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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100세 일기] 아버지의 편지 위로 눈물은 떨어지고 ...

올여름은 박완서 선생님의 수필집,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읽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오랜만에 참 좋은 사람을 만난 느낌이, 무더위에 그늘 짙은 나무에 앉은 듯 서늘하였다. 35편의 수필 중에서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라는 글에 연두색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글이 좋아서 읽고 또 읽어보고도 여운이 남아서, 아마도 그 마음을 표시해 놓은 게다.

 

「평범하게 키우고 있다. 공개해서 남에게 도움이 될 만한 애 기르기의 비결 같은 것도 전연 아는 바 없다. 그저 따뜻이 먹이고 입히고, 밤늦도록 과중한 숙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숙제를 좀 덜 해 가고 대신 선생님께 매를 맞는 게 어떻겠느냐고 심히 비교육적이고 주책없는 권고를 하기도 한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장가들자마자 네 계집만 알아, 이 불효막심한 놈아.” 이런 큰소리를 안 쳐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만 아이들을 위하고 사랑하리라는 게 내가 지키고자 하는 절도다. 부모의 보살핌이나 사랑이 결코 무게로 그들에게 느껴지지 않기를. 집이, 부모의 슬하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마음 놓이는 곳이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들은 예쁘다. 특히 내 아이들은, 아이들에게 과도한 욕심을 안 내고 바라볼수록 예쁘다.

제일 예쁜 건 아이들다운 애다. 그다음은 공부 잘하는 애지만 약은 애는 싫다. 차라리 우직하길 바란다. 활발한 건 좋지만 되바라진 애 또한 싫다. 커서 만일 부자가 되더라도 자기가 속한 사회의 일반적인 수준에 자기 생활을 조화시킬 양식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부자가 못 되더라도 검소한 생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되 인색하지 않기를. 아는 것이 많되 아는 것이 코끝에 걸려 있지 않고 내부에 안정되어 있기를. 무던하기를. 멋쟁이이기를.」

 

박 선생님의 자식 사랑에 고개가 끄덕여지면서 가슴으로 따뜻한 기운이 스며든다. 동시에 2남7녀를 학교 마당에 보내시려고 20년 이상을 학부모로 살아가신 우리 부모님. 고등학교까지 보내려면 적어도 큰 딸부터 막내 아들까지 20년은 걸렸을 텐데.... 강산이 두 번 바뀔 만큼 긴 시간 동안, 그 밑빠진 독처럼 하염없는 등록금 대기에 허리가 휘어지고 어깨가 빠져들고 손발이 닳으셨을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그 시절의 부모님 마음, 그 형편을 상상해 본다. 중간에는 너무도 힘들어서 셋째 딸을 고등학교 대신에 서울에 보내서, 먼저 올라간 큰딸에게 취직자리를 부탁하였으니, 그때 그 마음은 얼마나 저리셨을까? 나중에는 그 딸을 포함해서 한 해에 7명이 학생이던 때(대학생 1, 고등학생 2, 중학생 2, 초등학생 2)를 버텨내셨다.

 

밤에도 달이 밝으면 그 빛을 받아서 허옇게 드러난 고구마 말린 것(절간)을 줍고, 한라산에 올라가서 마소의 꼴(촐)을 장만하는 늦가을에는 아예 한라산 중산간에서 2박3일 동안 야행을 하시면서 노동 생산성을 높이셨다. 그때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그토록 노동에 여념이 없으시던 시절을 지나, 미국으로 이민 간 장남이 ‘주경야독을 해보겠으니, 어린 두 아이를 몇 년만 맡아주십사’는 요청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홀연히 미국으로 떠나신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하셨는지...

 

다음은 미국에 도착하셔서 보내주신 첫번째 편지다.(이 제이누리에 글을 쓰면서 인용하다 남겨진 마지막 편지인데, 어쩌면 이게 아끼고 미루어지다가 마지막에 남겨진 듯 하다).

