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올해보다 3.2% 늘어난 677조4000억원 규모 내년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증가율로는 역대 최저인 올해 2.8%보다 높지만, 내년 경상성장률(실질 성장률+물가상승률) 전망치 4.5%보다 낮은 ‘긴축 예산’이다.
정부가 3년 연속 20조원대 지출 구조조정을 하고, 건전재정 기조를 이어가는 것은 긍정 평가할 만하다. 불필요한 예산을 덜어내고 취약층 보호와 미래 성장동력 확보에 집중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정부가 씀씀이를 최소화하며 허리띠를 졸라매도 국가채무는 올해 1196조원에서 내년 1277조원으로 불어난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도 올해 47.4%에서 내년 48. 3%로 높아진다.
문제는 저출생ㆍ고령화로 재정 운용의 근간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고정비용처럼 빠져나가는 의무지출이 가파르게 늘어나 정부 계획대로 지출을 조정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의무지출은 공적연금과 국채 이자, 지방교부세, 지방교육재정교부금 등 법에 지급 의무가 명시돼 있다. 의무지출은 정부가 필요할 때 줄이거나 늘릴 수 있는 재량지출과 상반된 개념이다.
의무지출은 이미 올해 전체 재정지출에서 52.9%를 차지하며 절반을 넘어섰다. 앞으로 5년간 연평균 5.7%씩 늘어나 2028년에는 57.3%에 이를 전망이다. 경직성 예산인 의무지출 비중이 커짐은 그만큼 재정을 통한 경기대응 능력이 떨어진다는 의미다.
내년 지출이 20조8000억원 늘어난다지만 의무지출 증가액만 18조2000억원이다. 정부의 정책 의지가 반영되는 재량지출 예산은 불과 2조6000억원(0.8%) 증가에 머문다. 세수가 부진한 판에 재량껏 쓸 예산이 별로 없음이다. 개별 부처에서 신규 예산사업을 추진하려면 기존 사업 구조조정으로 대응해야 했다.
정부는 24조원의 지출 구조조정을 단행해 사회적 약자 복지와 경제활력 확산 등 국가가 해야 할 일에 집중 투입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선심성 예산도 여전하다. 내년 병장 월급이 전역 때 주어지는 자산형성지원금을 합쳐 205만원으로 오른다. 이를 위해 병사 인건비 예산이 8000억원 넘게 늘어난다. 대선 공약 ‘병사 월급 200만원’을 실현하기 위한 무리수로 보인다.
국가장학금 지원 대상을 전체 대학생의 75%인 150만명으로 확대하면서 예산이 6000억원 가까이 늘어난다. 이로써 월 소득 인정액이 1700만원인 고소득 가구 자녀도 혜택을 받는다. 총선을 앞둔 3월, 윤석열 대통령이 주재한 민생토론회에서 청년 대책으로 내놓은 것을 밀어붙였다.
윤 대통령은 “지난 정부는 5년 동안 400조원 이상의 국가채무를 늘렸다”며 “재정 부담이 크게 늘면서 정부가 일하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집권 3년차로 세 번째 예산안을 짜면서 전 정부를 탓했다. 현 정부는 언제까지 전 정부 탓을 할 텐가.
정부의 5년 단위 재정운용 전략과 목표인 2024~2028년 국가재정운용계획상 재정지 출 연평균 증가율은 3.6%, 재량지출 증가율은 1.1%에 머문다. 이 정도 정부 지출로 저출생ㆍ고령화에 대비하고 잠재성장률을 높이는 투자가 가능할까.
경기침체 상황에서 재정의 경기 마중물 역할도 고려해야 한다. 최근 수출은 호조세이지만 내수는 물가상승에 따른 실질임금 감소로 부진하다. 아파트값 불안과 가계부채 급증세 탓에 통화정책의 운신 폭이 좁아지면서 재정이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해마다 20조원씩 급증하는 의무지출 예산도 다시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법으로 정한 의무지출에서 비효율을 제거함으로써 재량지출 여력을 확대해야 한다. 무엇보다 급속한 저출생으로 예산이 남아도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2023년 75조8000억원) 칸막이를 허무는 작업이 필요하다.
교육재정교부금은 내국세의 20.79%를 할당하도록 법에 규정돼 있다. 학생 수가 줄어드는 데도 세수가 늘면 자동으로 증가하는 교육재정교부금은 개편 ‘0순위’가 돼야 한다. 국회에서 여야가 논의해 수술대에 올려야 할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 3년 세금감면 기조를 유지함으로써 스스로 재정 확충 여지를 축소했다. 감세 기조를 고수하며 경기 회복, 복지 확대, 미래 대비 투자 등 재정의 역할을 방기하는 것은 ‘돈 풀기’ 포퓰리즘 못지않게 위험하다. ‘감세는 보수, 증세는 진보’ 식의 낡은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재정건전화 노력은 긍정적이지만 세수를 늘리기보다 지출 억제에 무게를 두는 것은 지속 가능하기 어렵다. 정부는 세수 기반 확충에도 신경 써야 할 것이다.
국민생활 안정과 미래 성장동력 육성, 국가적 위기 대비를 위한 합리적 재정 개혁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 선심성 예산 씀씀이를 지양하고, 국가채무와 재정적자를 일정 수준 이내로 억제하는, 구속력 있는 재정준칙을 법제화하는 것은 기본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양재찬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