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차라리 어두워 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벽촌의 여름날은 지리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폐결핵 요양차 잠시 벽촌 시골마을에서 지내던 이상의 단편 수필 「권태」의 도입부 문장이다. 아무런 변화도, 할 일도 없는 벽촌에서의 무료함에 이상은 진저리친다. 무료함을 견디지 못한 마을 아이들은 논두렁에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누구 ×이 더 굵은지 ‘×싸기 시합’을 하면서까지 필사적으로 무료함과 싸운다.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의 무대는 아일랜드에 인접한 ‘이니셰린’이라는 가상의 작은 섬이다. 그 분위기는 문득 이상의 수필 「권태」를 떠올리게 한다. 이니셰린이라는 말은 아일랜드어로 ‘아일랜드의 섬’이라고 한다. 아일랜드도 섬이니 섬에 딸린 섬인 셈이다. 가뜩이나 외부와 단절된 섬에서 또 한번 단절된 곳이다. 갈라파고스 섬이 외부와 단절돼 진화가 멈춰버렸듯 이니셰린도 시간이 멈춘 듯하다. 바쁜 현대인은 가끔씩 일부러 바쁜 시간을 시간을 쪼개서라도 ‘멍 때리기’를 하는 모양인데, 24시간 멍 때릴 일밖에 없는 무료한 이니셰린 섬 사람들에게 무료함이란 맞서 싸워야만 하는 끔찍한 괴물이다. 이니셰린의 둘도 없는 친구인 파우릭과 콜름은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권태로운 섬에서
치솟은 물가 때문에 가계살림이 버거운데, 나라살림도 못지않게 심각하다. 올해 세금이 정부가 예산을 짜며 예측한 것보다 큰 폭으로 덜 걷히기 때문이다. 나라살림 밑천인 국민 세금이 부족하면 국채를 발행하는 방식으로 빚을 내거나 외환시장의 수급 안정을 위해 마련한 외국환평형기금 등 다른 데서 돌려써야 한다. 올 1~7월 국세 수입은 217조6000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3조4000억원 적다. 예산을 편성할 때 설정한 국세 수입 목표(400조5000억원) 대비 얼마나 걷혔는지 보여주는 세수 진도율은 54.3%. 이 또한 지난해보다 11. 6%포인트 낮다. 이런 추세라면 연말까지 걷히는 세금은 당초 세수 추계보다 60조원 정도 적은 340조원대에 그칠 전망이다. 세수 오차율이 15%나 된다. 2021년 17.8%(61조3000억원), 2022년 13.3%(52조5000억원)에 이은 두자릿수 오차다. 2000년 이후 세수 오차율이 평균 4%대였던 것과 비교하면 올해도 세수 전망은 완전히 빗나갔다. 3년 연속 두자릿수 오차율 기록은 1988~1990년 이후 33년 만이다. 올해 세수 오차는 반도체 경기 불황으로 대기업 실적이 악화하면서 법인세가 덜 걷힌 데다
오늘은 어머니가 그렇게 기다리는 일요일이다. ‘죽어도 교회에 가서 죽겠다’는, 그 날이다. 어머니는 일요일을 ‘주일’이라 부른다. ‘주님의 날’이란 뜻이다. 어머니가 주일을 그토록 기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한 건, ‘일을 하지 않고 쉴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농사철의 농촌은, 그야말로 어린 아이의 조막손도 아쉬울 정도로 분주하기 그지 없다. 농사란 때가 있고, 그 때를 놓치면 한 해 농사가 소망을 잃는다. 일꾼(놉)을 빌어서 하는 ‘모내기’ 같은 경우는 집안의 대사다. 어떤 이유로든 물릴 수 없는, 이웃들과의 약속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머니가 이른바 예수를 믿게 되면서부터 일요일은 주일이 되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안식일, 쉬는 날인 것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안식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안정되는 듯했던 물가가 다시 뛰며 불안해졌다. 8월 소비자물가지수가 1년 전보다 3.4% 올랐다. 6~7월 두달 연속 2%대였던 물가상승률이 석달 만에 3%대로 올라섰다. 폭염·폭우 여파로 농산물 가격이 급등하며 영향을 미쳤다. 국제유가가 다시 오른 것도 악재로 작용했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추석이 코앞인데 ‘금사과’로 불릴 정도로 명절 성수품인 과일값이 크게 올랐다. 