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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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학자 왕국유(王國維)는 “무릇 시대마다 그 시대의 문학이 있었다. 초(楚)에는 이소(離騷)가 있었고 한(漢)은 부(賦)가 있었으며 육대(六代)는 병문(騈文), 당(唐)은 시(詩), 송(宋)은 사(詞), 원(元)은 곡(曲)으로 모두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이다. 후대에 그것들을 이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원곡(元曲)은 잡극(雜劇)과 산곡(散曲, 소령小令) 두 부류를 포괄한다. 560여 작품에 200여 명의 작가(종사성鍾嗣成의 『녹귀부(錄鬼簿)』)가 있을 정도로 내용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원 잡극 작가인 관한경(關漢卿)을 사마천(司馬遷)과 나란히 놓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서도 원곡을 연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저 왕국유의 『송원희곡사(宋元戱曲史)』가 발표되고 나서야 연구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원곡은 원대 가장 뛰어난 문학”이라 평가하며 “원대 문학의 대표”라 칭송한다.
그렇다. 원대는 ‘중국 희곡’ 발전에 있어 최전성기였다. 그렇다면 원대 잡극은 어째서 그렇게 발달했는가?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 명대 장진숙(臧晉叔), 심덕부(沈德符)의 설로, 원 왕조는 극본(劇本)으로 관리를 뽑았고 극의 창작으로 관리의 우열을 정했기 때문에 원곡이 특히 성행했다고 본다. 둘째, 원대의 통치자는 몽골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한족의 우아한(?) 문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작가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과 영합하기 위해 곡을 창작하면서 잡극이 크게 성행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해 정진탁(鄭振鐸)은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평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 원곡의 발달은 먼저 금대(金代)의 ‘원본(院本)’의 기초에 연해서 더 크게 발달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 원대에는 과거를 개최하지 않았다. 문인 학사들이 자신들의 재학을 펼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유행하던 잡극을 가지고 자신의 재능을 시험해 볼 요량으로 창작했다. 그들은 통치 계층에 있던 몽골 민족에게 평가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시야를 민중에게 돌려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이것이 극본 제재가 대부분 민중 심리와 풍습에 영합하는 이유이다.
셋째, 소수민족인 몽골 통치자들의 억압이 너무 심했고 한족의 지위는 최하층이 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재능을 발전시킬 기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그들은 오락 쪽으로 눈을 돌렸다. 눈과 귀의 즐거움으로 위안을 삼은 셈이다. 희곡 창작으로 작가는 자신의 비분을 쏟아냈고 청자는 그것으로 자신의 고통을 잊었다. 이 평가는 맞다.
이런 점 이외에 원대 몽골 제국이 건립되면서 동서양의 교통이 발달하게 됐고 도시 경제가 발전하게 됐다. 경제가 발전에 따라 여가 시간이 많아졌으며 그에 따라 사람들이 오락거리인 희곡을 즐기게 됐다. 심지어 농민들조차도 도시의 구란(勾欄, 원송 시대 소극장)에서 희극을 감상했다. 두선부(杜善夫)의 『농사꾼은 구란을 모르네(「莊稼不識拘欄」)』라는 곡이 그것을 증명한다.
원 왕조가 건립된 후 몽골족 통치자들은 한족 문화를 적지 않게 받기는 했다. 예를 들어 유병충(劉秉忠)의 건의를 받아들여 『주역』의 “大哉乾元”이란 문장을 따 몽골을 대원(大元)으로 고친 것이나 공자를 존중해 제를 지낸 것이나 유교를 선양해 유가경전을 공부하게 한 것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정주(程朱) 도학(道學)을 제창했고 남송의 명유와 이학가들을 중용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의미에서 몽골 통치자들은 한족을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 것일 뿐 ‘한화(漢化)’를 원하지 않았다. 특히 과거제도를 일시 중지시키기도 했다. 유생들의 관료가 되는 길을 막아버린 셈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조정에는 한족 관료들이 많지 않았다. 몽골인과 색목인(色目人)들의 권익을 보호했던 것이다. 물론 연우(延祐) 2년에 과거제도를 회복시키기는 했으나 구별이 있었다. 몽골인, 색목인의 시제가 한인(漢人), 남인(南人, 남송 출신)과는 달랐다. 시험이 끝난 후 결과를 알리는 방을 붙이는 데도 몽골인과 색목인은 오른쪽에 한인과 남인은 왼쪽에 붙였다. 진사가 됐어도 몽골인 진사는 색목인 보다 한 등급이 높았고 색목인도 한인이나 남인보다도 한 등급 높았다.
이런 제도 아래서 한인과 남인이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는 것은 실로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죽은 백이, 숙제, 굴원, 두보는 공작에 봉해졌지만 살아있는 유생들은 조그만 현의 관리 자리도 얻기 어려웠다. 청대 모기령(毛奇齡)이 그런 사실을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재인들이 관직에 오르지 못할 때 억압된 자신을 왕왕 ‘북’을 빌리거나 ‘조소’로 마음을 풀었다.”
