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인류사회는 방대하면서도 끝이 없는 풍속화이다. 다른 역사의 단면, 다른 자리나 모퉁이, 다각적인 생활공간은 모두 다양한 인류의 활동무대다. 변화하고 발전하는 멈추지 않는 무대에서 단장하거나 발가벗은 채로 다른 사회 층면, 다른 직업, 다른 연령, 다른 성별의 사람들의 양태를 표현하고 있다. 역사의 풍속화에 들어간 후, 정지된 스틸 속에 여러 양태가 매 시간 매 장소마다 언어, 행위, 사상, 심리상태를 묘사하지 않은 경우가 없다. 예부터 지금까지 거지가 구걸하는 수단과 방식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하층 사회 단체의, 하위문화의 여러 군상의 양태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인다. 진짜도 있고 가짜도 있으며 눈물도 있고 웃음도 있다. 각양각색인 다양성도 있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여러 가지 가식적인 면사를 벗겨내면 대부분 희극적 형식의 추태를 연출해 내면서 울 수도 웃을 수도 없게 만든다. 아주 오래 전에 거지는, 참고삼아 이용할 만한 여러 가지 구걸 방식을 채용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수단(예나 지금이나 거의 비슷한 구걸 예술)을 이루었다. 독특한 하위문화 전승 형태로, 구걸 습속과 관례를 형성하였다. 당대에 기괴하고도 다양한 구걸 수단과 방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민간 비밀 사회단체는 각자 일련의 규정과 직업 은어를 가지고 있었다. 하위문화에서 전승된 기본적인 상징이며 내용 중의 한 가지다. 거지 단체도 그렇다. 당대 미국학자 래리 A. 사모바, 리처드 E. 포터의 공저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 사람들이 주로 이상 행위에서 구성된 하위문하로 생각하는 것 중에서, 해당 문화의 언어 유형이 은어(argot)로 발전한다. 유랑자와 거지는 여러 가지 표준에 따르면 범죄자는 아니지만, 그들은 주류문화와 도무지 맞지 않는다. 모종 은어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은어는 특정 하위문화와 그 단체 내부에 한해서 사용하는 언어이고, 구성원은 주류문화 밖에 있다. 하위문화와 문화 단체를 이해하려면 은어를 이해하여야 한다. “은어 언어의 특정 형식일 뿐만 아니라 특정 생활방식을 반영하고……심리상태, 사람과 사회에 대한 평가, 사유방식, 사회조직과 기술능력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관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어는 언어와 행위가 서로 결함된 방식이다. 하위문화는 특수한 언어 코드를 사용하여 요구를 만족시키기에 은어는 중요하다. 그러한 기능은 첫째, 은어로 표현하면서 반주류문화를 돕기에 자위의 수
부랑자, 무뢰배와 거지의 자연적 관계 불량배, 무뢰배라는 뜻을 가진 중국어는 ‘유맹(流氓)’이다. ‘맹(氓)’자는 원래 글자 뜻대로 고찰하면 거지와 연대관계가 깊다. 당나라 공영달(孔穎達)은 『모시정의』에서 말했다. “맹민(氓民)의 명칭은 문장 중의 뜻이 다르다.……맹(氓)은 몽(懵)이다. 몽(懵)은 무지한 모양(안 : 사리에 어둡다, 흐리멍덩하다)이다.” 원나라 유근(劉瑾)은 『시전통석(詩傳通釋)』에서 제기하였다. “맹(氓)은 모호하고 무지함을 이르는 말이다.” 청나라 단옥재(段玉裁)는 『설문해자』 주(注)에서 풀이하였다. “다른 지역에서 온 백성을 맹(氓)이라 한다. 그래서 민(民)과 망(亡)을 따랐다.” 근대에 어떤 학자는 단옥재의 설명에 대하여 『시·위풍·맹(氓)』의 맹(氓)은 ‘다른 지역에서 온 백성’에 부합한다고 하였다.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이주하거나 이 마을에서 저 마을도 옮긴 사람을 모두 맹(氓)이라 하였다. 그래서 청나라 훈고학자 주준성(朱駿聲)은 ‘맹(氓)’을 ‘저기에서 여기로 온 백성’이라 하였고 위원(魏源)은 ‘맹(氓)’을 ‘유랑하는 백성’이라 하였다. 현재 통속적인 표현으로 ‘맹(氓)’은 바로 ‘타지인’, ‘외래인’의 뜻을 가진다.
