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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100세 일기] 102세 할머니에게도 여인의 감각은 본능적이다

 

오랜만에 멀리서 손자가 찾아왔다. 대기업의 일본지사를 거쳐 현재는 베트남에 체재 중 본사로 출장을 나왔단다. “니, 누게니?”라고 묻는 할머니에게 손자는 “할머니 손자 찬준이우다. 둘째 딸 정복이 아들마씸!”이라고 답한다.

 

요새 말로 상남자답게 생겼다(실은 J대를 수석 졸업하고 청와대를 다녀온 인재다^^). 사람 마음은 비슷한 걸까? “게매. 니네 어멍 닮안, 촘말로 잘 생겼져 이! 키도 크고 인물도 훠언허고....”라는 할머니 얼굴 위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손자의 두 손을 부여잡더니 얼굴을 이모저모 뜯어본다. 당신의 둘째 딸을 떠올리신 건지 눈가에 살짝이 물기가 어린다. 그걸 놓칠 리 없는 손자가 얼른 할머니를 부둥켜안는다.

 

“할머니 나 외국에서 회사 잘 다니고 이시난, 절대로 걱정허시지 맙서 예!” “아고, 경 해사주! 니네 어멍이 니를 봐시민 드러 자랑허멍 좋아헐 건디...”라며 끝내 말을 맺지 못하는 할머니. 손자가 품속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더니 할머니의 두 손에 꼬∼옥 쥐여 드린다. 그 봉투를 가슴에 품고서 하얗게 웃는 할머니 얼굴이 어쩐지 울상이다.

 

어머니의 2남 7녀 중 둘째 딸은 그야말로 일곱 딸 중에서 군계일학이었다. 제주시에서 여고를 마친 후 서울로 가서 어느 국회의원의 비서를 지내기도 하였다. 키도 크고 성격이 활달해서 의원의 신임이 두터웠던 듯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에서 들른 그 의원님 댁은 나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큰 집이었다. 그런 곳에서 전혀 기죽지 않고 당당하고 여유로운 언니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때는 ‘자유 교양 경시대회’라는 게 있었는데, 고전 읽기를 권장하기 위해 생긴 제도였던 듯하다.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까지 학년별로 정해진 고전을 읽고 시험을 치렀다. 6학년에게 주어진 과목은 논어·신약성경·불교설화·민담 등이었다. 서울에서 만난 멋쟁이 언니와 거대한 도시 풍경에 정신이 팔렸을까. 시험의 기억은 아스라한데, 언니가 사준 노란색 양복과 경복궁의 노란 은행잎은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둘째 언니가 고혈압으로 쓰러졌을 때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미국에서 귀국하셨다. 두 분은 장남의 아이들을 돌봐줄 목적으로 이민을 가 계셨다. 병원에서 더 이상 ‘가망이 없음’을 선언하자,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간절히 기도해 보시려는 뜻이었으리라. 하나님 아버지께 희망을 걸고 싶으셨던 거다. 두 분이 눈물로 기도하고, 어머니는 금식하며 기도하셨다. 그렇게 언니를 돌보시고 미국으로 떠나신 후 언니도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우리는 언니를 삼매봉에 있는 교회 묘지에 장례했다.

 

그래서일까? 어머니는 삼매봉을 지날 때마다 당신이 죽으면 그곳에 묻어 달라고 신신당부하신다. 우리를 못 믿으시는 건지 교회 목사님께도 간곡하게 몇 차례나 부탁을 하셨다. ‘당신은 꼭 거기에 묻히고 싶다’라고. 그곳에는 교회의 성도들이 희망하면 갈 수 있는 몇몇 교회들의 공동묘지가 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미국 볼티모어에 있는 아버지의 무덤과 그 옆에 남아 있는 어머니의 묘지 자리를 떠올린다. 어머니가 미국에 사실 때 아버지와 함께 미리 준비해 놓은 당신들의 자리다. ‘큰돈을 주고 사놓았다’라는 그 자리가 왜 싫으신 걸까.

 

이제야 알 것 같다. 손자 찬준이를 보며 어머니 눈가에 스치던 어두운 그림자의 의미를. 어머니는 당신의 아픈 손가락인 둘째 딸을 가슴에 묻으신 게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어려서 유독 몸이 약했던 그 딸을 남편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둘째 딸이 가슴을 울리는 거다. 어머니는 당신의 열 손가락(10명을 낳아서 2남 7녀를 키웠는데, 첫째 딸을 폐렴으로 잃고 말았다) 중에서 가장 아픈 손가락인 둘째의 옆자리에 남고 싶으신 모양이다. 아버지에게 들었다. 첫딸을 잃고서 통곡하는 어머니를 위해 ‘아기를 집 앞의 양지바른 터에 묻어주었노라’고. 그 아기 무덤을 보면서 눈물을 삼 키다가 ‘다시 딸을 낳고 나서부터 눈물을 거두어들이더라’고.

