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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불구불 길 따라 이어진 제주의 옛 마을 … 역사의 흔적 간직
일제 신작로·항만 건설로 성문·성곽·마을 사라지고 '훼손'

[※ 편집자 주 = 제주에는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생성된 독특한 문화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세대가 바뀌고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지만, 독특한 문화와 함께 제주의 정체성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고 불안합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후진적이고 변방의 문화에 불과하다며 천대받았던 제주문화.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속에서 피폐해진 정신을 치유하고 환경과 더불어 공존하는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제주문화가 재조명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시'라는 우리말은 '하던 것을 되풀이해서'란 뜻 외에 '방법이나 방향을 고쳐서 새로이' 또는 '하다가 그친 것을 계속해서'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제주문화를 돌아보고 새롭게 계승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연합뉴스는 이번 기획 연재를 통해 제주문화가 우리 삶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계승해 나갈 방법을 고민합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유행과 기기가 등장하는 세상 속에 옛것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기 일쑤다.

 

편리하고, 새롭고, 멋진 건물 옆에 초라하고 낡은 초가집, 기와집은 사람들의 눈에 마치 반 평균을 깎아 먹는 열등생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대부분이 허물어져 사라진 뒤 홀로 남은 오래된 집과 담벼락은 이제 '고풍스럽다', '마지막 보루'와 같은 표현을 써가며 뒤늦게 지키고 보전해야 할 소중한 존재로 여기게 된다.

 

탐라(耽羅) 천년의 역사를 품은 제주 원도심이 그렇다.

 

◇ 구불구불 길 따라 이어진 제주 옛 마을

 

'우리 동네는 무근성입니다. 그 옛날 성이 있어 무근성이라 불린답니다. 왕할머니 버선처럼 생긴 동네예요. (중략) 우리 동네엔 좁고 길다란 골목이 많았대요. 왕할머니의 어릴 적 놀이터였던 올레는 이제는 넓은 길이 되었어요. 길을 넓히며 헐어버린 기와집 터는 동네 텃밭이 되었고요…."

 

2006년 제주그림책연구회가 펴낸 동화책 '우리 동네 무근성'의 일부분이다.

 

과거 제주 원도심의 한 축을 이룬 무근성 일대 마을 이야기를 다뤘다.

 

무근성과 관덕정, 제주목관아를 품고 있는 제주시 삼도2동은 지도에서 보면 마치 버선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래서 '왕할머니의 버선처럼 생긴 동네'란 표현이 동화책에 등장하는 것이다.

 

외국 사람이 본다면 장화를 닮았다고 하겠지만 탐라 천년의 역사를 품은 지역의 특성상 우리 눈에는 버선이 제격이다.

 

그만큼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유서 깊은 곳이 원도심이다.

 

탐라국(耽羅國) 개국 신화에 따르면 제주 원도심은 먼 옛날 삼성혈에서 나온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 세 신인이 활을 쏘아 터를 잡은 일도리(一徒里·지금의 일도동), 이도리(二徒里·지금의 이도동), 삼도리(三徒里·지금의 삼도동) 지역을 일컫는다.

 

이 일대에 제주 최대 마을인 '대촌'(大村)이 형성됐다.

 

대촌은 제주성(濟州城) 안에 있다고 해서 '성내'(城內) 또는 성의 안쪽인 '성안'이라고 불렸다.

 

제주목(濟州牧, 조선시대 행정구역상 제주는 제주목·대정현·정의현으로 구분) 안이라는 뜻에서 '목내'(牧內), '목안', '모관'(목안의 현실발음)으로도 불렸다.

 

주변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모관 간다" 또는 "성안 간다"고 말하며 제주성 동문(東門)과 서문(西門), 남문(南門)을 통해 드나들었다.

 

동문을 지나는 큰길인 '동문한질'을 따라 '동문골'·'구명골'과 같은 마을이 이어지고, 관덕정에서 서문으로 가는 길인 '서문한질'을 따라 '서문골'로 이어진다.

 

또 남문으로 난 길을 따라 남문골, 한짓골 등 마을이 이어진다.

 

제주 마을 이름에서 '골'이나 '굴' 등은 모두 '고을'을 뜻한다.

 

그리고 옛 고을은 모두 구불구불 난 길을 중심으로 이어졌다.

 

커다란 수레가 지나고도 넉넉한 큰길이 있기도 했지만, 사람 둘이 어깨를 스칠 듯 간신히 지나갈 정도의 비좁은 길도 있었다.

 

옛길 이름을 보면, 제주어로 '질' 또는 '한질'이란 말이 등장하는 데 이는 각각 '길', '큰길'이란 뜻이다.

 

한짓골이란 지명 역시 '한길골>한질골>한짓골'로 변형된 것이다. '남문 한길에 있는 고을' 정도의 뜻을 가지고 있다.

 

남문에서 한짓골로 이어진 길은 그 옛날 제주성 안의 남과 북을 잇는 큰길이었다.

 

남문에서 곧바로 북쪽으로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제주 정치·사회·경제·문화의 중심인 제주목관아로 이어진다.