 

‘정옥이 앞

그동안 병원에나 아니 갔다 왔는지 마음이 놓이지 아니하는구나. 우리는 하나님 은혜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서 무사히 미국까지 왔다. 지난 일을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 필설로 다 할 수가 없구나. 부산서도 비행기표를 앞당기는 과정, 또 정희를 만나는 과정, 미 대사관에서 이루어진 일, 용익이 만나는 일과 뉴욕행 비행기에서도 엄마 옆에 대구 아가씨-네 또래(27세)인데 뉴욕에서 한 3년 있다가 시집가려고 고향에 왔다가 신랑이 마음에 없어서 그저 간다던 교포-와 16시간 동안 대화하며 동행하니 지루한 줄 모르고 왔다. 오는 도중 알라스카에 7시간 반 만에 도착해서 1시간 쉬고 다시 8 시간을 비행해서 뉴욕에 안착하니, 미국 사람들은 박수를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무표정하게 앉았다 일어서서 내리더라. 여기서부터 우리나라 사람과 미국 사람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항에 내려보니 오빠가 나오지 않아서 동서남북도 모르고 전화를 하려 해도 도무지 어떻게 하는지를 몰라, 하는 수 없이 편지봉투를 들고 흑인과 수화로 전화를 부탁하는데, 화장실로 급히 가던 사람이 ‘잠깐 기다리시오. 내가 와서 가르쳐 주겠다’더니, 금방 돌아와서는 전화를 걸어주더라. “여보시오, 나는 동아일보 취재기자인데, 여기 공항에 고향에서 아버님이 왔어요. 바꿔드릴게요” 하면서 수화기를 주는 거야. 전화를 받으니 영준 엄마가 “아버님이세요? 아범이 6시경 그리로 갔어요. 한 시간만 대합실에 앉아서 좀 기다리세요”라고 하더라. 한 30분 기다리니 오빠가 와서 반갑게 만나 집에 오니, 여기 시계로 오전 6시였다. 그리고 너한테 전화한 시간이 오전 7시야. 한참 쉬고 오후 1시 반에 예배당에 가서 2시 정각부터 예배드리고 그럭저럭 집에 오니 저녁 6시가 되었다.

이렇게 첫날을 보내고 다음 날부터는 어린 영준이와 제인이가 너무나 착하고 얌전해서 잘 따르니, 별 불편이 없는 것 같구나. 오빠는 아침 7시에 학원 갔다가 12시에 와서 점심하고 회사에 또 갔다가 저녁 8∼9시에 오는데, 올케는 오후 2시 반부터 출근하면 밤 12시 돼서야 집에 온다. 올케는 특수한 직업(간호사)이라서 주일날(일요일)에도 나가게 된단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는구나. 우리는 어린것들이 한국말을 참 잘해서 말벗이 되니 다행이다. 제인이는 9월로 두 돌이 지났다는데 제법 말을 잘한다. 영준이는 미국 사람을 대하면 영어로 대화하니, 영어가 그리 어렵지 않은가 보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할 수가 없구나. 그건 그렇고, 네 입장을 말해야 하겠다. 너도 여기 오면 보통 사람보다 월급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거야. 은행원 자격만 가지면 올케(간호사) 못지않게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구나(그 당시 나는 주택은행에 다니고 있었다). 우리가 영주권 나오려면 2∼3 개월이면 된다는데, 그때 네가 이리로 오겠다면 초청할게. 만일 오게 되면 운전면허 취득하고 와야 한다. 여기는 버스란 직장 버스와 학교 버스밖에 없고, 택시도 잘 안 보이는구나. 그리 알고 기도하며 몸조심하고 건강에 유의하여라. 우리들은 고국에 있을 때보다 기도하는 시간이 더 있단다. 노동을 아니 하니 잠도 별로 많지 않아서 기도하게 된다. 앞으로 종종 연락하며 살자. 우리 하나님께서 네 앞일도 계획하고 계실 터이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기도하며 살기 바란다. 이번에 우리를 위해 네가 많은 돈을 마련해주어서 참 고맙게 여겨지는구나.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줄 믿고 기도한다. 틈 생기면 회답 바란다. 그럼, 오늘은 이만 쓴다. 안녕. 1987년 11월 16일, 父 書’

 

아버지께서 미국에서 사신 22년 동안 나에게 보내주신 50여통의 편지 중에서 맨 끝에 남아 있는 게 첫번째 편지라니... 이 묘한 하나님의 섭리에 가슴 속으로부터 울컥하는 그리움이 밀려든다.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

 

첫 해 1년 동안 오빠네 집에서 손자와 손녀를 돌보시다가,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랐다 생각되시자 독립하셔서 볼티모어 다운타운으로 이사를 나오신 게 63세 어간이다. 아버지는 종각식당과 서울떡집이 있는 교포 소유의 건물에 세를 들어 사시면서, 아름아름 교포가 운영하는 군복공장 일자리를 얻으셨다. 