 

 

요즘 들어 어머니를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설움이 스며든다. 언니가 머리를 짧게 커트해 버려서 얼굴이 매우 초췌해 보인다. 왠지 풀이 죽어 보이기도 한다. 당신도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지 모자를 단단히 눌러쓰고 계신다. 102세 할머니에게도 여인의 감각은 본능적이다. 머리가 길어서 거울도 들여다보고, 손가락으로 빗질도 해보는 기회를 잃어버린 표정은, 이따금 쓸쓸하고 삭막해 보인다.

 

치매 노인이라고 해서 아름다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다. 이따금 내가 화장대에 앉아서 머리를 빗고 단장을 하는 사이 거울에 비친 어머니의 얼굴을 보면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상기되어 있다. 나의 손길을 통해 당신도 화장하는 기분을 느끼시는 걸까. 장난삼아 얼굴에 분칠을 해드리면 새색시처럼 수줍게 웃으신다. 여인의 향기가 느껴지면서 예쁘고도 행복해 보인다.

 

요즘도 삼시 세끼를 그런대로 잘 드시는 편이다. 물론 일일이 떠먹여 드려야 하지만 말이다. 해녀 출신이라서 그런지 비린내 나는 것을 좋아하시는 어머니는 생선만 있으면 얼른 입을 벌리신다. 때로는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손으로 생선을 뜯어서 얼른 입속으로 감추듯 넣으신다. 그만큼 구미가 당기시는 게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오늘도 습관처럼 ‘날 살려줍서’를 입에 달고 중얼거리시는 어머니에게 “밥 잘 먹는디, 오꼬시(어쩌다가 애석하게) 죽어부는 사름 보십디강? 살려도랜 허지 말앙 드리는 밥만 잘 드십서! 지금은 어머니가 대포 마을에서 제일 오래 살암수게. 어머니영 경 친헌 큰 년 어멍도 가고, 그추룩 오래 살암댄 부러워허던 부택이 어멍도 가수게. 어머니가 이젠 1등이난, 밥만 보민 고맙수다 허멍 잘 드시곡 나영 오래오래 같이 살게 예!”

 

오늘도 어머니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한 말씀을 하신다. “아고, 나 똘아(딸아). 나가 너무 오래 살멍 니만 저둘러점져(괴롭혀진다) 이!” “게민(그러면), 어머니 나 누게라?" “우리 똘!” “나 이름은?” “정옥이!” “아고, 잘 해수다. 절대로 나 이름 허정옥은 잊어불지 맙서, 예! 혹시 어디 강 길 잃어부러도 우리 정옥이 찾아도랜만 허민 됩니다 예!”

 

모처럼 이 기회에 어머니에게 내 이름을 단단히 기억시켜 놓는다. 요양원의 주간보호에 다닐 때는 이름표를 달고 다녔지만, 집에서 재가복지 요양보호를 받으면서는 이름표를 떼버렸다. 그래서 이따금 이름을 기억하는지 확인을 해본다. 정옥이 이름을 기억해 낸 당신이 자랑스러운지 어머니가 어린아이처럼 으쓱거리면서 뜻밖의 제안을 하신다.

 

“우리 이제부터랑 지만씩(저마다) 밥 행(해서) 먹게. 정심이(다섯째)는 정심이대로, 정숙이(넷째)는 정숙이대로. 정옥아(여섯째) 우리는 괴기 혼 꾸러미 사당 국 끓영 먹게(생선 한 꾸러미 사다가 국 끓여서 먹자). 각자 지만씩 먹어사 모음(마음)이 펜안헌다!” 아, 어머니는 다 알고 계신다. 정심이가 국과 반찬을 해서 날마다 정옥이네 집에 갖다 준다는 사실을. 아침에 먹은 호박국도 갈치조림도 다 정심이의 솜씨인 것을. 한 아름 꽂아놓은 국화꽃의 가을 향기마저도 다섯째의 손길인 것을. 게다가 정옥이는 아직도 부엌에 별로 마음이 없다는 현실을. 아, 내 인생의 영원한 숙제 요리의 어려움이여....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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