 

길 초입에는 300년 넘은 초가가 한 채 자리 잡고 있다.

 

일명 '박씨 초가'로 불리는 이 집에는 7대에 걸쳐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 제주에서는 양반도, 부자도 모두 초가를 지어 살았는데 박씨 초가집 앞 하마비(말에서 내릴 때 딛는 돌)와 우물터가 이 집에 살던 이들의 권세를 짐작하게 한다.

 

콘크리트 빌딩 사이에 있는 돌담으로 둘러싼 초가는 오랜 세월 한자리를 지킨 고결한 가치를 품고 있다.

 

또 제주 천주교의 발상지인 제주중앙성당도 길 한편에 있다.

 

1899년 제주에 천주교 신부들이 최초로 파견된 이후 1930년 지금의 자리에 최덕홍 신부가 고딕식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이다.

 

원도심 동서 방향으로는 '칠성한질'(칠성로)이 곡선을 그리며 이어져 있다.

 

칠성로 주변으로는 칠성골이 자리 잡았다.

 

탐라시대 대촌 일대 일곱 곳에 북두칠성 모양의 '칠성도'(七星圖)를 배치했는데 그 첫 별을 세운 지역이었기에 '칠성골'이라 했고, 후에 '칠성통'이 됐다고 한다.

 

한편, 제주신화 중 '칠성본풀이'를 보면 함덕리에서 뱀신(蛇神)인 칠성신 일곱 마리가 제주성 안에 들어와 칠성동에 사는 송대정 집안의 조상신이 됐기에 이 일대를 '칠성골'이라 한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칠성로 일대는 일제강점기부터 근대 상점이 들어섰고, 그중 양장점 같은 옷가게들이 중심이 돼 상권이 발달했다. 한 때 '제주의 명동'이라 부를 만큼 번화한 골목을 이뤄 제주의 모든 유행이 이곳에서 비롯됐다.

 

칠성로 동쪽 끝자락 산지천변에는 고풍스러운 책방 하나가 있다.

 

제주의 전통 주거 형태인 안거리와 밖거리, 그리고 문간거리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다.

 

과거 제주 원도심에 거주하던 고씨 일가의 생가로 고씨주택이라 불렸다.

 

일제시대 때 지어진 적산가옥이라 한 때 철거 위기에 놓였지만, 제주 전통양식이 혼합돼 있어 그 가치를 인정받아 극적으로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현재 안거리는 제주사랑방으로, 밖거리는 책방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외에도 원도심 곳곳에는 옛길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상청골·이앗골·객사골·생짓골·구명골 등 옛 마을이 있었다.

 

◇ 일제에 사라진 원도심 원형

 

옛 도심 전체를 늠름하게 감싸던 성곽과 성문은 현재 허물어져 그 일부와 흔적만 남아있다.

 

또 옛길과 옛 마을 이름은 대부분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급속하게 이뤄진 근대화 탓이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 '시간의 흐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급격한 변형과 훼손이 이뤄졌는데 그건 일제에 의해 자행됐다.

 

구한말까지만 해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던 제주 원도심에 새로운 도로가 생겨난 것이다.

신작로(新作路)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을 전후해 일본은 조선에서 수탈한 곡식 등 온갖 물자를 빠르고 효과적으로 빼돌리기 위해 전국에 아스팔트 포장 도로를 건설했다.

 

일제는 일명 '번영로'로 불리는 신작로를 내며 가난한 백성들에게 '번영'을 줄 것이라 선전했지만 돌아온 것은 지독한 굶주림뿐이었다.

 

조상 대대로 농사짓던 땅은 신작로로 강제 편입되거나 일제를 등에 업은 일본인 대지주들에게 헐값에 팔아야만 했다.

 

피눈물 나는 강제노역에 동원된 것은 물론 쌀을 모조리 뺏기는 바람에 만주에서 들여온 조를 쌀 대신 먹어야 했던 아픈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도로다.

 

제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1910년대 제주성 각 성문과 문루를 철거한 데 이어 1920년대에는 산지항을 건설하면서 제주성곽의 석재를 헐어 축항공사의 골재로 사용했다.

 

제주성문이 사라지면서 그 자리와 제주성안 곳곳에 동서남북을 잇는 현대식 아스팔트 포장 도로가 생겨났고 이후 해체된 성곽의 석재는 고스란히 신작로 등을 통해 제주 앞바다로 운반돼 사라졌다.

 

북신작로와 서북로, 관덕로, 동문로 등 일정한 폭과 직선으로 곧게 뻗은 도로는 기존 제주의 옛길, 옛 마을의 모습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연합뉴스=변지철 기자]

 

[※ 이 기사는 '제주시 옛지명'(제주시·제주문화원), '제주어 기초어휘 활용사전'(강영봉·김순자 저), '구한말 제주읍성의 도로체계에 관한 연구'(양상호), '지금, 여기 제주 원도심'(도시재생지원센터) 등 책자와 논문을 참고해 원도심의 역사를 소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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