올가을 과일 가격은 봄철 저온 피해와 여름철 호우의 영향으로 작황이 부진해 지난해보다 전반적으로 비쌀 것으로 관측됐다(한국농촌경제연구원 전망). 게다가 국제유가는 9월 들어 더 큰 폭으로 뛰었다.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가 연말까지 원유 감산을 연장하기로 결정하자 10개월 만에 다시 배럴당 90달러를 넘어섰다.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할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동절기 물가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물가가 다시 상승하는데 성장은 계속 둔화하는 모습이다. 2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1분기 대비 0.6% 증가했다. 2분기 연속 0%대 성장인 데다 내용도 좋지 않다. 소비와 투자가 위축된 가운데 수출보다 수입이 더 큰 폭으로 줄면서 힘겹게 성장세를 이어간 ‘불황형 성장’이다. 고금리에 따른
“힘내, 가을이다, 사랑해!”라는 말은 매그너스 재활 요양병원, 한원주 원장님의 마지막 인사말이다. 아침마다 이 병원 2층에서는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라는 노래가 나지막이 울려퍼진다. 그러면, 중증환자부터 치매 노인까지 모두 자신만의 그리운 누군가, 가고 싶은 어딘가를 떠올리며 노래를 따라 부른다. 노래가 끝나면 한 원장님은 병실을 순례하며 아침 진료를 시작한다. 한원주 원장님은 1982년, 국내 최초로 환자의 질병뿐만 아니라 정신과 환경까지 함께 치료하는 '전인치유소'를 열었다. 그리고 가난한 환자들의 생활비, 장학금을 지원하며 온전한 자립을 돕는 무료 의료봉사에 전념하였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서 아흔이 훌쩍 넘은 연세에도 환자를 돌보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알고 가족들도 힘겨워하는 치매 노인들을 위해 의술을 펼쳤다. 요양병원에서 받는 월급 대부분을 사회단체에 기부하며 주말이면 외국인 무료 진료소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주기적으로 해외 의료봉사도 다녔다. 90이 넘은 고령에도 주 5일을 병원에서 숙식하며 환자들과 동고동락을 하였다. 2020년 9월 30일, 9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별세 직전인 8월 7
마틴 맥도나(Martin McDonagh) 감독의 2022년 작품 ‘이니셰린의 밴시(The Banshees of Inisherin)’는 제목만큼이나 독특하고 흥미롭다. 그해 베니스 영화제를 석권하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여러 부문에서 최고의 후보에 올랐다. 더스쿠프의 ‘영화로 본 세상’, 이번엔 이 영화를 펼쳐봤다. 영화는 ‘이니셰린’이라는 아일랜드 가상(假想)의 작은 섬에서 벌어지는 파우릭(콜린 파렐)과 콜름(브렌던 글리슨)이라는 두 친구 사이에 절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소 황당하고 엽기적인 사건을 다룬다. 두 인물이 벌이는 짓들은 분명 황당한 코미디에 가까워 보인다. 그런데, 그 사건이 벌어지는 배경에 1922~1923년 터진 아일랜드 내전이란 비극적 역사를 밑그림으로 놓으면 대단히 마음 착잡해지는 비극적 블랙코미디가 보인다. 아일랜드 내전을 깔고 있는 이 영화의 각본을 쓰고 영화로 만든 인물은 짐작대로 아일랜드 출신이다. 맥도나 감독은 런던에서 차별받는 아일랜드 출신 가난한 노동자 부모 밑에서 태어나 ‘무학(無學)’에 가까움에도 탁월한 재능을 꽃피운 입지전적인 작가이자 감독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자부심은 남다르다. 맥도나 감독은 “스토리텔러의 유일한
