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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귀거래사] 해녀생활 6년차 귀향 30대 이유정 작가 ... 꿈 많은 소녀, 물빛을 품다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연신 터지는 학생들의 웃음소리와 카메라 셔터 소리 사이로 제주의 바다를 담은 전시 준비가 한창이다.

 

제주 성산 섭지코지 인근에 자리한 한화 아쿠아플라넷. 다양한 색감으로 해녀의 얼굴을 표현한 그림 앞에 한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청년 해녀이자 작가, '해녀고기' 음식점 사장이기도 한 이유정(36)씨.

 

전시 담당자와 조명 위치를 조율하고,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던 그는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아직 전시회 개막 전임에도 그는 바다처럼 평온하고, 동시에 에너지로 가득 차 있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물 그리고 숨: 제주 해녀의 바당'. 물질도 하고 그림도 그리는 이 사람은 이번 전시에서 작가이자 해녀로 나머지 5명과 함께 참여하고 있다.

 

붓과 오리발, 두 가지 도구를 오가며 살아가는 이씨는 이 공간을 채우는 그림 속 해녀들처럼 단단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해녀복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 그렇게 불릴 만큼 그는 해녀로서도 예술가로서도 자기 삶을 정직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제주섬 북쪽 끝자락 이호테우해변을 낀 제주시 이호동에서 태어난 그는 지금도 가족과 함께 살아간다. 아버지는 어부, 어머니는 농사일로 가족의 생계를 꾸렸고, 유정은 어린 시절부터 장녀로서의 책임감을 자연스레 짊어지게 됐다.

 

"우리 집은 늘 빠듯했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컸죠."

 

하지만 그런 그도, 어릴 적엔 천방지축에 가까운 아이였다. 어디서든 웃음을 만들고, 친구들에게 에너지를 퍼뜨리는 존재였다.

 

"저 진짜, 어릴 땐 개그맨이 되고 싶었어요."

 

웃음을 좋아했고, 튜바를 불겠다고 음악실을 기웃거렸으며 귀여운 캐릭터를 따라 그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즐거웠단다.

 

예쁜 편지지를 따라 자신만의 편지지를 그리고, 사생대회를 나가 상도 받던 그 시절. 동네 골목에서 장난기 가득하게 놀던 그는 해녀마을에서 자라면서 바다는 그저 놀이터라 생각했던 것이 지금 돌아보면 삶의 터전으로 다가간 신호였다.

 

해녀는 그저 언젠가 어른이 되면 자연스레 하게 될 일인 줄 알았다. 그 시절은, 그저 세상이 해맑고 단순했던 시기. 지금 생각하면 '똥군(童軍, 초보 해녀) 해녀처럼, 바다를 모른 채 웃음을 좇던 시절이었다.

 

그는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 졸업하자마자 짐을 싸들고 서울로 떠났다.

 

"제주가 너무 작아 보였어요. 난 더 큰 세상으로 가야지. 그렇게 생각했죠. 무작정 떠났어요."

 

하지만 서울은 생각보다 매몰찼다. 낮엔 전단지를 돌리고, 밤엔 액세서리 노점상을 했다. 공장, 편의점, 식당을 전전하며 반지하 월세방에 몸을 뉘였던 나름 88만원 세대의 표상이었다. 부모님은 '금방 돌아 올 거'라고 했지만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버텼지만 결과는 아니었다. 몸은 축나고, 통장에는 늘 0원. 그게 현실이었다. 녹록지 않았다.

 

"그래도 그 시간이 나를 키웠어요."

 

결국 3년 만에 제주로 돌아와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린 시절의 객기를 인정했고, 울음을 참지 못한 채 스스로를 돌아봤다. 그 시기는 어쩌면 하군(下軍, 초급 해녀) 해녀로 성장해가던 때였는지도 모른다. 꿈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던 천진난만한 아이는 현실의 벽을 몸소 체험하며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운명처럼 바다가 다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배를 타고 나가시면 하염없이 포구에서 기다리던 날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바다가 눈에 들어오자 쓰레기, 부표, 폐어구, 그리고 여전히 물질을 이어가는 해녀 삼촌 등. 이전에는 배경처럼 느껴졌던 것들이 다시 특별하게 다가왔다.

 

"아버지는 반대하셨어요. '멀쩡한 나도 바다가 위험한데, 너는 수영도 못 하잖아.' 근데 전 해보고 싶었어요. 너무 해보고 싶었어요."

 

수영을 배우고, 스킨스쿠버 자격증도 따고, 해녀학교에 지원서를 냈다. 첫 해엔 떨어졌지만 두 번째 도전 끝에 2019년, 고향 이호동과 한참 먼 한림읍 한수풀해녀학교를 졸업했다. 이제 정식 해녀가 됐다. 그리고 그는 물질을 시작했다.

