손 심엉(잡고) 교회에 곹이 가게 이!”라는 어머니의 표정이 사뭇 진지합니다. 두 손으로 소중하게 받쳐서 내 눈 앞에 펼쳐진 건, 아, 빛이 바랜 저고리였습니다. 하얀 색이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서 누렇게 퇴색된 것일까요. 어머니의 화안한 미소와 달리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는 그것은, 자기의 정체를 숨기고 싶은 저승옷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입고 가신다며, 아마 70대 초반에 마련해 놓으셨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30년 세월을 장롱 깊숙한 곳에서 숨을 죽이며 지내느라, 저 옷도 속이 많이 저렸던가 봅니다. 글쎄요. 요즘은 장례업자가 관이고 수의고 일체를 세트로 계약해서 장례를 치른다니,
장인에게 돈을 뜯어내기 위해 아내 납치 자작극을 벌이기로 한 제리 룬더가드(Jerry Lundergaard)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납치청부업자를 구하는 일이다. 제리는 아내 납치를 설계할 순 있지만, 자신이 직접 아내를 납치하기는 간단치 않다. 그래서 그는 나쁜 일을 할 청부업자와 접촉한다. “나는 당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고, 당신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 힘을 합치면 우리는 혼자는 할 수 없는 큰일을 할 수 있다.” 테레사 수녀님이 남긴 좋은 말씀이다. 제리 룬더가드는 이 말씀을 ‘아내 납치’란 나쁜 일에 실현한다. 테레사 수녀님께 죄송한 말씀이지만 우리 주변에서 사람들이 힘을 합쳐 꼭 좋은 일만 하는 건 아니다. 좋은 큰일보다는 나쁜 큰일을 위해 뭉치기도 한다. 아내 납치청부업자를 ‘공채’로 뽑기는 불가능하다. 제리는 자신이 일하는 자동차 대리점에서 자동차 수리를 맡고 있는 빅풋(Big Foot)에게 납치 청부업자 ‘천거’를 부탁한다. 인디언 후예인 빅풋은 인디언 전사처럼 무표정하고 과묵하게 자기 할 일만 한다. 왠지 믿음이 간다. 제리가 생각하기에 빅풋은 전과기록이 있는 만큼 ‘어둠의 세계’에도 인맥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시공능력 평가(도급 순위) 16위인 태영건설이 2023년 12월 28일 끝내 워크아웃(기업개선 작업)을 신청했다. 태영건설은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종합 건설업체이자 아파트 브랜드 ‘데시앙’으로 알려진 큰 기업이다. 대형 건설사의 워크아웃 신청은 2013년 쌍용건설 이후 10년 만의 일이다. 태영건설이 위기에 몰린 배경은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채무 부담으로 인한 유동성 부족이다. 태영건설의 순수 부동산 PF 잔액은 3조2000억원, 순차입금이 1조9300억원으로 부채비율이 478.7%에 이른다. 고금리와 공사비 급증으로 착공조차 못한 건설현장이 거의 절반이다. 문제는 PF 리스크에 시달리는 건설사가 태영건설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2023년 9월 말 기준 주요 16개 건설사의 PF 보증액은 28조3000억원이다. 남명건설(창원), 해광건설(광주) 등 지방 소재 중소 건설사들이 이미 부도를 냈다. 증권가에는 1군 건설사의 부도설까지 나돈다. 부동산 PF는 아파트 등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의 미래 수익을 담보로 금융회사에서 사업비를 빌리는 것이다. 부동산 개발 시행사가 자본을 갖춘 채로 사업을 시작하는 경우는 드물다. 담보 없이 부동산 개발의 사업성에 기대어 돈을