정부가 656조9000억원 규모로 편성한 내년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올해보다 18조2000억원 많다. 증가율이 2.8%로 재정통계를 정비한 2005년 이후 가장 낮다. 직전 문재인 정부 시절 증가율(8.7%)은 물론 이명박·박근혜 정부 평균치(5% 중반)에도 못 미친다. 윤석열 대통령은 “전 정부가 푹 빠졌던 ‘재정 만능주의’를 단호하게 배격했다”고 밝혔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둔 선거의 해에 긴축예산을 편성한 것은 쉽지 않은 결단이다. 2017년 660조원이던 국가채무는 2022년 1000조원을 넘어섰다. 반면 올 상반기 국세 수입은 지난해보다 39조원 줄었다. 세수가 부족한 판에 건전재정 기조를 지키려는 고육책으로도 여겨진다. 그러나 올해 예산(5.1% 증가)도 긴축으로 인식되는데 내년 예산안 증가율을 더 낮춘 것은 긴축 속도가 과한 측면이 있다. 잠재성장률을 밑도는 1%대 저성장에 직면한 상황에서 재정긴축이 경기회복에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정 만능주의’를 배격한다며 ‘긴축 만능주의’로 기우는 건 아닌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반도체 경기 침체와 중국 경제의 성장세 둔화 등으로 내년 우리나라 성장률 전망치가 낮아지는 등 불확실
흑인 남학생에게 플린 신부가 동성 성추행을 했다는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마침내 흑인 남학생의 어머니인 밀러 부인을 학교로 부른다. 영문도 모른 채 학교에 찾아와 교장선생님이기도 한 알로이시우스 수녀로부터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야기를 들은 밀러 부인의 반응은 의외로 시큰둥하고 담담하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도 그녀의 시큰둥한 반응에 당황한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그 끔찍한 의혹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밀러 부인에게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한 문제이며, 부인께서도 저와 함께 반드시 밝혀야 하는 문제’라고 다그친다. 그런 알로이시우스 수녀에게 밀러 부인은 오히려 눈을 똑바로 뜨고 분노한다. 밀러 부인이 분노한 이유도 밝혀진다. 그 학생이 본래 동성애 성향이 있다는 것이며, 이 문제를 남편이 알면 아마도 아이를 ‘때려죽일 것’이라고 으르렁대듯 수녀에게 퍼붓는다. 또한 아이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흑인인 자기 아들이 요행히 얻은 백인학교 입학 기회를 살려 무사히 졸업하는 것이지, 신부와 그런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렇게 천지분간을 못한 채 아들 신세 망치려드는 알로이시우스 수녀를 질책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55년 만에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로 이름을 바꿨다. 산하 연구기관인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을 한경협으로 흡수 통합했다. 이에 따라 2016년 전경련을 탈퇴한 뒤에도 한경연 회원으로 남아 있던 삼성·SK·현대차·LG 등 4대 그룹 계열사들이 한경협 회원으로 승계돼 한경연에 가입하게 됐다.[※참고: 한경협 명칭은 정부가 정관 개정을 승인한 9월 이후 공식 사용한다.] 4대 그룹의 전경련 탈퇴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태 때문이다. 전경련이 청와대 요구로 미르·K스포츠재단에 회원사들이 거액 출연금을 내는 데 관여한 것으로 드러나자 정경유착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이때부터 숨죽였던 전경련은 윤석열 대통령의 멘토로 불리는 김병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이 회장직무대행을 맡으며 활동을 재개했다. 전경련은 일본의 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를 모델로 설립한 기업인 단체다. 경단련이 일본경영자단체연맹과 통합했듯 국정농단 사태 이후 전경련도 발전적으로 해체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하지만 전경련은 그 길을 회피하고 버티다가 윤석열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부활했다. 전경련은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설립 당시 이름으로 바꿨다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한경협은
