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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24)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송(宋) 고종(高宗 1107-1187) 조구(趙構), 자는 덕기(德基), 휘종(徽宗)의 아홉 번째 아들이다. 정강(靖康) 원년 병마대원수를 명받았고 이듬해 남경(南京)에서 황제라 칭하며 임안(臨安, 현 항주杭州)에 도읍을 정했는데 역사에서는 남송(南宋)이라 부른다. 재위 기간 동안 금(金)나라와 강화해 국토를 할양해주고 신하가 됐으며 진공했다. 금나라와 항거하던 장수 악비(岳飛)를 참살했다. 소흥(紹興) 32년에 퇴위해 태상황이 됐다. 구차하게 일시적 안일을 탐하며 살았고 중원을 잃고 일각에 치우치면서 남송 판도가 나날이 줄어들었다.

 

1142년 금나라와 항쟁하던 일대의 명장 악비가 풍파정(風波亭)에서 무고한 죽임을 당했다. 누가 악비를 죽였는가 물으면 중국의 어린 학생들조차 간신 진회(秦檜)가 죽였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진회를 제외하고 악비를 제거하면 좋을 사람이 달리 없었을까? 악비가 죽임을 당한 모든 과정을 분석해 보자.

 

 

 

 

‘정강의 변(靖康之變)’ 이후 장강 이북의 중원은 기본적으로 빼앗긴 상태가 됐다. 그러나 동남쪽의 항주에는 남송이라는 작은 정부가 존재하고 있었다. 1134∼1136년 남송의 국세는 악비, 한세충(韓世忠) 등 명장의 보호아래 점차 강성해지고 있었다. 이때 금나라는 계속 전쟁을 벌였고 통치 그룹 내부에 정치 투쟁이 격화돼 정국이 흔들리면서 대규모로 남침할 여력이 없었다. 그때가 바로 국토를 회복할 수 있는 호기였으나 일국의 국왕인 고종은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려는 뜻이 없었다. 오히려 고토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방해했다. 어찌된 일인가?

 

원래 송 고종 조구는 황위에 오른 후 모종의 응어리가 줄곧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것은 잡혀간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돌아오면 자신은 황제가 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조구는 수도를 건강(建康)에서 양주(揚州)로 다시 임안(臨安)으로 옮겨가면서 상갓집 개처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임안에 당도했을 때도 마치 엊그제 놀란 것처럼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다.

 

작은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승기를 이용해 금나라를 쫓아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승리의 결과를 이용해 금나라와 협상을 벌일 생각에만 골똘했다. 그래서 그는 중원을 금나라에 넘겨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자를 파견해 흥정하듯이 토지를 할양할 뜻을 비치며 강화를 구걸했다. 송 고종은 강화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여겨 금나라와 애매한 관계를 맺고 있는 진회를 기용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고종과 진회의 강화를 맺으려는 바람은 일방적인 소망일 따름이었다. 주전파가 당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전파들은 남송에서 금나라에 파견한 사자를 구류해 버리기도 했다. 금나라 군대가 남송을 침략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러자 고종과 진회는 자기가 자기의 뺨을 때려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종은 어쩔 수 없이 1136년 6월에 진회를 재상에서 파면시키고 자신은 처음부터 진회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진회를 다시는 중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게 고종의 결국 차를 버리고 장을 지키는 계책으로 여론의 불만을 잠재웠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듬해 정월에 금나라로 떠났던 사자가 돌아오면서 금나라 정권을 장악한 주화파의 소식을 알려 왔다. 그렇게 하면서 고종은 강화의 희망을 다시 품게 된다.

