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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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택단(張擇端), 생졸 년대 미상, 북송(北宋) 때 화가로 불세출의 명작 「청명상하도」를 그렸다. 한림학사로 있었으며 계화(界畵 : 기화起畵)에 능해 주거(舟車), 시교(市橋), 성곽과 길거리 등을 교묘할 정도로 잘 그린 화가다. 청명절(淸明節)에 흥청거리는 도성의 인파를 두루마리(화권畵卷)형식으로 그린 것이 「청명상하도」다.
수도 변경(汴京)을 흐르는 변하(汴河)를 사이에 두고 교외 시내의 배다리, 성문, 시가 등이 순서대로 보이게 했으며 술집, 상점, 노점, 상인, 우마차 및 군중 등이 배치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원근법을 이용해 사진처럼 정확하고 사실적인 풍경을 재현해냈다. 중국 풍속화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그림은 송의 인물풍정과 사회 번영을 사실주의 화풍으로 그려냈다. 당시 및 후세에도 많은 영향을 미쳐 원(元) 명(明) 청(淸)을 거쳐 수많은 모본(模本)이 성행했다.
「청명상하도」는 고궁박물원에 소장하고 있는 여러 작품 중에서도 걸작으로 꼽힌다. 앞서 말했듯이 송나라 장택단의 창작물이다.
두루마리 그림을 펼치면 시선은 넓은 강을 따라 화면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강이 당시 변량(汴梁)을 위해 조운(漕運)해 도시에 생활필수품을 조달하던 변하(汴河)다. 강에는 왔다 갔다 하는 배들로 넘쳐났었다. 강기슭에는 곡식 저장 창고가 즐비했다. 기슭에 댄 선박은 발판을 건너며 화물을 싣고 있다. 화가는 변하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현상을 예리한 눈빛으로 주시하며 사실적 화필로 그런 장면을 진실 되게 묘사했다.
화물을 가득 실은 선박의 흘수선(吃水線)이 깊어 수면은 거의 뱃전에 다다랐다. 화물을 다 부린 선박의 흘수선은 당연히 얕을 것이고. 이러한 세밀한 부분까지 화가는 포착해 화면에 표현하면서 풍부한 내용을 담아내고 있다. 생동감이 있다. 그야말로 사진처럼 진실감이 넘쳐난다.
화가는 꼼꼼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북송 변량 성도의 성문과 거리, 문밖 변하 주변의 번화한 경물을 충실하면서도 빈틈없이 묘사했다. 화면에는 시가에 각종 상업, 수공업, 강기슭의 조운 활동, 여러 부류 사람들이 유람하는 장면을 그려 넣었다. 주루, 약포 등 대형 점포 이외에 향촉 점포, 화살 점포, 그리고 사거리에 있는 술집, 찻집, 문 앞에 걸려 있는 ‘解(해)’자 간판의 전당포, 수레바퀴를 만드는 목수, 칼과 가위를 파는 대장장이, 꽃을 파는 사람, 점을 치는 사람, 그리고 각종 노점상 등 하나하나 확실히 드러나게 그려냈다.
거리에서 움직이는 사람들과 말을 탄 관원 앞에 서있는 사람은 소리쳐 길을 열고 뒷사람은 에워싸 호위하며 군중 사이를 뚫고 나가는 모습도 생생하다. 부녀자들이 교자에 앉아 있는 모습도 확연하다. 왁자지껄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 짐을 메고 가는 사람, 수레를 끌고 가는 사람이 있고 수레의 모양도 같은 모양이 없다. 강에는 배를 모는 사람이 있고 거리 구경하는 사람도 있으며 문전에 기대어 구경하는 사람도 있다.
오가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한 광경을 화가는 조리 있게 구성해 복잡하나 어지럽지 않게 사람을 황홀경에 빠지게 하고 고도의 풍모를 눈앞에 펼쳐 놓았다. 구도로 볼 때 종합적이면서 나뉘어 있고 주가 되는 게 있는 반면 버금가는 것도 표현했으며 세밀한 부분도 있고 조악한 부분도 있으며 빠듯한 부분도 느슨한 부분도 있다. 교외, 물길, 도시를 중심으로 단계적으로 펼쳐 놓았다.
교외는 도입부라 비교적 간략하다. 강기슭으로 들어서면 화물 운송 선박을 힘차게 묘사하고 곧이어 아치형 다리에 다다르면 첫 번째 정점을 이룬다. 다리 위아래, 선박의 주변에서 사람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시끌벅적 요란스럽고 무척 역동적이다. 이곳을 지나면 점차 소원해지며 가장 중요한 중심 단락이 끝이 난다. 주루와 다리에서부터 큰 거리를 따라 곧장 도심과 이어진다. 각종 수레, 점포, 그리고 각인각색. 한 걸음 나가면 한 중심에 이르고 연이어 계속해서 중심지가 나타나면서 제2의 정점을 이룬다. 도심을 지나 두 번째 거리에 들어서면 화면이 끝을 이루고.
