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수원에 사는 A씨(43) 부부는 2박3일 일정의 제주여행에서 렌터카를 예약하지 않았다. 렌터카 비용이 비싸서도 아니고, 성수기 예약에 실패해서도 아니다. 운전할 걱정없이 점심, 저녁 반주를 즐기기 위해서다. 부부는 둘 다 애주가다. 먼 곳으로 여행을 간다치면 운전대를 잡을 한 사람은 술을 양보해야만 하는 상황이 불편했다. 함께하는 여행인데 함께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마침 아이들을 부모님 댁에 맡기고 부부끼리만 떠나는 온전한 ‘힐링 여행’이다. A씨 부부는 이번 여행에서는 아무 걱정없이 점심엔 맥주나 막걸리를, 저녁엔 ‘한라산 소주’를 즐길 계획이다. 일정은 한담에서 곽지해수욕장까지만 느슨하게 잡았다. 콜택시를 활용하면 이동수단도 해결된다. A씨 부부는 제주바다가 잘 보이는 식당에서 느긋하게 술잔을 기울일 생각에 얼른 여행 출발일자가 오길 기대하고 있다.
# B(22)씨와 C(23)씨, D씨(22)는 제주에서 처음 만난 사이다. 각각 ‘혼여’를 왔지만 여행목적은 같다. 천천히 도보로 여행을 하면서 제주를 온전히 즐기는 것. B씨는 이날 아침도 숙소에 누워 오늘 갈 곳을 정하기 위해 여행 커뮤니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C씨가 작성한 글이 눈에 띄었다. 제주공항 인근에서 사려니숲까지 택시비를 분담할 동행을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검색해보니 대중교통으로 1시간30분, 자동차로 40분, 택시비로 약 2만원이 나오는 거리였다. B씨는 C씨에게 연락했고, 곧이어 D씨가 합류했다.
이날 오후 1시 제주공항에서 만난 세 사람은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함께 택시를 잡았다. C씨가 대표로 택시비를 결제했고, B씨와 D씨는 각각 3분의 1씩을 C씨에게 바로 입금했다. 세 사람은 각자 따로 놀다가 오후 4시30분쯤 다시 입구로 모이기로 했다. 제주시내로 돌아가기 위해서다. 문득 D씨가 새 제안을 했다. 저녁에 유명 흑돼지 식당에 가고 싶은데 혼자서 가기 어려우니 동행하자는 것이다. B씨와 C씨는 흔쾌히 수락했고, ‘천천히 잘 구경하고 나중에 보자’며 가벼운 마음으로 흩어졌다.
# E(29)씨는 이번 제주여행을 다른 때보다 더 철저히 계획했다. 반려견 ‘꼬미’와 둘이서 떠날 예정이기 때문이다. 비행기 안에서 심하게 낑낑거릴까봐 케이지 훈련도 했고, 반려견 동반이 가능한 렌터카 업체도 수소문했다. 숙소도 당연히 반려견 동반호텔로 잡았고, 반려견 동반이 가능한 식당과 카페를 미리 알아봤다. 자연을 좋아하는 꼬미를 위해 2박3일 대부분의 일정을 야외로 잡았다. 너무 오래 걸으면 꼬미가 지칠까봐 ‘개모차’도 준비했다. 혹시 모를 돌발상황을 대비해 물티슈와 배변패드도 넉넉히 챙겼다.
막상 제주에 도착하고 보니 모든 걱정거리는 기우였다. 호텔 측은 저녁 늦게 도착한 E씨와 꼬미를 위해 수제간식을 준비해줬다. 호텔 조식도 꼬미와 함께였다. 해변가에 가니 꼬미 말고도 다른 개들이 주인과 함께 걷고 있었다. 점심에 찾은 반려견 동반식당에는 반려견을 위한 특별한 메뉴도 있었다. 꼬미는 일정 내내 제주의 흙, 잔디, 꽃, 바다냄새를 맡으며 여행을 만끽하는 것처럼 환한 표정을 지었다. E씨는 억새가 아름다운 가을에도 꼬미와 함께 제주를 찾을 예정이다.