 

 

 

 

고종은 자신의 말을 바꿔 진회를 추밀사(樞密使)에 중용한다. 추밀사란 최고의 군사 총치권자를 말한다. 그해 말, 금나라 내부의 주화파 수장은 고종에게 밀서를 보내 휘종의 영구와 황태후, 하남 제주(諸州)를 반환할 의향을 내비쳤다. 고종은 뜻밖의 성과에 기뻤다. 금나라와 강화할 결심을 더욱 굳혔다. 강화를 위해서는 금나라와 특수한 관계를 맺고 있는 진회를 믿고 신뢰하는 것은 당연했다. 진회는 고종에게 “폐하께서 강화를 생각하신다면 신과 단독으로 상의하시면 됩니다. 여러 신하들이 간섭하지 못하게만 한다면 일이 순조롭게 풀릴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1138년 3월 진회는 재상 겸 추밀사에 임명됐고 군정 대권 모두 그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진회가 재상이 되면서 투항을 주장하는 그룹들이 남송 조정의 주도세력이 됐고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금나라에 항전하는 일은 곡절을 겪기 시작한다. 조정에는 많은 대신들이 강화를 반대했지만 고종은 어떻게 해서든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1139년 원단, 남송 조정은 금나라와 강화할 것이라고 정식으로 선포한다. 송 황제는 금나라 황제에게 신하를 자청했고 매년 금나라에 은 25만 량, 견 25만 필을 조공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것은 굴욕적인 조약이었다. 송 고종은 치욕으로 여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럴듯하다고 스스로 만족해 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벌의 의지를 꺾지 않던 악비는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강화를 반대한다. 그리고 중원으로 출병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 상소는 황제에겐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고종의 의심과 시기만 살뿐이었다. 송과 금이 강화를 성공한 후에도 악비는 상소를 올려 하북, 하남, 연경 등지를 회복해 설욕할 것을 요구했다. 이번 상소는 널리 전파돼 용기를 북돋우는 격문이 됐다.

 

고종은 악비와 한세충 등 주전파의 장수들을 구슬리기 위해 강화에 동의한다면 높은 벼슬을 내리겠다고 했다. 그러나 악비는 네 차례나 상소를 올려 결코 받지 않을 것이라 사양했다. 더나가 자신의 이번 거동이 자기도 속이고 남도 속이는 고종에게 경종을 울려 예측할 수 없는 풍운을 방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과연 악비가 예측한대로 상황은 흘러갔다. 조약서의 먹물이 마르기도 전, 이듬해 여름에 금나라 주전파들이 조정을 장악한 후 즉시 조약을 파기하고 대규모로 남침을 시작했다. 대군이 국경을 넘보자 고종은 어쩔 수 없이 응전할 것을 명령했다.

 

당시 악비가 항전의 기치를 높이 들자 금나라 병마에 유린당해 도탄에 빠져 신음하던 중원의 백성들은 용감무쌍한 악가군(岳家軍)이 도강해 북상하기를 갈망했다. 1140년 6월 악비는 덕안부(德安府)에서 거병해 북벌을 시작했다. 먼저 채주(蔡州), 영창(潁昌), 회녕(淮寧), 정주(鄭州), 낙양(洛陽)을 수복했다. 그리고 항전 의용군 수장 양흥(梁興) 등을 태행산(太行山)으로 보내 각지의 의용군을 이끌고 금나라 군사의 후방에서 전투를 전개하라고 했다.

 

악비 자신은 경기병을 이끌고 언성(郾城)에 주둔하면서 대군을 금나라 군대의 중원 전략 요충지인 개봉(開封)을 향해 진격케 했다. 오래지 않아 쌍방은 언성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악비는 앞장서서 적장의 목을 베었다. 언성 전투에서 남송은 대승을 거뒀다. 어쩔 수 없이 당한 금나라 군대는 “강산을 뒤흔들기는 쉬워도 악가군을 뒤흔들기는 어렵구나!” 탄식했다고 한다.

 

득의양양한 악비는 주선진(朱仙鎭)으로 진군하기로 결정했다. 머지않아 고도 회복이 실현되는 듯 보였다. 강산 회복이 가까웠음을 느낀 악비는 격동해 눈물을 흘렸다. 고생을 하다 보니 이런 날도 오게 됐음을 생각하니 자연스레 감격하게 된 것일 터이다. 가슴속에 의기로 가득 차 있던 악비는 부하에게 “황룡부(黃龍府)에 다다르면 그대와 통음할 것이다!”라고까지 했다.