 

해녀가 된 이후 그의 하루는 이전보다 더 바빠졌다. 아침엔 바다로 나가고, 오후엔 자신이 운영하는 고깃집 ‘해녀고기’로 향했다.

 

틈틈이 유튜브로 그림을 배우며 오래 전 접어뒀던 미술의 꿈도 다시 꺼냈다. 그리고 결국 제주대 미술학과에 편입했다.

 

"제 돈으로 물감 사고, 그림 그려서 포트폴리오 만들고, 교수님 앞에서 '이게 제 작업입니다' 하고 보여줬을 때, 진짜 눈물이 났어요."

 

그는 마치 중군(中軍, 중급 해녀) 해녀처럼, 이제 삶의 리듬을 익혀가고 있다. 몸이 익자 마음도 따라오기 시작했다. 전에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하나씩 현실이 됐다.

 

그의 그림에는 바다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 바다엔 빛내림과 파도만 있는 게 아니라 두려움과 고단함도 함께 있다.

 

"해녀가 멋있게만 보일 수도 있는데 사실 바다 안은 무섭기도 해요. 물살이 거셀 때 방심하면 낚싯줄에 걸리기도 하고, 근데 저는 그걸 솔직하게 그리고 싶었어요."

 

물질만이 그의 활동 전부는 아니다. 바다에 쓰레기가 쌓이면 그는 먼저 움직였다. 친구들을 모아 트럭에 폐어구를 묶어 올리고, 크레인이 없어도 손으로 끌어냈다.

 

"'단체 만들어라', '예산 받아라', '법인을 만들어라' 이런 말 많이 듣죠. 근데 전 그냥 제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날, 제 몸으로 해내고 싶어요."

 

 

그런 활동 덕분에 한국어촌어항공단 제주지사에서 특별상을 받기도 했지만 정작 그는 상보다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는 것을 더 원했다. 한계치에 다다른 바다를 대하는 태도, 제주산업 역군인 해녀를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스스로를 알아주는 따뜻한 마음.

 

이호테우 바닷가에서 물질을 시작한 이후, 그가 속한 어촌계에서도 어린 해녀는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 처음엔 고운 시선만 있는 건 아니었다.

 

"어촌계 어르신들은 처음에 절 의심의 눈초리로 보셨어요. '젊은 애가 뭘 알겠냐', '요즘 애들은 오래 못 간다', 그런 핀잔도 들었죠."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물질을 나가고, 정화 활동에도 앞장섰다. 방파제 테트라포트에 직접 들어가 폐어구를 끌어내는 날이면 원로 해녀들도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해녀복 입고 해양쓰레기를 혼자 옮기고 있는데 해녀 부장이 그러시더라고요. '네가 뭘 얼마나 한다고 그렇게 다니냐. 그래도 고맙다 다치지 말아라.' 그 말 듣고 한참을 울었어요. 그날은 제가 진짜 해녀가 된 것 같았어요. 관심 없는듯해도 안보는거 같았는데도 저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있었고 그 공동체에서 인정을 받았다니깐요."

 

사람들은 그를 두고 해녀복이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스스로도 인정한다.

 

"제복은 그 직업의 존경과 상징이 묻어나잖아요. 물질을 갈때 입는 고무옷과 해녀문화를 알릴때 입는 물소중이.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 해녀의 풍부함을 말할 수 있어서 좋아요. 이게 천직이에요. 해녀복 입으면 이상하게 잘 어울린다고 다들 그래요."

 

지금의 그는 상군(上軍, 숙련된 해녀)에 가까운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해녀, 작가, 고깃집 사장, 미대생, 환경운동가. 1인 다역의 삶은 누구에겐 벅찰 수 있지만 그에게는 삶의 에너지다.

 

 

"해녀는 바다만 잘 들어가는 게 다가 아니에요. 함께 숨 쉬고,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돼야죠."

 

그의 꿈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언젠가는 진짜 대상군 해녀가 되고 싶다는 그는, 물질 실력뿐 아니라 해녀 문화를 알리고, 제주 바다를 지키며 더 많은 이들과 연결되는 존재가 되길 꿈꾼다.

 

"제 이름 석 자가 남는 삶. 제주에는 '김만덕'도 있고 '이유정'도 있다. 그렇게 기억되고 싶어요."

 

그는 지금도 여전히 제주 바다를 항해 중이다. 아직 대상군(大上軍)은 아니지만 분명히 그 길을 향해 가고 있다. 그리고 그 여정은 한 사람의 삶이 아니라 제주의 문화와 정신을 잇는 또 하나의 물줄기가 되고 있다.

 

"해녀 이유정? 아니요. 그냥 이유정이요. 제 이야기는, 제가 제일 잘 알잖아요. 저는 제 이름으로 제 길을 걷고 있어요."

 

물질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붓을 드는 시간. 그는 오늘도 '이유정'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만의 속도로 하루를 살아간다.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그의 항해는 아직 계속되고 있다. [제이누리=김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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