제리 룬드가드는 청부업자들에게 “아내 ‘진’을 납치해서 몸값으로 8만불을 요구해 달라”는 황당한 의뢰를 한다. 장인에게 몸값 8만불을 받아서 그들에게 수임료 4만불 주고 자신이 4만불 갖겠다는 ‘비전’을 제시한다. 제리 룬드가드는 왜 이러는 걸까. 청부업자들도 자기 아내를 납치해 달라는 기상천외한 의뢰가 황당해서 그래야 하는 이유를 물어본다. 제리도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는 청부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려는 듯 생각을 가다듬는 것 같더니 이내 ‘내가 당신들한테 그런 것까지 설명해야 하느냐’고 버럭한다. 아마도 돈 4만불을 마련하기 위해 청부업자들마저 황당해하는 ‘아내 납치 자작극’을 벌여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다시 한번 깨닫고 화가 났는지도 모르겠다. 납치자작극은 대개 자신이 누군가에게 납치당한 상황을 설정하는데, 제리는 자신이 납치당했다고 하면 장인은 물론, 아내조차 자신을 구출하기 위해 순순히 몸값 8만불을 지불하리라고 자신할 수 없다. 돈 많은 장인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자는 게 아니라 이게 모두 당신의 딸 진과 당신의 손자 스카티를 위한 것”이라며 사업자금을 빌려달라는 제리에게 “네가 내 딸과 내 손자 걱정까지 할 필요 없다. 내 딸과 내
올해도 예산안 심의는 법정 처리시한(12월 2일)을 넘긴 늑장·졸속·짬짜미 심사에다 나라살림을 정쟁 대상으로 삼는 구태를 되풀이했다. 새해 예산안이 우여곡절 끝에 21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법정시한을 19일 넘긴 것이자 3년 연속 지각 처리다. 여야가 합의 처리한 예산을 보면 총지출 규모가 정부 원안보다 3000억원 적은 656조6000억원이다. 정부 원안에서 4조2000억원을 깎고, 3조9000억원을 증액했다. 국가채무와 국채 발행 규모를 정부안보다 늘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재정악화 소지는 줄였다. 정부가 삭감하며 현장의 반발을 샀던 연구·개발(R&D) 예산을 차세대 원천기술 연구 보강과 최신·고성능 연구 장비 지원을 위해 6000억원 늘린 점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여야는 내년 4월 총선을 의식해 서로 관심 및 역점을 두는 분야의 예산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담합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관심사업인 지역사랑상품권 발행 지원 예산이 ‘0원’에서 3000억원으로 살아났다. 새만금사업 예산도 3000억원 증액하며 복원됐다. 민주당이 상임위원회에서 삭감한 1900억원 원자력발전 예산 등 국민의힘이 요구한 예산도 상당 부분 살아났다. 결과적으로 여당
코언 형제감독의 ‘파고’는 ‘가정답지 못한 가정’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면서 발생하는 끔찍한 사건을 보여준다. 영화의 포스터가 인상적이다. 뜨개바늘을 쥐고 있는 한 남자가 하얀 설원에 피를 흘리고 엎드려 있고, 이 장면을 뜨개질로 표현했다. 평범한 가정에 한두점쯤은 있을 법한 어머니가 놓은 ‘홈메이드’ 자수(刺繡)같은 모습이다. 영화 포스터는 이 영화가 ‘홈메이드’ 살인극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영화 주인공 룬더가드(Lundergaard)의 아내 진(Jean)은 거실에서 TV를 보며 한가롭게 뜨개질을 하다가 남편 룬더가드가 고용한 납치법들에게 납치당하는 황당한 꼴을 당한다. 돈 많은 장인이 운영하는 자동차 대리점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룬더가드는 항상 돈에 쪼들리고, 너절하고 쩨쩨한 판매사기부터 대담한 은행 대출사기까지 손에 대고 점점 수렁에 빠진다. 돈 많은 장인이 지원을 해줄 만도 한데, 장인은 똑 부러지지 못한 사위가 못마땅하고, 기대도 없다. 사위의 경제적 곤경도 외면한다. 아내 진(Jean)도 곤경에 빠진 남편 룬더가드의 위안이 돼주지 못한다. 아내는 남편인 자신보다 장인을 믿고 살아가는 듯하다. 결국 룬더가드는 아내 납치극을 벌여 돈 많고 인정머리