 

악가군이 주선진으로 진군하는 것과 동시에 항주의 봉황산(鳳凰山) 궁정으로부터 연거푸 철군을 명령하는 ‘십이도금패(十二道金牌)’가 날아들었다. 악가군은 즉각 철군하여 조정으로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붉은 색 바탕에 금색 글씨로 된 목패는 송 고종이 친히 서명해 발급한 것이었다. 주마가편 식으로 나는 듯한 속도로 악비의 손에 전달됐다. ‘십이도금패’를 받아든 악비는 하늘을 우러르며 “십년의 공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구나!”라고 길게 탄식했다. 악가군이 철군하면서 이미 수복한 고토는 또다시 금나라 수중에 떨어졌다.

 

 

 

 

만약 금패가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만약 악가군이 철군하지 않았으면? 어쩌면 역사를 다시 쓰게 됐을지도 모른다. 금나라 사람들 스스로 “악비가 죽지 않았다면 금나라는 멸망했을 것이다!”라고 한 것처럼 되지는 않았을까.

 

이듬해 4월 악비는 도성 임안에 있었다. 주전파 장수 한세충과 장준(張俊)과 같이 군사 통수권을 박탈당했다. 그해 7월 금나라 완안종필(完顔宗弼)이 진회에게 서신을 보내 “그대는 조석으로 화친을 청하나 악비는 장강 이북을 도모하려 한다. 악비를 죽여야만 화친할 수 있다”고 했다. 진회는 주전파에서 가장 힘이 있는 악비가 죽지 않고는 강화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언젠가는 연루돼 화를 입을 수 있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중승(中丞) 하주(何鑄)에게 사주해 악비를 모함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9월 왕준(王俊)이 진회의 뜻을 받들어 악비의 부장 장헌(張憲)이 모반을 꾸몄다고 무고한다.

 

10월에 악비, 악운(岳雲) 부자는 ‘막수유(莫須有, 아마 있을 것이다)’의 죄명으로 옥에 갇힌다. 악비는 죄가 없이 누명을 썼다고 여기고 적극적으로 해명했다. 나중에 자신을 취조하는 사람이 진회의 패거리로 바뀌자 악비는 해명도 필요 없다는 것을 알고는 눈을 감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12월 29일 악비는 악운, 장헌과 함께 죽임을 당한다. 향년 39세였다. 악비가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항주(杭州)의 백성들은 엉엉 소리를 내며 울음을 터트려 온 거리가 진동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진회가 악비를 죽인 이유는 진회가 강화를 주장한 정책과 관련이 있다고 알고 있다. 진회가 금나라에서 송나라로 돌아온 후 정당하지 않은 수단으로 우상(右相)의 지위에 올랐고 후에 재상 조정(趙鼎)을 밀어내려고 하면서 악비의 불만을 샀다. 진회는 그 사실을 알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악비하고는 원한을 맺게 됐다. 진회를 더욱 곤란하게 만든 것은 악비가 자기의 강화 주장을 격렬하게 반대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악비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본다.

 

물론 이런 관점도 일부는 타당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면 빈틈이 보인다. 진회의 권세가 크기는 했으나 군권을 장악한 명장 악비를 쉽게 모함할 수는 없다. 자신에게 충성을 다한 악비에게 죄를 묻는 중대한 사안을 고종이 직접 물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고종은 왜 반대를 하지 않았을까? 고종이 반대를 했다면 ‘어쩌면’이라는 죄명을 가지고 실력 있는 명장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것은 너무 희극적이지 않은가? 다시 말해 진회의 강화 정책을 공격한 것은 악비 혼자가 아니다. 의흥진사(宜興進仕) 오사고(吳師古), 봉예랑(奉禮郞) 풍시행(馮時行) 등도 진회의 강화의 수작을 여러 번 공개적으로 반대했었다. 그런 일반적인 직급의 조정 대신들조차 진회가 마음대로 주살하지 못했는데 추밀부사(樞密副使, 현 국방부 부부장)였던 악비를 부당한 수단으로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 수 있었겠는가.