제주여행 풍속도가 바뀌고 있다.
팬데믹 시대에서 엔데믹 시대로 넘어왔지만 흐름을 이미 탔다. 1인 가구 증가 등으로 확산하고 있던 개인화 풍조는 코로나19로 인해 급격히 가속화됐다. '모두' 보다는 '우리', '우리'보다는 '나'에 집중하는 사회다.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 제주에서는 이를 반영하듯 다양한 여행 형태가 나오고 있다.
앞서 한국관광공사는 2019년 국내여행 트렌드 중 하나로 다세대 가족여행을 꼽았다. 베이비붐세대와 밀레니얼세대가 함께 즐기는 다세대 가족여행이 점진적으로 확대될 것으로 봤다. 소셜미디어 상에서 국내여행 관련 키워드로 가족여행에 대한 언급량이 3년 연속 증가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국내 주요 여행사들도 효도관광 상품 마케팅을 강화하고 있었다. 제주에서도 곳곳에서 무리를 이룬 다세대 가족여행객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듬해 1월 코로나19 국내 첫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전국 곳곳에서 집단감염이 시작됐고 대규모 유행으로 번졌다. 결국 2020년 3월 ‘사회적 거리두기’가 발표됐고, 6월부터는 단계별로 집합금지와 영업제한 등을 설정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체계화됐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코로나19 상황에 따라 단계를 오르내리며 강화와 완화를 반복했다. 제주에서는 거리두기 단계 격상이 될 때마다 가족여행객들을 중심으로 환불 전쟁이 벌어졌다. ‘N명 이상 사적모임 금지’ 때문이다. 특히 비동거 가족을 포함한 다세대 가족여행을 계획했던 이들은 이때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는 등 큰일을 치렀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가족, 커플, 친구 등 소수의 유대감이 강한 동반자끼리의 여행이 점점 선호됐다. 집단보다는 개인의 기호 및 취향이 점점 도드라졌다. 키즈여행, 반려동물 여행, 혼자여행 등 다양한 형태의 여행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어났다.
마침내 지난해 4월 사회적 거리두기가 전면해제됐다. 하지만 단체여행객들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고 있다. 2019년 전체 여행의 23.9%를 차지했던 6인 이상 동반 여행은 2020년 8.4%로 급감한 뒤 2021년 3.9%로 바닥까지 떨어졌고, 거리두기가 해제된 해인 2022년에도 9.5% 밖에 회복하지 못했다.
반면 1~2인 소규모 여행객 비율은 2019년 31.2%에서 2020년 47.6% 까지 치솟았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된 2022년에도 40.4%로 40%대를 유지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4인 이하 여행객 비율은 2019년 대비 증가했고, 5인 이상 여행객 비율은 감소했다.
관광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 이후 자신의 취향과 관심사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화되면서 여행에도 이를 반영하려는 행태가 가속화됐다”면서도 “코로나19가 삶의 방식과 여행 트렌드를 뒤집은 것은 맞지만 관광업계에서는 가족형태의 다양화도 눈여겨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에는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4인 가족이 보편적이었다면 현재는 아이를 낳지 않고 부부끼리 사는 딩크(DINK)족, 혼자 사는 1인 가구,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출산하는 가구 등 형태가 다양해졌다”고 설명했다.
2000년의 가구원 구성은 ▲1인 15.5% ▲2인 19.1% ▲3인 20.9% ▲4인 31.1% ▲5인 이상 13.4% 등 4인 가구가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반면 22년 후인 지난해의 경우 ▲1인 34.5% ▲2인 28.8% ▲3인 19.2% ▲4인 이상 17.6% 등 1인 가구의 비율이 가장 높았다. 1~2인 가구를 합하면 절반이 넘는 63.3%나 차지한다. 게다가 2인 가구 사이에서도 친구, 연인 등 법적 혼인관계나 혈연관계도 아닌 남남끼리 사는 비친족 가구도 크게 늘고 있다.
