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은 제주4.3과 공통점이 많다. 두 사건 모두 제대로 된 증거 없이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당했고, 과거엔 ‘무장폭동’ 및 ‘반란사건’이라는 오명으로 불렸다. 관계자의 친족들은 ‘빨갱이’라고 불려지면서 차별을 받기도 했다.
제주4.3은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지 21년 만에 전부 개정이 이뤄지고, 2014년부터는 국가추념일로도 지정되는 등 진상규명이 이뤄지고 있다. 반면 여순사건은 제16대 국회 때 잇따라 특별법이 발의됐으나 그때마다 무산됐다. 올해 겨우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갈 길이 아직도 멀다.
역사는 진실을 밝히고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 이 진실이 영원히 기억되지 않는다면 역사의 정의는 없다. 동포인 제주도민을 죽일 수 없다고 국가에 맞선 이들과 진실을 규명하려 애쓰는 그들을 제주가 기억하고, 도와야 하는 이유다. 여순사건 73주년을 맞아 과거와 현재, 미래를 세차례로 나눠 재조명한다. [편집자 주]
|
73주기 여순사건 합동위령제 및 추념식이 열린 지난 19일 전남 여수 중앙동 이순신광장.
1분간 희생자를 추모하는 사이렌이 울린 데 이어 진혼무 ‘구음살풀이’, 유족의 편지 낭독, 여수합창단의 ‘바다의 노래’ 공연, 영화 ‘동백’의 줄거리 상영이 이어졌다.
특별법이 통과된 후 처음 치른 추념식이었지만 막상 무거운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순신광장을 제외하고는 추모 현수막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여수시가 그동안 주관했다가 올해 처음으로 전남도가 주최, 행사 규모도 커졌지만 정치권 인사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내막을 들여다 보면 갈등이 있었다.
추념식 자리에서 취재진과 만난 서희종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사무국장은 “불과 70주기까지 여순사건과 관련, 유족회와 보수단체간의 갈등이 심했다”면서 “재향군인회와 경우회 등 보수단체는 불과 5년 전에 만들어진 여순사건 조례를 반대하기도 했다. 의회에서 반대입장이 있어 조율해야한다는 이유”라고 말했다.
반면 순천유족회가 20일 순천시 연향동 여순항쟁탑에서 벌인 위령제는 앞서 여수에서의 추념식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특히 여순사건을 여순’항쟁’으로 표현한 점이 눈에 띄었다.
유족들은 저마다 준비한 엽서에 희생자를 기리는 문구를 써 항쟁탑 주변에 걸어두기도 했다.
취재진과 만난 최경필 여순10.19 범국민연대 사무처장은 “여순 위령제는 70주년인 2018년부터 지자체 주도로 경찰유족회와 상생한다는 취지로 민간유족회와 함께 치르고 있다. 1948년 10월 19일 14연대가 경찰서를 급습하면서 70명이 넘는 경찰들도 함께 희생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 사무처장은 “여수시내 좌익 및 사회주의 활동가들은 1948년 이후 궤멸됐다. 여수는 아직 보수단체와 갈등이 있는 상황”이라면서 “70주년 합동추념식에서 경과보고를 할 당시 민간희생자 입장에서 여순’항쟁’이라고 표현, 경찰 유족 측이 항의하는 일도 있었다. 여순 당시 순천경찰도 많이 희생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수에 비해 민간 희생자를 추모하는 분위기가 강한 편”이라고 말했다.
◆ "여순특별법에 적극 동의하는 의원 적었다 ... 제정 이후 유족 분위기 달라져"
여순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올해 6월 제정됐다.
여순특별법은 제16대 국회 이후 수차례 발의됐지만 제정되지 못했다. 그러다 사건 발생 73년 만인 올해, 제21대 국회에서 결실을 봤다. 제주4.3특별법 제정 20년 뒤였다.