화면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이 변하를 건너는 나무로 만들어진 아치형 다리다. 이 색다른 다리는 송대 맹원로(孟元老)가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서 “그 다리는 기둥 없이 커다란 나무로 가설했다. 색칠해 장식했기에 무기개가 펼쳐진 것 같다”고 기록했다. 당시 변량에는 비슷한 다리인 홍교(虹橋), 상토교(上土橋), 하토교가 있었다. 이 다리의 가장 큰 특색은 기둥을 설치하지 않고 커다란 목재를 사용해 아치형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리의 길이가 길었고 다리밑 공간이 넓어 선박 통행에 편리했다. 그 다리 건축법은 실전됐다. 현재 우리는 화면에 묘사된 도면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당시 건축 방면에 기술이 상당했음을 능히 감득할 수 있다.
화가는 다리를 중심에 놓고 묘사하면서 자신의 회화 재능을 충분히 표출해 냈다. 다리 위아래 장면과 인물 활동을 파노라마식으로 펼쳐 놓았다. 가장 뛰어난 부분은 다리 아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목선 한 척이다.
강의 수면이 비교적 좁은 물길로 물살이 급하다. 배 위의 선원들도 위험을 감지한 듯 배 갑판과 배의 덮개 위에서 긴장해 바삐 움직이며 소리를 지르고 있다. 아치형 다리 아래에는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배가 다리에 부딪치지 못하도록 장대를 들어 돕고 있다. 다리 건너편 기슭에는 급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를 당기는 일군의 사람들이 줄다리기 하듯 힘쓰고 있다. 이쪽 다리에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름대로 도움을 주고자 손을 휘두르며 소리치는 듯한 인물도 있고. 화면에 인물들은 한 치쯤밖에 되지 않지만 표정과 몸가짐을 다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생동감이 넘친다.
다리 위에는 많은 노점상들이 줄지어 있다. 앞 다퉈 고객을 부르면서 다리 통행로를 막아서기라도 하듯 떠들썩하다. 화가는 사소한 부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다리 어귀 양쪽에 노점이 차려져 있다. 한 명의 고객이 다리로 걸어 들어오자 두 명의 노점상이 동시에 손을 뻗어 부르면서 자신이 펼쳐 놓은 물건을 고르라고 호객하고 있다. 손님의 몸은 오른쪽을 향하고 있으나 머리는 오히려 왼쪽을 보면서 어디로 갈지 망설이는 모습이다. 줄지어 서있는 상점에서 물건을 고를 때 누구나 그렇듯이 주저주저하는 모양을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망설여지는 화면상의 인물이 자신인 듯 웃음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이렇듯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 묘사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생기 넘치는 이 풍속도가 청명절에 성 밖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묘사한 것이라 여기고 있다. 화면을 보면 청명절의 풍속이 분명히 엿보이기는 한다. 예를 들어 성묘라든지 친척 방문, 가마에 버들가지를 꽂은 것이라든지 점포에 ‘彩樓歡門(채루환문, 송대에 유행했던 주점이나 음식점의 장식 형태)’ 등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청명상하도」 중의 ‘청명(淸明)’이 가리키는 것이 ‘청명시절’일까? 세심하게 살펴 볼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는 화면에서 묘사된 경물 중에 청명절 풍속과 다른 부분이 많다는 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화면에 보이는 농가의 울타리에 자라난 가지, 조태승(趙太丞) 집 문 앞에 가지가 무성한 버드나무 등은 청명절과는 무관한 것들이다. 그리고 화면에 부채를 들고 있는 인물들이 적지 않다. 송나라 때에는 상층 계급이 부채를 들고 ‘얼굴을 가리는 것’ 이외에 일반 백성들은 여름철에 더위를 쫓거나 모기를 쫓기 위해 사용했을 뿐이다. 화면이 청명절의 장면을 그린 것이라면 부채를 소지할 필요성이 그리 많지 않다. 밀짚모자나 죽립이 화면에는 자주 나타난다. 밀짚모자나 죽립은 더위를 피하거나 비를 피하기 위한 물건들인데 그림에는 비가 내리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해를 가리기 위한 용도라는 말인데 청명절 때 햇빛이 여름처럼 그렇게 강렬하지는 않다. 그리고 화면의 경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수박을 쪼개어 팔고 있는 노점상도 보이고 웃통을 벗고 길거리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도 보이는데 이 또한 청명절 때의 특징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에서 ‘청명’은 다른 뜻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명(明)대 동기창(董其昌)은 『용대문집(容臺文集)』에서 장택단이 「청명하상도」를 그린 것은 “남송(南宋) 때 변경의 경물을 추억해 그린 것으로 서방미인(西方美人, 완적[阮籍]의 ‘西方有佳人’과 같은 의미로 몽환 속의 아름다운 여인을 본 것과 같은 환상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을 그리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했다. 무슨 뜻인가?
‘정강지변(靖康之變)’ 이후 화가 장택단은 왕조를 따라 남송으로 내려갔다. 북송 시절의 고향을 생각하니 국가 패망의 원한만 쌓일 뿐이다. 이때 고국의 풍물을 그리워하며 깊고 깊은 슬픔을 기탁했다고 본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청명’이라는 것은 ‘청명 시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옛 도읍지 변량을 회상하며 추억을 화면에 옮긴 것이 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