곶자왈은 남과 북의 식물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따뜻한 곳에 사는 식물인 남방계 식물과 추운 곳에 사는 식물인 북방계 식물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제주도 생성의 역사와 곶자왈의 지질․지형적 특성이 결합한 결과이다.
제주도는 불과 1만여년 전에야 섬이 되었다. - 1만년은 인간의 시간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이지만 지질학적 시간으로는 찰나이다. - 즉, 그 이전에는 섬이 아닌 대륙의 일부였다. 빙하기가 끝나고 간빙기가 되면서 물이 녹아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섬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제주가 섬이 되기 이전에는 북방계 식물과 남방계 식물이 제주에 분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간빙기가 되고 제주가 따뜻해져가자 추운 곳을 좋아하는 북방계 식물은 기온이 낮은 한라산으로 자리를 이동하게 된다. 당연히 따뜻한 저지대의 북방계 식물은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한라산의 시로미, 구상나무, 암매는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들은 북방계 식물로서 한라산 일대에서만 명맥을 이어가게 된 것이다.
시로미 열매는 시베리아의 북극곰이 좋아하는 열매이다. 즉, 빙하기 때 제주로 내려왔던 추운 북쪽 지방의 식물이 간빙기가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한라산에 남아 있는 것이다. 국내에서 한라산 아고산대 지역에만 서식하는 산굴뚝나비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북방계 식물의 피난처로 한라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산간지대에 주로 분포한 곶자왈이라는 독특한 숲은 북방계 식물을 한라산까지 올려 보내지 않고도 품어 안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한들고사리,좀나도히초미,좀고사리,골고사리,큰톱지네고사리,왕지네고사리 등 북방계 식물은 곶자왈에 터를 잡아 살고 있다. 실제로 한들고사리의 경우 만주, 시베리아 등에 분포하는 식물이다.
남방계 식물의 경우에도 밤일엽, 큰봉의꼬리, 가지고비고사리, 더부살이고사리 등이 곶자왈에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상의 진화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곶자왈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모델이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했는지 이유를 과학적으로 들여다보자.
곶자왈은 주로 중산간 일대에 분포한 숲으로서 고지대에 위치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북방계 식물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그 답은 바로 용암이 굳으면서 만들어진 지질적 특징이 곶자왈만의 미기후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곶자왈의 온도는 일반적인 숲보다 훨씬 낮은 온도를 나타낸다.
곶자왈은 오름이 만들어낸 숲이다. 독립화산체인 오름에서 분출한 용암이 굳은 후에 숲이 들어선 것이다. 그러다보니 곶자왈은 돌무더기 숲이다. 수많은 돌무더기와 함몰지, 풍혈지, 궤, 용암동굴이 곶자왈의 지반을 이루고 있다.
곶자왈 보전을 중심으로 하는 환경단체인 (사)곶자왈사람들이 곶자왈의 함몰지 온도를 조사해 본 결과, 지표면의 한 여름 온도는 섭씨 23.1도인데 비해 함몰지 바닥은 섭씨 8.4도로 나타났다. 즉 함몰지 내 기온이 제주시 겨울 평균기온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아 북방계 식물이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반면에 곶자왈 내 함몰지와 지표간의 온도차는 섭씨 14.7도여서 해발로 치면 2,200m의 차이가 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니까 곶자왈이라는 숲은 여름과 겨울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기후 위기 시대에 우리에게 큰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한라산의 기온도 올라가면서 거기에 살고 있는 북방계 식물인 구상나무, 암매, 시로미 등이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어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러나 곶자왈은 지구 온난화가 심화됨에도 불구하고 북방계 식물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숲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곶자왈은 기후 위기의 대응과 함께 생물다양성의 측면에서 매우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숲이다.
그 중에서는 종 자체가 없어지는 멸종위기동식물들도 있다. 또한 곶자왈에서 볼 수 있는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식물은 제주고사리삼을 포함하여 8종이나 된다. 그리고 곶자왈에 자생하는 특산식물도 20종이나 된다. 이러한 동식물들이 곶자왈로 피난하여 생명을 유지 하고 있는 것이다. 멸종위기 생물 중에서도 제주고사리삼은 더 특별하다.
제주고사리삼은 세계에서 선흘곶자왈 일대의 건습지에서만 분포한다. 그것은 제주고사리삼이 '파호에호에용암이 지반을 이룬 상록활엽수림 속의 건습지에, 겨울에는 하늘이 트여 햇빛을 받을 수 있는 낙엽수'아래에서만 서식하는 아주 예민한 생태적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까다로운 서식 조건을 맞추기 어렵다보니 제주고사리삼이 선흘곶자왈 안에서도 매우 제한적으로만 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주고사리삼은 그 종에 대한 보전가치도 높지만 서식지 자체의 지질학적․생태적 가치도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때는 한반도 최대의 상록활엽수림이라 불리던 선흘곶자왈은 도내 곶자왈 중에서도 가장 많이 훼손된 곳이다. 수십 년 전부터 묘산봉관광지구, 채석장 그리고 최근에는 자연체험파크까지 개발이 멈추지 않고 있다. 특히 개발과정에서 수많은 제주고사리삼 군락지가 훼손되었지만 제주도당국에서는 다른 곳으로 이식하거나 울타리를 치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사업승인을 해줘버렸다.
그것은 지금도 현재진형형이다. 이제, 제주고사리삼은 식물 자체뿐만 아니라 독특한 서식지 자체를 보전하는 방향으로 가야한다. 섬처럼 남겨놓고 주변을 개발해 버리는 행위는 결국 제주고사리삼의 멸종을 가속화 하여 지구상에 유일하게 있는 식물을 영영 못 보게 될 것이다. /양수남 제주자연의벗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