더 가증스러운 것도 있었다. 거지 무리가 오고, 놀이를 끝내고 돈을 요구할 때에는 반드시 곧바로 지불해야 했다. 그렇지 않고 조금이나마 주저하는 기색이 있으면 욕설이 튀어나왔다. 심지어 시간을 지체했다고 힐책하면서 요구하는 돈의 액수를 올렸다. 예를 들어 처음에 100문을 요구했는데 일각을 지체했다고 곧바로 200문이 되고 400문이 되고 800문이 되었다. 줄 때까지 난장을 부렸다. 가끔 지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두고 끝끝내 주지 않는 상대를 만날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과 같은 무리가 어찌 한둘인가. A무리가 가기도 전에 B무리가 오고, B무리가 오자마자 C무리가 오고 D무리도 잇달아 도착했다. 매 무리를 4명으로 계산한다해도 네다섯 무리 이상이면 거지 떼가 이삼십 명에 이르렀다. 사람이 많으면 세력도 크다고 하지 않던가. 문 밖에 진을 치면 상가는 장사를 그만 둬야 할 지경에 이르니 어찌 근심이 크지 않겠는가. 제각기 조직된 거지 무리가 처음 도착하면 먼저 거리를 한 바퀴 순찰했다. 거지 두목이 거지 헌납금을 받아오는 곳을 정하는데 그 수는 우두머리와 친분관계에 따라 결정되었다. 조직된 무리 당 삼사 명 혹은 오륙 명씩으로 똑같지 않았다. 무리
역대로 강호(江湖)의 여러 부류는 어중이떠중이가 모여 있는 사회 단체였다. 사람들이 숭상하는 의협의 부류도 적지 않았으나 대부분은 불량배요 무뢰한 무리였다. 근대의 거지 단체는 흑사회(黑社會)의 일원으로 변질된 후 불량배 단체의 본성을 드러냈다. 사회생활 중 거지 단체는 왕왕 관부를 이용했다. 여타 흑사회 단체와 서로 결탁하여 한패를 이루어서는 사회에 해악을 끼쳤다. 예를 들어 『청패류초』에 기록은 이렇다. “하남(河南) 주현에서 총괄하여 체포하라는 문서를 내리면 해포(海捕)에 넘겼다. 해포는 대체로 걸식하는 거지들로, 관부도 표를 줬다. 서너너덧씩 무리를 이루어 향진으로 갔다. 상점에 가서 향가지 하나를 주면 반드시 10문이나 8문을 내줘야 했다. 평상시의 거지와 비교하면 다루기가 실로 쉽지 않았다. 일여 년이 지난 후 돌아와 표를 반납하고 조금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체포했는지 여부만 다루지, 원래 상황은 묻지 않았다.” 관부가 거지를 이용해 어물쩍 책임을 때워버리는 짓거리를 말하고 있다. 거지도 그런 기회를 이용하여 협박하고 재물을 손에 넣었다. 서로 이익과 혜택을 얻는 것이지만 재난을 당하는 것은 결국 평민이요 일반 사회인들이었다. 민국 이래로 청홍방
광주(廣州) ‘4대 도적(寇)’ 반대로 많은 거지들은 장걸아와는 달랐다. 심지어 도적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청패류초』 기록이다. “4대 도적은 광주에 있는데 거지다. 거지이면서 도적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흉악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4명이 발기했기에 사대구(四大寇)라 불렀다. 월(粤, 광동 광서)지역 출신이 아니고 모두 외지 사람이다. 월에서 관직에 있던 관원의 자손으로 가난해져서 돌아갈 곳이 없게 되자, 양성(羊城)으로 흘러들어가 구걸하며 지내는 자들이다. 그런데 구걸하는 방식이 일반 거지하고는 달랐다. 꼭 결혼식이나 장례식이 있는 부잣집을 골라 구걸하였다. 순서에 따라 결손 된 인원을 뽑는 ‘사우(私寓)’1)는 어느 외지인인지를 불문하고 동향으로 여겼다. 그곳에 가면 수판을 내밀며 행하를 요구했다. 수판에 성명, 원적을 쓰고 위에는 선대의 품계 명호를 붙였다. 예를 들면 ‘원임 남해현 모모 자, 모모의 아들, 모 처, 모모이다’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대개 장삼을 두르고 절뚝절뚝 신을 지르신었다. 결당한 자가 많으면 수십 명에 달했다. 은화 수십 원을 주지 않으면 떠나지 않았다. 그중 관리의 자손이 분명 존재했지만 역시 대부분은 사칭하는 자들이었다. 그중