 

악비가 감옥에 갇히고 죽음을 당할 때까지 3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악비와 같은 명장을 죽였다는 것은 고종 황제 조구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그러나 조구는 악비를 신임했었고 중용한 적이 있었다. 조구는 “직접 ‘정충(精忠) 악비’라는 글을 써서 깃발을 만들어 하사했다.” 악비는 깃발을 받아들고 자랑스럽게 생각해 그 깃발을 내내 달고 다녔다. 이는 군신 관계가 좋았음을 말한다. 하물며 악비와 같은 연전연승의 무장이라면 조정의 동량이며 강산과 사직을 지키는 골간인데 그런 중요한 근간을 제거한다? 그러면 고종의 강산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쪽으로 본다면 고종 조구는 악비를 죽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그와 악비가 처한 모든 과정을 연계시켜보면 조구는 주전파의 명장을 주살한 원흉일 가능성이 많다.

 

북송은 줄곧 무장(武將)을 기피했다. 무장들에 대해 엄격한 제약을 주는 조치를 시행했다. 송 고종도 북송 개국 이래 역대 황제들이 무장들이 권력을 전횡하지 못하도록 엄격한 조치를 취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무장들이 군대를 보유하고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면 통제 불능이 될 것이고 당말오대(唐末五代)의 지방 번진(藩鎭)이 할거하는 전철을 밟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소흥 7년(1137) 악비는 모친의 상을 당해 급히 귀향하면서 황제의 허가를 받지 않고 군권을 장헌에게 넘겨줘 고종의 불만을 샀다. 이외에 악비는 32세에 절도사(節度使)가 됐는데 분명 좋은 일이었지만 강직한 악비는 ‘자부심’을 노출했다. 이를 진회 일파가 조고에게 보고했다. 우두머리인 황제가 좋아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고.

 

 

 

 

고종이 막 즉위했을 때 금나라는 흠종(欽宗)의 아들 조감(趙諶)을 송나라로 돌려보내 황제로 삼는다는 소문을 퍼뜨려 남송 조정을 발칵 뒤집었다. 조구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황위를 빼앗기는 것이었다. 당시 악비는 신망이 높고 정병을 거느린 뛰어난 장수였다. 만약 악비가 황하를 건넌다면 고종이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만약 악비가 직접 연경(燕京)으로 치고 올라가 흠종이나 그의 아들을 데리고 돌아온다면 고종은 자신의 자리를 내줘야 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었다.

 

고종은 쓸데없이 이것저것을 잴 필요가 없었다. 그저 악비만 죽이면 자신의 황위를 유지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악비가 아무리 공이 많으면 뭘 할 것인가? 그가 남송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고종이란 황제가 악비에 대해 불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헛된 것이다. 전란에 휩싸여 삶을 제대로 엮지 못하는 백성들이 악비를 갈망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황제의 지위만 공고하면 됐다. 악비는 누구를 위하여 존재했어야 하는가? 황제다. 당시 황제가 ‘국가’였기 때문이다. 도탄에 빠진 백성의 안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 백성은 황제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이천 년 동안 중국은 그랬다. 국가의 환란과 백성의 평안을 추구했던 악비의 마지막은 그래서 비극으로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곰곰이 새겨봐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있다. 진회가 병으로 죽은 후 당시 쫓겨났던 주전파의 대장 장준(張浚) 등은 관직을 회복한다. 진회가 모함했던 사람들도 명예를 회복하거나 복직된다. 그때 많은 대신들이 악비의 명예를 회복시키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고종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고종의 아들이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고서야 악비의 누명을 씻겨 주었다. 이런 것을 볼 때 고종은 악비를 죽인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고종의 눈에 악비는 가시였고 죽여야만 되는 대상이었을 따름이었다. 악비를 죽음으로 몰아간 주모자가 고종이 아니었다고 강변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최소한 공모자였음은 분명하다. 역사 최고의 매국노로 욕을 먹고 있는 진회의 죄는 인정한다하더라도 악비를 주살한 책임 전체를 그에게만 씌운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맞지 않는다. 중심에 ‘황제’ 고종이 있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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