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전문 130조 중 대통령 관련 조항은 20개다.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며,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한다(66조 1항)’부터 ‘전직 대통령의 신분과 예우에 관하여는 법률로 정한다(85조)’까지.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무총리(86조)와 국무위원(87조), 대통령이 의장이 돼 정부의 권한에 속하는 중요한 정책을 심의하는 국무회의(88~93조) 관련 조항까지 포함하면 28개에 이른다. 대통령의 권한과 책무가 그만큼 막중하다는 방증이다.
국정이 대통령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현실에서 국민이 선택한 정권의 국정운영 평가도 대통령 직무수행 지지도로 가늠할 수 있다. 여론조사기관들이 매주 대통령 직무수행 지지도를 조사해 공개하는 이유다.
한국갤럽의 11월 넷째주 조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직무수행 지지도가 40.0%로 취임 이후 최저치에 근접했다. 전주보다 4%포인트 하락했다. 부정평가 이유로 ‘법무부ㆍ검찰 갈등에 대한 침묵’이 새로 등장했다. 부정평가 비율이 48.0%로 높아지며 긍정평가와의 격차가 8%포인트로 벌어졌다.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은 지난해 10월 ‘조국 사태’, 올해 8월 ‘부동산 대란’ 당시에 최저치인 39.0%를 기록했다. 직무배제 논란 등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간 갈등이 격화하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침묵 방관하자 지지율이 급락했다.
최근 한달 사이 굵직한 국정 현안과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가 불거졌을 때 문 대통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국민은 국정 최고책임자의 입장을 알고 싶은데 아무런 말이 없었다. 감사원이 원전 월성1호기 감사결과를 발표할 때나 더불어민주당이 서울ㆍ부산시장 재ㆍ보궐 선거 무공천 당헌을 뒤집을 때, 국무총리실 산하 신공항검증위원회가 김해신공항 백지화 방침을 발표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문 대통령이 말 자체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런저런 행사나 기념일에는 직접 참석해 발언하거나 소셜미디어에 의견을 올리곤 했다. 추미애 장관이 윤석열 총장 징계와 직무정지 명령을 내린 이튿날 문 대통령은 페이스북에 ‘여성폭력 추방 주간 첫날’임을 상기하며 “여성 대상 범죄에 단호히 대응하겠다”는 글을 올렸다. ‘한국판 뉴딜, 대한민국 인공지능을 만나다’ 행사에는 직접 참석해 응원 메시지를 전했다.
대통령이 국정 현안에 대해 말이 없는 사이 거대 여당은 선거를 의식해 표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에 열중하는 모습이다. 김해신공항 백지화 방침이 발표된 지 열흘도 안 돼 민주당은 기다렸다는 듯 ‘가덕도 신공항 건설 촉진 특별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예비타당성조사(예타) 등 사전절차 면제 및 단축, 건설비용 보조를 위한 재정자금 융자, 사업시행자에 대한 조세감면과 자금지원 등을 망라했다.
예타는 대규모 재정이 투입되는 사업의 예산 낭비를 막기 위해 정책적ㆍ경제적 타당성을 사전 평가하는 제도로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도입했다. 민주당은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 예타 면제를 ‘토건정치’라고 비난했다. 더구나 가덕도는 2016년 조사에서 김해공항 확장이나 밀양공항 건설 방안보다 낮은 점수를 받았다.
그럼에도 가덕도 신공항을 밀어붙이는 것은 내년 4월 부산시장 보궐선거를 겨냥한 선심성 정책이라는 비판을 자초할 뿐이다. 예천, 청주, 양양, 울진, 무안 등 선거 때마다 남발한 공약으로 건설된 ‘정치 공항’이 제구실을 못하는 현실을 무시한 채 가덕도 신공항을 추진하기 위해 대구ㆍ광주 공항 국비지원 특별법 제정까지 거론하는 것은 포퓰리즘의 전형이다.
게다가 민주당은 야당인 국민의힘을 끌어들여 예타 무력화도 꾀하고 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는 국가재정법을 바꿔 예타를 거쳐야 하는 사업비 기준을 현행 500억원에서 1000억원으로 조정할 태세다. 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대다수 국책사업이 예타 없이 고위 관료나 정치인, 지자체장 입맛에 따라 가능해지고, 국민 세금이 허투루 쓰이게 된다.
국정 현안에 대통령이 침묵하거나 보이지 않자 ‘행사 대통령’ 소리가 나온다. 문 대통령은 취임 후 첫 기자회견에서 “중요한 내용은 대통령이 직접 말씀드리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임기 3년 반이 지나도록 직접 브리핑과 기자간담회는 6회에 머문다. ‘불통 정권’이라고 비판했던 박근혜 대통령의 4회와 별 차이가 없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직접 브리핑과 기자간담회가 각각 150회였던 것과 너무 대조적이다.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대통령의 침묵이 길어지면 책임정치와 거리가 멀어진다. 국민의 실망이 더 깊어지기 전에 대통령이 진솔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싶다. 집값 문제, ‘추-윤 갈등’과 검찰개혁, 탈원전, 동남권 신공항, 코로나19 방역 등 국민이 걱정하고 궁금해 하는 일이 쌓여 있다. 대면 대화가 어려우면 추석 전날 가수 나훈아가 공연했듯 온라인을 통해 랜선 대화로 하면 된다. [본사 제휴 The Scoop=양재찬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