서 사무국장은 “법 제정이 오래 걸린 가장 큰 이유는 군대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초기에 국방위 소속으로 법안이 다뤄졌다. 그래서 법안을 올려도 내부 반발에 따라 회의 자체가 열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서 사무국장은 “10년 동안 국방부에서 강경하게 나오니 7~8년 전 19대 국회 때 위원회를 행정안전위원회로 방향을 바꿨다. 그러던 중 20대 때 물꼬가 터졌다. 21대에 5개 정당별로 법안이 올라와 통과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러면서 “4.3특별법의 경우 추미애 의원이 강력히 밀어붙이는 등 적극적으로 제정됐다. 반면 여순특별법은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의원들이 많지 않았다”고 말했다.
국가폭력의 피해를 보고 ‘빨갱이’라는 낙인에 숨죽였던 유족들은 어렵사리 제정된 특별법을 특히 반겼다. 법 제정 이후 유족들 사이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고 한다.
최 사무처장은 “희생자 유족들은 특별법 제정을 위해 조사를 벌여도 입을 열지 못하는 입장이었다. 특히 사건의 주동자였던 14연대 군인들의 유족은 직접 말을 꺼낼 수 있는 분위기가 못 됐다”면서 “특별법이 제정된 지금은 14연대 군인 유족들에게도 관련 문의를 받고 있다. 최근엔 가족이 군대간 후 연락이 두절됐는데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다는 문의도 받았다"고 말했다.
◆ "여순특별법의 성과, 실무위원회 구성이 성패 가를 것"
여순특별법은 내년 1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이후 위원회가 꾸려져 여순사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및 유족의 명예회복을 위한 실질적 활동에 들어간다.
여순특별법에 따른 진상규명 절차를 살펴보면 국무총리 소속으로 ‘여순사건 진상규명위원회’(여순위원회)와 전남도 소속 실무위원회를 두고 1년 동안 신고를 받는다. 이후 2년 동안 조사한 뒤 6개월 안에 조사보고서를 내야 한다.
어렵사리 제정된 특별법이지만 과제가 적지 않은 실정이다.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위해서는 특별법을 보완할 시행령을 만들고, 추후 법 개정도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여순특별법이 전범으로 삼은 4·3특별법도 2000년 제정 당시 이런 점 때문에 20년 동안 여섯차례 개정이라는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순특별법까지 똑같은 절차를 밟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서 사무국장은 “제주4.3 특별법이 제정되고 약 20년 후 여순 특별법이 제정됐다. 제주는 그동안 사건규명도 하고, 특별법도 몇 차례 개정됐지만 여순은 현재 진척이 없는 상황”이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서 사무국장은 ‘“여순특별법 기초안을 작성할 때 4.3특별법을 연구하고 분석했다. 선례를 보고 몇 가지 대폭 수정한 부분도 있다”면서 “이번에 시행령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초안에 대해선 정부에 비공식으로 전달했다. 이달 중 시행령이 발표되면 문제를 파악한 뒤 공식대응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최 사무처장은 "실무위원회 구성이 굉장히 중요하다. 중앙위원이면서 실무위원장인 전남도지사의 역할도 특히 중요하다"면서 "상임위원회 구성에 대한 의견을 내고, 필요한 인사를 추천하는 등의 노력을 들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 "역사로 오래 기억되려면 2세대 유족들의 증언 남겨둬야"
여순특별법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유족들의 증언확보다.
서 사무국장은 “설상가상 유족들은 대부분 내일 당장 돌아가셔도 어색하지 않은 70~80대”라면서 “증언을 최대한 빨리 수집하려고 하고 있다. 2세대는 그들이 어릴 때 실제로 본 경험이 있지만 3세대는 전해듣는 상황이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최 사무처장도 “2세대 유족이 세상을 떠나면 여순사건에 대해 증언할 사람이 없다. 앞으로 이 역사가 후손들에게 전해지려면 유족의 증언영상이 꼭 필요하다”면서 “지난해 전남도에 요청해서 희생자 유족들의 증언 영상을 만들고 있다. 방송사에서도 여순사건 유족 대상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다”고 전했다.
70여 년만에 진상 규명의 물꼬를 튼 여순사건 특별법. 완전한 진실을 찾기 위해 특별법의 한계를 보완해야 하는 과제도 시급해졌다.
제주4.3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여순사건.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한이 제주에 연대의 손을 내밀고 있다. [제이누리=박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