우리나라에는 혁신을 강조하는 조직이 많다. 정치권과 정당, 국회와 정부는 물론 공공기관에 이르기까지 불신이 큰 곳일수록 국민 신뢰를 회복하겠다며 혁신 방안을 발표하고 여론을 살핀다. 내년 제22대 4·10 총선을 석달여 앞두고 각종 혁신 방안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상당수는 발표만 그럴싸할 뿐 이내 잊히고 만다. 혁신 방안이란 것도 진정 민생과 국민, 국가의 미래를 위한 것인지, 잠시 위기를 모면하거나 선거 때 표를 노린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가는 것들도 적지 않다. 정부가 12일 한국토지주택공사(LH) 혁신 방안을 발표했다. 지난 4월 발생한 인천 검단신도시 LH 아파트 지하주차장 붕괴 사고에 따른 후속 조치다. 공공주택 시장에서 LH 독점을 깨고, 입찰·설계·감리 등 아파트를 짓는 모든 과정에서 LH 전관前官의 영향력을 혁파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LH는 그동안 공공주택 사업을 독점해왔다. LH가 발주하는 연간 10조원 규모 물량을 따내기 위해 설계·시공·감리업체들은 퇴직 전관들을 채용한다. LH의 독점과 전관이 만들어낸 부실 시공·관리 소홀의 실상은 ‘철근 누락’ 사태로 여실히 드러났다. 정부는 이번 혁신 방안에서 LH의 공공주택 독점 공급자 지위를 허
1997년 재기발랄한 형제감독 조엘 코언(Joel Coen)과 이단 코언(Ethan Coen)이 각본을 쓰고 감독해 제작한 ‘파고(Fargo)’는 범죄물이지만 재기발랄한 감독들이 즐겨하듯 범죄물을 ‘블랙 코미디’로 풀어낸다. 우리가 진지하고 심각하게만 받아들이는 현실의 허무맹랑함과 어이없음을 마음껏 조롱한다. 영화의 시작에 앞서 검은 바탕에 흰 글씨의 ‘안내문’이 화면 가득 뜬다. “이 이야기는 실화(true story)다. 영화에 그려진 사건들은 실제로 1987년 미네소타에서 발생한 것들이다. 생존자들의 요청으로 등장인물들의 이름만 바꿨다. 희생자를 존중하는 마음을 담아 그 나머지 부분들은 정확하게 사실과 부합하게 그렸다.” 간단히 말하면 실제인물의 이름만 바꾼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영화라는 안내문이다.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쓴 정중한 문구는 이 영화의 각본을 쓰고 감독을 맡은 코언 형제감독이 이 범죄물의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것처럼 숙연한 분위기를 감돌게 한다. 당연히 무언가 너무나 끔찍한 살인과 범죄를 예상하고 영화를 따라간다. 그런데 끔찍하기는 하지만 특별히 ‘영화화’할 만큼 경악할 만한 사건은 아니다 싶게 끝난다. 조금은 싱겁다는 느낌이
윤석열 정부의 2기 내각 진용이 윤곽을 드러냈다.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이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자리를 넘겨받는 것을 비롯해 국토교통·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중소벤처기업·국가보훈부 등 6개 부처 장관 후보자들이 4일 지명됐다. 12·4 개각으로 바뀌는 6명의 1기 내각 장관들 모두 내년 4월 총선에 나올 움직임이다. 여당인 국민의힘으로선 경쟁력 있는 인물을 차출하고 싶겠지만, 정부 정책 책임자들이 동시에 썰물처럼 선거판으로 이동하는 모양새는 보기에 좋지 않다. 부처 장·차관이나 대통령 참모 이력이 ‘총선 후보 경력 쌓기용’이냐는 지적을 들을 만도 하다. 여론도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4∼6일 전국 남녀 100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국지표조사(NBS)에서 ‘주요 장관들이 내년 총선에 출마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란 질문에 59.0%가 ‘부정적으로 본다’고 응답했다. ‘긍정적으로 본다’는 응답은 32.0%였다. 게다가 앞선 대통령실 개편과 이번 개각 인선을 보면 기재부 등 관료 출신의 회전문 인사 성격이 짙다. 예상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아 신선함을 주지 못했다. 그나마 개각에서 여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