관리가 되는 길이 막힌 지식인들은 낙담한 심정을 산곡[소령]을 쓰거나 잡극을 창작하며 풀었다. 그러면서 자신도 잠시나마 즐거움을 만끽하기도 했다. 그렇게 당시 사회의 요구에 부응했던 것이다. 유생이나 지식인들이 처한 상황이 그러하니 후세 사람들을 원대에 “팔창구유십개(八娼九儒十丐)”라는 말이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무슨 말인가? 원대 몽골 통치자들은 사람을 10등급으로 나누었는데 8등급은 창기요, 9등급은 유생이고 10등급이 거지라는 말이다. 결국 유생, 즉 지식인들은 창기보다도 못한 존재였다는 의미인 것이다. 지식인들을 비아냥거리는 ‘취노구(臭老九, 썩어빠진 지식인)’도 이 말에서 유래했다 그러고.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원 왕조 몽골 통치자들도 그렇게 직분을 나누지 않았다. 범문란(范文瀾)의 연구에 따르면 10급(一官,二吏,三僧,四道,五醫,六工,七獵,八民,九儒,十丐)이 있었다는 설은 남송 유민(遺民) 정사초(鄭思肖)가 얘기했고 “八娼九儒十丐”는 사방득(謝枋得)의 관점이다. 그들은 왜 이렇게 얘기했을까?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송(宋)나라 말기에 유생들은 연달아 원나라에 항복했다. 야비하다 싶을 정도로 염치를 몰랐다. 그들의 행위는 거지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민간에는 구유십개(九儒十丐)라는 말이 떠돌았다. 원나라 사람들이 공자를 존중한 이상 공자를 받들어 모시는 유생들을 서민이나 창기의 아래로 취급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단지 “한인 남인이 관리가 되는 이익을 나눠가지려 했던 행태를 배척했던 것”일 따름이다.
원 잡극이 발달한 원인에는 사람들이 주의를 하지 못하고 있는 점도 있다. 명 왕조 주권(朱權, 명 개국황제 주원장의 열일곱 번째 아들)이 말한 “不諱(불휘, 숨기지 않음)體”에 있었다. “자구에 어떤 기탄도 없었다”는 점이다. 현대인들처럼 숨김없이 거리낌 없이 모두 얘기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원 왕조는 명이나 청 왕조처럼 그렇게 문자옥(文字獄)을 자행하지 않았다. 글자나 행간에 조정을 반대하는 뜻을 억지로 찾아 죄를 묻는 행위는 없었다. 어떤 금지 조항도 없었다. 그래서 잡극의 작가들이 대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표현 내용이 광범위했고 언어도 진실 됐으며 일상적 감정을 전부 토로할 수 있었다.
먼저 원 잡극의 내용을 살펴보자. 명나라 사람들의 통계에 따르면 원 말기 명초에 500여 종의 잡극이 있었다. 현대 학자들의 연구 분석에 따르면 그 수는 원 잡극 작품의 1/4 정도였다. 제재를 보면 포공희(包公戱, 포청천包靑天 이야기)가 있었다. 『포대제지잠생금각(包待制智賺生金閣)』 등이 그것이다. 탐관오리의 악행으로 인해 백성들의 고통을 표현하기도 했다. 『두아원(竇娥寃)』이 그것이다. 양산박(梁山泊) 영웅호걸을 노래한 작품도 있다. 『흑선풍(黑旋風)』『쟁보은(爭報恩)』이 그것이다. 봉건제도에 굴복하지 않고 자유결혼을 쟁취하는 작품으로는 『서상기(西廂記)』『원앙피(鴛鴦被)』가 있다.
흐리멍덩한 제왕을 묘사한 작품으로는 『오동우(梧桐雨)』『한궁추(漢宮秋)』가 있고 신화 전설을 묘사한 작품으로는 『장생자해(張生煮海)』『야원청경(野猿聽經)』이 있다. 역사의 진실을 그대로 극의 무대로 옮겨 온 작품으로는 『마릉도(馬陵道)』『단도회(單刀會)』『연환계(連環計)』가 있다. 특히 원 잡극에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이 다수 있는데 『구풍진(救風塵)』『망강정(望江亭)』『호접몽(胡蝶夢)』『조풍월(調風月)』『배월정(拜月亭)』 등이 그것이다.
원 잡극의 또 다른 특징은 “민간의 질박한 풍격과 문인들의 우아한 문필이 어우러져 있다”는 점이다. 문사가 자연스럽고 진실 되며 물과 같아 숨김이 없다.
공칭순(孔稱純)은 다음과 같이 『장공목지감마합라(張孔目智勘魔合羅)』극을 평가했다 : 사랑의 감정을 전하고 풍경을 묘사하고 서사하는 하나하나가 어우러져 있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사랑의 감정을 전하고 풍경을 묘사하는 것은 그나마 쉬울 수 있으나 서사 중에 정경(情景, 작자의 감정과 묘사된 경치)을 그려내는 것은 고수가 아니면 능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극을 읽으면 이 이치를 자연스레 알 수 있다.
청대 초순(焦循)은 또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원곡이 훌륭한 점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해서 자연스러움에 있다. 흉중의 감상과 시대의 상황을 묘사하면서 진실 된 이치와 걸출한 기운, 시류가 그 사이에 녹아있다. 그렇기에 원곡은 중국에서 가장 자연스런 문학이라 할 것이다.
왕국유(王國維)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원곡이 뛰어난 점은 감정을 토로하는 데에는 마음 깊이 스며들어 감동을 자아내다 정경을 묘사함에 있어서는 눈에 쏙 들어오게 하며 사실을 서술하면 입에서 나오듯 자연스럽다.
원극의 번역본들이 많다. 기회가 생기면 한 번 읽어보시라. 얼마나 자연스럽고 감동적인지. 문학은 인생이기에.<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