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은 제주4.3과 공통점이 많다. 두 사건 모두 제대로 된 증거 없이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당했고, 과거엔 ‘무장폭동’ 및 ‘반란사건’이라는 오명으로 불렸다. 관계자의 친족들은 ‘빨갱이’라고 불려지면서 차별을 받기도 했다.
제주4.3은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지 21년 만에 전부 개정이 이뤄지고, 2014년부터는 국가추념일로도 지정되는 등 진상규명이 이뤄지고 있다. 반면 여순사건은 제16대 국회 때 잇따라 특별법이 발의됐으나 그때마다 무산됐다. 올해 겨우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갈 길이 아직도 멀다.
역사는 진실을 밝히고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 이 진실이 영원히 기억되지 않는다면 역사의 정의는 없다. 동포인 제주도민을 죽일 수 없다고 국가에 맞선 이들과 진실을 규명하려 애쓰는 그들을 제주가 기억하고, 도와야 하는 이유다. 여순사건 73주년을 맞아 과거와 현재, 미래를 세차례로 나눠 재조명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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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시민이 학교 운동장에 모아져 있었다. 폭동을 진압했던 국군이 반란자들의 잔학한 행위와 같은 짓의 야수성과 정의를 무시한 태도로 오히려 반군들보다 더한 보복행위를 자행하고 있었다. 그는 자백을 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운동장 저쪽에 있는 구덩이 속에 쳐 넣어지고 총살됐다. 가장 두려웠던 것은 방관자들의 침묵과 자신들을 잡아온 사람들 앞에 끓어앉은 사람들의 너무나도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미국의 라이프(Life)지 사진기자였던 칼 마이던스(1907~2004)의 현장기록이다. 그는 여수와 순천의 사건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진압군의 움직임과 지역민의 아픔을 이렇게 기록했다.
지난 18일 오후 전남 여수시 만흥동.
만성리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에 여수 마래터널을 지나면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길이 나온다. 그 중간에 골짜기를 조금 더 돌아 들어가면 을씨년스런 풍경이 펼쳐진다. 비문의 제목은 '형제묘.'
형제묘 옆 한쪽엔 희생자 유족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대부분 위령탑이나 비석에는 희생자의 이름, 사건 개요 등이 적혀있다. 그러나 만성리 형제묘 비석엔 유적지인지, 개인묘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별다른 정보가 없다.
서희종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사무국장은 “만성리 형제묘 비석 뒷편엔 사건 개요 등이 적혀있었다. 그러나 희생자 유족이 ‘125명이 군사재판으로 사형판결을 받았다’는 내용을 희생자가 이른바 ‘빨갱이’라는 것을 기정사실화 한 것으로 판단, 글씨를 덮었다”면서 “보수단체 측에서 학살이 아닌 희생이라는 단어를 쓰라는 압박이 들어오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걸어서 채 5분도 걸리지 않는 옆 골짜기에는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가 초라하게 세워져 있다.
이 역시 별다른 비문 없이 말줄임표만 새겨져 있어 안타까움을 더했다. 1948년부터 위령비가 세워진 2009년까지 수십년간 침묵을 강요당한 채 아무 것도 밝혀진 바 없는 사실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내막을 들여다보면 어처구니 없는 희생에 말문이 막힐 노릇.
이곳에 묻힌 희생자 125명은 사건 당시 부역혐의자로 몰려 1949년 1월 만성리 산골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학살현장을 직접 지켜본 당시 여수경찰서 사찰계 형사의 증언 등에 따르면 5명씩 총살된 부역혐의자는 겹겹이 장작더미에 눕혀져 5층으로 쌓은 큰 더미 5개로 나뉘어 불태워졌다.
당시 시신이 타는 냄새가 며칠간 퍼져 길에 다닐 수 없다는 이야기가 주민들의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이후에도 이 골짜기에서는 진압군이 부역혐의자들을 계속 사살, 총소리와 비명소리로 가득했다고 한다. 당시 여수시내를 가고자 했던 만성·오천 주민들은 이 지름길을 두고, 일부러 먼 거리를 돌아서 다닐 정도로 만성리 일대는 '공포의 땅'이었다.
희생자 유가족들은 유골을 찾을 길이 없자 커다란 무덤 하나를 만들었다.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있으라는 뜻에서 '형제묘'라는 이름을 붙였다.