100세 너머를 사는 장수노인의 특징은 무엇일까? 100세 이상 장수인을 400명 이상 연구해 온 박상철 교수(전남대 연구석좌교수)에 의하면, 첫 번째가 ‘부지런하다’는 점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걷든가, 텃밭을 가꾸든가, 잠시도 쉬지 않고 손발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장수의 선두를 달린다. 말하자면 남에게 일을 맡기지 않고 스스로 무언가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다. 마치 세월도 이들의 부지런함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왕성한 심신의 활동이, 결국 운동효과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더불어 뇌의 신경세포도 자극해주므로 치매가 생길 틈도 없애준단다. 그러한 삶의 속도를 유지함으로써 노화에 붙잡히지 않는 사람들이, 결국은 장수인으로 남게 되는 셈이다. 세월보다 한 발 앞서 삶을 박차고 달려나가는 인생 경주의 상급이라고나 할까? 둘째는 호기심이 왕성하다는 점이다. 동네 대소사를 꿰뚫고 있으며, 늘 새로운 것에 관심을 둔다. 셋째는 솔직하다는 사실이다. 무엇이든 가슴에 쌓아두지 않고 할 말이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다. 그렇게 감정을 표출함으로써 스트레스를 별로 받지 않게 된다. 넷째 잘 어울리려고 노력한다. 혼자 사는 노인이지만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고, 자식들과 동
영화 속에 ‘빌런’이 존재한다면, 영화 ‘다우트’ 속의 빌런은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몫이다. 통상 영화 속 빌런들이 적극적으로 악(惡)을 행한다면,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적극적인 악의 의지를 실행한다기보단 자신도 모르게 인식상의 오류를 저질러 악역이 돼버리는 빌런인 듯하다. 알로이시우스 수녀가 범하는 인식의 오류는 중학생만 돼도 배우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데카르트(Descartes)의 유명한 명제를 지키기 않기 때문이다. 이성적 판단에 따라 주관적 진리에 도달하는 과학적 방법을 정립한 데카르트의 본래 명제는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하고,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dubito ergo cogito, ergo sum)’는 삼단논법이다. 데카르트의 가르침은 ‘의심을 하기 때문에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주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고, 그러므로 비로소 내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코기토(인식ㆍcogito)’는 2가지로 나뉜다. ‘의심(doubt)’은 감각적 직관에 의한 ‘감성적ㆍ감각적 인식’이다. 이는 사물의 외면적인 느낌과도 같은 것이다. 반면 ‘생각(thi
올해 1%대 경제성장이 기정사실화한 판에 외국계 투자은행들이 내년에도 1%대 저성장을 지속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국제금융센터가 8개 투자은행의 7월 말 보고서를 집계한 결과, 내년 한국 경제의 성장률 전망 평균치는 1.9%에 머물렀다. 2월 2.1%였던 것이 3월에 2.0%로 내려가더니 급기야 1%대로 떨어졌다. 정부의 내년 성장률 전망치 2.4%와 차이가 갈수록 벌어지는 모습이다. 외국계 투자은행들은 올해 성장률도 1.1%로 낮게 본다. 내년에도 1%대에 머문다면 2년 연속 1%대 성장이다. 이는 관련 통계가 있는 1954년 이후 처음 나타나는 저성장 기록이다. 2% 수준인 잠재성장률에 못 미치는 경제성장이 이어지면 기업 도산과 일자리 가뭄을 초래하고, 경제 활력을 떨어뜨려 장기 저성장의 늪에 빠져들 수 있다. 2년 연속 1%대 저성장은 70여년의 한국 경제 발전사에 전례가 없다. 한국전쟁을 수습하던 1956년(0.6%), 2차 석유파동 직후인 1980년(-1.6%), 외환위기 이듬해인 1998년(-5.1%),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0.8%), 코로나19 사태 첫해인 2020년(-0.7%) 등 5개 연도 외에는 경제성장률이 2% 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