조고가 상황을 자세히 살펴본 후 급히 관제묘로 달려가 기도하였다. 누금구가 일찍부터 관제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놀라하며 조대에게 알렸다. “정말 이상해요. 어제 저녁에 괴상한 꿈을 꿨거든요. 꿈에 관우께서 노기등등하여 주창(周倉)에게 욕을…….” 조고는 참지 못하여 급히 물었다. “주창에게 뭐라고 욕하던가?” 누금구는 너무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주창이 북쪽 호수에서 물에 빠져 죽은 물귀신을 만났다하대요. 물귀신이 어장을 강점하고 있는 나쁜 놈의 상앗대와 발목을 잡고 있더래요. 주창이 물귀신에게 겁을 주니 잡혀있던 나쁜 놈이 도망쳤나 봐요. 관우께서 그 말을 듣고는 화가 나서 주창에게 괜한 일을 했다고 욕을 했어요. ‘왜 물귀신이 그 나쁜 놈을 물에 빠져 죽게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느냐? 힘을 믿고 어민을 억압하는 나쁜 놈이지 않느냐. 오늘 이후도 밤에 몇 놈이 물고기를 잡으러 호수로 갔다가 몇 명 더 물에 빠져 죽을 것이다. 네가 이후 밤마다 호수에 가서 지키고 있으라. 마음 약해져서 도와주지 말고.’ 주창이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며 답합디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그랬지요.” 조고가 그 말을 듣고 놀라 당황해 어쩔 줄 모
전해오는 바는 이렇다. 청나라 말기 민국 초기에, 양산(梁山) 안산(安山)진에 장제(張際)라는 인물이 있었다. 별명은 누금구(婁金狗)1)로, 집도 땅도 없어 관제묘에 거처하는 가난한 거지였다. 천상에 별 28수가 있는데 누금구는 누성으로 속세에 내려올 때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기를 원한다고 한다. 장제는 열정적인 사람으로 양산의 호한이었다. 길을 가다가 불공평한 일을 보면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주는 의협의 유풍을 가지고 있었다. 억지 쓰는 것을 보면 쌍지팡이 짚고 나섰다. 참견할 때 다양한 방법으로 대처하였다. 한 번은 그가 안산진 만(萬)사부 집에서 이발을 하고 있었는데 참을 수 없는 일이 터졌다. 만사부가 누금구의 머리를 반 정도 깎고 있을 때였다. 동평(東平)쪽에서 관리가 나타나더니 이발소 앞에 말을 세웠다. 말에서 내리자마자 들어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금구를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비켜라! 나가거라! 내가 먼지 이발하고 나서 해라!” 누금구는 어쩔 수 없이 쫓겨났다. 다 깎지 못하여 반이나 남겨둔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만사부를 슬쩍 보고는 고개를 끄덕인 후 빙그레 웃으며 떠났다. 얼마 없어 누금구는 타원형 쟁반에 2만 전(錢)을 들고 들어왔다. 무
광서 이강(漓江) 주위에 종령(鍾靈)산, 소고(小姑)산, 옥고(玉姑)산, 죽두(竹篼)산이 늘어서 있고 죽두산 북쪽에 큰 산인 방해(螃蟹)산이 있다. 방해산은 늙은 거지가 이강에서 낚은 게〔방해(螃蟹)〕의 정령이 변해서 됐다고 전한다. 전설은 이렇다. ‘구근공(九斤公)’이라 불리는 늙은 어부가 매일 이강에서 물고기 9근을 낚을 수 있었다. 그해, 이강은 100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한 홍수가 났다. 홍수가 지난 후 구근공은 낚시를 했으나 49일 동안에 한 마리도 낚지 못하고 미끼만 낭비하였다. 어느 날, 구근공이 밥할 쌀 한 톨이 없어 근심에 쌓여 있을 때 말굴레 같은 낡아빠진 옷을 입은 거지가 나타나 구걸하였다. 구근공은 탄식했다. “내게 구걸하다니. 내가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당신과 함께 천 호의 집을 찾아가면, 적어도 백 끼의 밥은 먹을 수는 있을 거외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거지를 집에 들어오라고 한 후 아내에게 말하여 집에 남아있던 암탉을 잡아 대접하였다. 늙은 거지는 구근공에게 어찌하여 어망이 있으면서도 그물을 설치하지 않으며 물고기를 낚을 생각도 하지 않고 구걸할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다. 하소연 하는 구근공의 사정을 듣고는 늙은 거지가 강을