관광업계 관계자는 “1, 2인 가구는 워라밸 트렌드 등의 영향으로 휴가철뿐 아니라 연중 수시로 국내여행을 즐기는 경향이 더 강하다”면서 “1인 가구라 하더라도 연령별, 소득별 등 다양한 변수가 있다. 그만큼 여행의 형태가 다양해졌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코로나19 장기화와 1인 가구 가속화가 맞물려 단체관광 대신 가족·친구·연인·나홀로 등 소규모 여행이 주류가 됐다는 것이다. 개인의 관심사나 취향과 관련된 경험을 여행에서도 추구하면서 개개인에 맞는 여행 테마가 나오고 있다. 특히 제주는 국내 대표 관광지로서 교통이 편리하고 정보도 많으며, 여행자 커뮤니티도 갖춰진 데다가 자연친화, 힐링여행이 인기를 얻으면서 대상지로서 관심이 집중됐다.
제주의 자연을 온전히 느끼며 스트레스를 치유하는 명상 여행과 요가 여행, 전용기까지 등장한 반려동물 동반 여행, 제주 해변가에서 쓰레기를 줍는 비치코밍 등 친환경 여행, 전국 독립서점의 90%가 몰려있다는 제주에서만 즐길 수 있는 서점 탐방, 렌터카를 빌리지 않고 마음 편히 즐기는 술 여행, 조용한 시간을 위해 일부러 제주 외곽지로 가는 ‘촌캉스’, 여행자 커뮤니티를 활용한 '혼여'와 '동행'의 병행...
과거에는 가능한 한 많은 관광명소를 찍는 등 여행 중 이동이 많았다면 이제는 제주의 한 지역에서 느긋하게 오래 머무는 경우가 많아졌다. 특별히 유명 관광지는 방문하지 않는 경우도 늘어났다.
혼자 6박7일 일정으로 제주에 온 김모(30)씨는 “관광지는 잘 둘러보지 않는다. 쉬러 왔는데 사람 많은 곳에 가고 싶지 않다”면서 “숙소 인근 산책길을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 카페가 있으면 들어간다. 지금 내가 제주에 있다는 것 자체가 여행”이라고 말했다.
주말을 이용해 두 달에 1번씩 제주를 찾는다는 정모(34)씨는 “자주 오지만 1박 2일, 2박 3일 등 일정이 짧아서 긴 거리를 이동하지 않는다”면서 “한 지역만 찍어서 그곳에서만 돌아다닌다. 나도 관광객이지만, 관광객이 없는 숨겨진 절경을 발견하면 짜릿하다”고 말했다.
관광업계 관계자는 “국내여행은 당분간 이런 경향이 유지될 것으로 본다. 제주는 전국 관광객이 다 모이다보니 즐길 수 있는 테마가 많아 기조가 두드러지는 것”이라면서 “개인 및 소그룹의 여행목적,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이 반영된 ‘맞춤여행’이 대세라서 업계는 전략 다양화로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은숙 제주관광공사 사장은 "최근의 여행 트렌드는 '어디에 가서 즐길까'에서 '무엇을 하면서 즐길까'로 변화하고 있다. 흥미로운 즐길 거리야말로 엔데믹 시대의 높은 여행수요를 이끄는 원동력"이라면서 "제주관광에 있어서도 특별한 체험, 동호회 활동, 개개인의 개성을 반영한 취미활동 등 여행을 통해 가치 구현을 추구하는 경향이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제주관광공사는 최근 다양한 레포츠·문화·예술 콘텐츠와 연계한 33개 체류형 여행 프로그램인 'Learning Holidays in Jeju(배움이 있는 휴가)'를 선보이는 등 장기 체류를 유도하는 여행 콘텐츠 발굴에 애쓰고 있다. [제이누리=이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