 

아버지는 다운타운에 버려진 1불짜리 건물이 아까워서 몇 번이나 돌아보고 만져보고 살펴보시곤 하셨다. ‘조금만 젊었을 때 왔더라면 저런 건물 하나를 깨끗이 고쳐서 근사한 건물로 만들 수 있었을텐데...’하며 아쉬움을 토하시던 아버지. 건물을 올려다보고 현관을 만져보고 벽도 두드려보시고선 뒤돌아서던 아버지의 풀죽은 어깨가 얼마나 쓸쓸해 보이던지.... 아버지 몰래 그 건물을 둘러보면서, 나는 생애 처음으로 ‘내가 남자였으면...’ 하는 바람으로 하늘을 우러러보았던 듯 하다.

 

그 당시 아버지는 교포가 운영하는 청소사업장에 나가셨는데, 주로 야간에 하는 일이었다. 이따금 쓰다 남은 두루마리 휴지를 가져오시곤 하셨다. ‘이렇게 멀쩡한 것을 버리고 새것으로 갈아놓으라니..., 미국이 부자이긴 한가 보다. 아깝기도 하지만 그냥 버리기가 미안해서 가져왔다.’ 하시면서 말끝을 맺지 못하시는 아버지의 얼굴에도 사명을 다하지 못한 휴지의 아쉬움 같은 게 어른거렸다.

 

다행히 나보다 조금 늦게 미국으로 이민해 들어온 남동생이 자동차 엔진 기술이 있어서 나중에 제법 규모가 있는 자동차정비소를 차리고 현지인들을 종업원으로 채용해서 코리안 드림을 이루었으니.... 아버지의 미국행에 다소 보람이 깃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매달마다 지급되는 노인연금을 받으면서, 그 감사함과 염치없음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던 아버지. ‘이 무력하고 무용한 노인에게 생활비를 보내주는 미국은 어떤 나라입니까. 제가 갚을 수 없는 이 은혜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대신 갚아주소서. 이 나라를 위해 우리 자녀들이 헌신할 수 있도록 든든하게 키워주시고, 요셉처럼 꿈을 꾸게 하시고, 코리안드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해주소서.’라는 아버지의 기도는 지금도 내 가슴 깊은 곳에 남아서 이따금 염원으로 꿈틀거린다.

 

지난번에도 언급했지만, 이민국에서 통지해 준 영주권을 찾아보기는커녕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지하고 용감하게 한국으로 돌아와 버린 나는 이제 와서 다시금 생각해본다. ‘그까짓 50불을 지불하고서 내 영주권이 어떻게 생겼나 한 번 쳐다보기라도 할 걸...’.

 

박완서 선생님의 사랑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다만 깊이 사랑하는 모자 모녀끼리의 눈치로, 어느날 내가 문득 길에서 어느 여인이 안고 가는 들국화 비슷한 홑겹의 가련한 보랏빛 국화를 속으로 몹시 탐내다가 집으로 돌아와 본즉 바로 내 딸이 엄마를 드리고파 샀다면서 똑같은 꽃을 내 방에 꽂아놓고 나를 기다려주었듯이, 그런 신비한 소망의 닮음, 소망의 냄새 맡기로 내 애들이 그렇게 자라주기를 바랄 뿐이다’

 

다행히 내게도 102세 어머니가 계시고, 오늘처럼 태풍이 몰려올 거란 예보에도 흔들림 없이, 콩이 담겨 있는 그릇에서 오직 알알이 알찬 팥을 골라서 ‘저녁밥을 짓자’고 하신다. 오늘 저녁 식탁에서는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보리라. 어머니가 울지 않으실 만큼만 아버지의 이름을 자주 부르고자. 아, 그리운 우리 아버지, 허태행 장로님의 오직 한 사람, 사랑하는 김성춘 어머니가 그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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