형제묘는 특히 제주 ‘백조일손지묘’를 떠오르게 한다. 정부는 당시 4.3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사상이 불순한 자를 고른다’는 명목 하에 예비검속을 벌였다. 당시 제주지구 계엄군은 주민 수백여명을 검속, 모슬포지역 주민 132명과 한림지역 주민 63명을 1950년 8월20일 서귀포시 송악산 섯알오름 옛 일본군 탄약고터에서 집단학살했다.
유족들은 집단학살 희생자들의 암매장터에서 서로 엉킨 유골을 구분할 수 없어 한곳에 무덤을 만들었다. 조상은 백명이라도 한데 묻힌 자손은 하나라는 뜻을 담아 '백조일손지묘'라고 이름을 붙였다.
여순사건 희생자 수는 10월 19일부터 27일까지 약 열흘 동안 1만1000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당시 여수시 인구는 6만여명이었다.
여수와 순천, 일부 전남지역에서 단기간 벌어진 국가폭력은 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4.3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제주에서는 최근 제주4.3특별법 개정안이 통과돼 실질적인 배·보상의 길이 열리는 등 억울한 누명을 쓴 이들의 명예가 점차 회복되고 있다.
반면 여수와 순천 희생자 및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여순10.19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은 제16대 국회 이후 수차례 발의됐지만 제정되지 못했다. 여순과 관련한 '빨갱이' 낙인과 연좌제의 공포는 70여년이 지난 최근까지도 억울하다는 하소연조차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사건 발생 73년 만인 올해 여야 정치권의 대승적 협조와 도민의 간절한 열망에 힘입어 제21대 국회에서 결실을 봤다. 제주4.3특별법 제정 20년 뒤였다.
여순10.19는 이로써 국무총리 소속 ‘여순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와 전남도 소속 ‘실무위원회’를 설치할 수 있게 됐다.
같은 민족인 제주도민을 학살할 수 없다는 절박한 이유로 제주행을 거부한 이들, 아무런 이유없이 죽어나간 이들. 끔찍한 고통에 시달렸지만 최근까지도 입을 열 수 없었던 이들. 이들이 제주4.3이 걸어온 길을 따라가 함께 걸어갈 차례다.
진실이 규명되는 그 날, 형제묘가 받아들일 저승의 세계에 한 줄기 빛이 보이고 있다. [제이누리=박지희 기자]
☞여순사건이란? 제주4·3과 함께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좌익과 우익의 대립으로 빚어진 민족사의 비극적 역사 중 하나다.
1948년 10월 19일 일어난 여순사건은 전남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의 일부 군인들이 제주4·3 진압을 거부, 반란을 일으키면서 불씨가 커졌다. 해방 이후 남한단독정부 수립 두달 뒤이자 제주4.3 이후였다.
제주4.3은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과 이승만 정권에게 걸림돌이었다. 남한을 통틀어 유일하게 단독선거를 반대한 제주를 '빨간 섬'으로 낙인찍은 것이다.
정부는 통치능력을 시험받고 있는 상황에서 강경 초토화 작전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여수에 주둔했던 14연대로 하여금 이를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14연대는 지창수.김지회 등 일부 좌익 군인들 중심으로 제주 출동을 거부했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결성된 군인으로서 동포인 제주도민을 학살하는 것은 사명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한편 여수시 중앙동에서는 지하에서 활동하던 인민위원회가 모습을 드러냈다. 실제 14연대가 여수시내로 진입할 동안 여수 주요기관은 텅텅 비어있는 상황에서 인민위원회가 하나의 행정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들이 정부에 요구하는 것은 일제잔재 청산 후 자주통일국가 결성, 토지개혁, 미군정 철수 등이었다.
정부는 이를 반란으로 규정, 진압하고 나섰다. 10월 22일 여수·순천에 계엄령을 선포, 이를 어길 시 사형 등 처벌에 처한다고 밝혔다. 다음날인 23일엔 일반 국민에게도 경고문을 발표했다.
민간인 중 14연대에 도움을 준 사람이 곳곳에서 색출됐다. 하지만 구별기준이 명확하지 않았다. 미군 속옷을 입거나, 머리가 짧다는 이유만으로도 부역자로 판단됐다. 당시 인민대회에서 나눠준 ‘천일골무’ 공장에서 생산된 신발을 신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처형됐다. 그저 공포에 질린 마을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가르키면 지적받은 사람은 빨갱이로 분류돼 남녀노소 구분없이 총살된 것이다.
혐의가 애매한 사람들은 여수경찰서로 연행됐지만 경찰서는 수많은 혐의자를 수용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경찰서와 가까운 증산국민학교(현 중앙초) 등 학교 교실 하나에 50~60명씩 구금됐다. 이들은 대부분 사법절차 없이 즉결처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