의로운 거지가 사람들에게 재난을 방비하라고 경고하다 만약 ‘옜다! 하고 던져주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라는 말이 사람인 거지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가치를 표출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거지의 기본 인격 관념과 의협(義俠)의 관념이 동시에 내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의 밑바닥에 처해 있지만 결국은 인류의 일원으로 자신의 생존을 추구하면서 여러 방면에서 타인을 도와주려 한다. ‘선을 쌓고 덕을 행하는’ 것이다. 원나라 인종 연우(延祐) 첫해에, 몸에 검은 옷을 걸친 거지가 큰 바가지를 한 손에 들고 수군 방책과 장경(張涇) 부두 사이에 있는 술집에서 구걸하며 돌아다녔다. 술을 마실 때마다 외치고 다녔다. “소(牛)가 온다.” 그리고 수군 방책과 인가의 벽에 ‘불(火)’ 자를 쓰고 다녔다. 사람들은 역겹다는 듯이 욕을 해대며 글자의 흔적을 지웠다. 나중에는 거지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해 겨울, 해적 우대안(牛大眼)이 유가항(劉家港)에서 태창(太倉)까지 약탈을 자행하였다. 수군 방책과 장경 부두는 불바다가 되었다. 그때서야 사람들이 당시 그 거지가 재앙을 암시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평민에서 말단인 보잘 것 없는 거지가, 일이
중국어에 ‘주강호(走江湖)’라는 말이 있다. ‘강호(江湖)를 떠돌다’라는 뜻이다. 사전에는 ‘곡예사·떠돌이 의사·점쟁이 따위가 생계를 위하여 세상을 떠돌아다니다’라고 돼있다. 중국 문화전통의 세속관념으로 보면, 강호를 떠돌아다니는 부류는 하층민, 더 나가서는 천민들의 일이었다.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은 『회포를 풀다(遣懷)』1) 시에서 읊었다. “실의에 빠져 강호에서 술 마시고 다닐 때는 미인들 가는 허리 손바닥에 가벼웠네.” 실의에 빠져 곤궁해질 때 다른 길을 찾을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강호 사회에 전락하고 사회 하층으로 빠져든다는 말이다. 송(宋)대 원채(袁采)의 『원씨세범(袁氏世範)』 「자제당습유업(子弟當習儒業)」에 있는 기록이다 : “사대부의 자제가 일시적으로 세록을 받을 수 없고 의지할 재산이 없으면, 어버이를 섬기고 처자를 보살피기 위해서는 유생이 되는 것이 낫다. 자질이 뛰어나면 진사과를 공부할 수 있기에 위로는 과거 급제하여 부귀를 얻을 수 있다. 다음으로는 글방을 열어 가르치면서 속수(束修, 옛날 스승을 처음 찾아뵐 때 드리던 예물, 개인 교수에게 주는 사례금)를 받을 수 있다. 진사과 공부를 할 수 없는 사람은 위로는 서찰을 써주는
가출한 소년, ‘흑곰’이 되어 기예를 팔며 구걸하다 위 책에는 또 기록하고 있다 : 건륭 신사(辛巳, 안: 1761) 때에 소주(蘇州) 호구(虎口)시에 거지가 있었다. 흑곰과 함께 다녔다. 흑곰은 뾰족한 털이 빽빽이 나있는, 사천에서 나는 말과 같은 크기였다. 글도 쓰고 시도 읊을 수는 있었으나 말은 하지 못했다. 돈을 보시하면 볼 수 있게 하였다. 흰 종이에 글자를 써달라면 큰 글씨로 당시(唐詩)를 써주면서 100원을 받았다. 어느 날 거지는 외출하고 흑곰 혼자 있었다. 사람이 다가가서 글을 써달라고 하자 흑곰이 글을 써서 알려주었다. “나는 장사 훈몽(訓蒙) 사람입니다. 김 씨이고 이름은 여리(汝利)입니다. 어릴 적에 저 거지패거리들에게 붙들려 왔습니다. 벙어리 약을 내게 들어부으니 말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흑곰을 기르는 집으로 데리고 가서 내 옷을 벗기고 묶었습니다. 온몸에 침으로 찌르니 더운 피가 뚝뚝 떨어졌습니다. 피가 다 식기도 전에 흑곰을 죽여서 가죽을 벗겨낸 후 내 몸에 감쌌습니다. 사람 피와 곰의 피가 들러붙어 영원히 떨어지지 않게 됐습니다. 쇠사슬로 묶어 끌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속여 구걸하게 하니, 오늘까지 수만 관을 벌었습니다.” 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