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술용 덴탈 마스크 100원이다. 부직포 3중 구조, 감염차단 필터를 단 수술용 덴탈 마스크다. 하늘색이 하얀색 천을 은은하게 감싼다. 그 느낌은 아기뺨을 부비는 것처럼 보드랍다. 사용기한은 2022년 5월 9일. 지난해 말 제주시 오등동 의료용품 도매점에서 세 박스 샀다. 50매에 5000원. 코를 안전하게 감싸주는 철심이 내 몸처럼 자연스레 장착된다. 닭감기(AI) 때문이 아니었다. 먼지가 많은 양계장 일에 마스크는 꼭 필요한 존재다. 아직 넉넉하게 들어 있는 마스크 박스를 본다. 3주 정도는 아내와 쓰기엔 충분하다. 문제는 성인용. 초등학교 입학이 미뤄진 8살 딸과 어린이집에 다니는 4살 아들에겐 아내가 매일 깨끗하게 빨아서 씌운다. 어린이용은 두 장 밖에 없어서다. 아이들은 코로나19에 잘 걸리지 않는다는 풍문에 그나마 안도한다. 요전 일이 생각났다. 딸아이 어린이집 졸업식이었다. 모두가 마스크를 썼다. 미처 마스크를 쓰지 못한 한 아빠는 연신 미안하다는 얘기를 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초롱초롱 눈망울로 우리를 쳐다보던 아이들이 마스크를 쓴 채 졸업노래를 불렀다. 우린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마스크 한 장을 꺼내 들고
▲ 3일 제71주년희생자추념식에 참석한 한 유족이 4.3평화공원 각명비 앞에서 제를 지내고 있다. [제이누리=고원상 기자] “제가 태어난지 100일도 채 되지 않았던 때에요. 아버지는 아무것도 몰랐죠. 어느날 아침 마을주민들 모두 학교 운동장으로 나오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갔다가 거기서 아버지가 총을 맞아 죽었습니다.” 1948년, 4.3의 광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한 해에 태어나 제주시 조천읍 북촌에 살던 고모(71・여) 할머니. 그는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있는 각명비 앞에 앉았다. 한 없는 회상이 밀려왔다. 3일 제71주년 4.3희생자추념식 본행사가 시작되기 몇 시간 전. 고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을 떠올리며 술 한 잔을 올렸다. 고씨의 아버지가 숨을 거둔 것은1949년 1월17일이었다. 학교 운동장으로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 총살을 당했다. 고씨는 “나오라는 말에 겨울이었지만 옷도 대충 입고 나갔다고 들었다. 아버지만이 아니라 우리 식구 모두가 학교 마당으로 나갔다. 남자들은 따로 모아서 다 총살시켰다”고 말했다. “아이들과 여자들은 학교 마당에 앉아서 나오라고
1948년. 제주읍 아라리에서 살던 김평국 할머니(88)는 그해 가을 피난해온 삼도동에서 영문도 모른채 끌려갔다. “매만 죽게 맞았다. 별 기억도 안나고 매 맞은 게 아프기만 했다. 맞기만 죽게 맞았지 죽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때 매 맞은 곳이 아프다.” 김 할머니는 그해 12월 5일 불법 군사재판에서 형법 제77조(내란죄) 위반 혐의로 1년형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로 끌려갔다. 서귀포 하효동 출신 오희춘 할머니(88)는 17살의 나이에 같은 마을에 살던 한 해녀가 내민 "육지 물질을 가자"는 서류에 사인을 했다. 하지만 그게 기나긴 고통의 시작일 줄은 몰랐다. 오 할머니는 “그게 사단이 돼 서귀포경찰서에 잡혀갔고, 그후 전주형무소에 끌려갔다. 징역 1년형을 받고 10개월의 수감생활을 보냈다. 어린 처녀가 형무소 갔다 왔다는 사실로 인해 도무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농사를 지으며 살던 조병태 할아버지(88)는 4.3 사건이 터지자 전신주 보수공사에 동원됐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직후 경찰에 의해 끌려갔다. 조 할아버지는 “많이 맞았고 고문도 원 없
“소통에 힘쓰겠다. 형식을 가리지 않고 실질적인 소통에 노력하겠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지난해 7월2일 도지사 취임식을 생략했다. 그 대신 제주도청 기자실을 방문한 자리에서 본격적인 원희룡 도정 2기 체제의 화두로 '도민과의 소통'을 강조했다. 원 지사는 이날 취임사를 통해 “제주도민을 중심로 삼겠다. 도민이 도정의 주인이다. 도정의 목적도 도민이다. 도정의 힘도 도민이다. 일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도민과 함께 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선 6기 도정운영과 지방선거 과정에서 ‘소통부족’이란 혹독한 비판을 들었던 원 지사는 그렇게 ‘함께’와 ‘소통’을 강조하며 두 번째 도지사 임기를 시작했다. 원 지사의 ‘소통’ 강조는 거듭됐다. 취임 직후인 지난해 7월5일 KCTV제주방송국에서 열린 제주언론인클럽 초청토론회에서도 “소통부족 비판은 겸허하게 수용하고 반성하겠다”며 “7기 도정은 도민과 행정이 함께 일하도록 하겠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그렇게 6개월, 원 지사가 수
1961년 4월 이스라엘의 한 법정. 전 세계가 주목한 세기의 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1960년 5월 이스라엘의 정보당국에 의해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에서 체포된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이 피고였다. 아이히만은 2차 세계대전 당시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홀로코스트’의 실무 책임자로 지목된 희대의 전범이었다. 그 세기의 재판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법정을 찾았다. 그 중에는 잡지 ‘뉴요커’에 “아이히만의 재판을 취재하겠다”고 요청한 뒤 예루살람을 찾은 유대인 여성이자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가 있었다. 한나 아렌트는 이후 수개월 동안 이어진 재판 과정을 꼼꼼히 살펴봤다. 아렌트는 그 재판 속에서 아이히만이라는, 이른바 ‘세기의 범죄자’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는 점에 놀라게 된다. 아렌트가 본 아이히만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사람이었다. 평범한 남편이었고, 가장이었으며, 친절한 이웃이었다. 그런 사람이 무려
▲ 문재인 대통령이 11일 오후 강정마을 커뮤니티센터에서 강정마을 주민들과 간담회를 갖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해군기지 건설과정에서의 절차적 문제 등에 대해 강정주민들에게 사과했다. [사진=제주도청] “국가안보를 위한 일이라고 해도 절차적 정당성과 민주적 정당성을 지키지 못했다. 그래서 강정마을 주민 공동체는 붕괴되다시피 했다. 대통령으로서 깊은 유감을 표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11일 오후 4시30분 강정커뮤니티센터. 문재인 대통령은 해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갈등의 골이 깊어졌던 강정마을 주민들을 향해 '사실상' 사과했다. 또 “이제 강정마을에는 치유와 화해가 필요하다”며 “믿음을 갖고 주민들과 소통을 하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 시각. 대통령이 강조한 치유와 화해가 필요한 사람들이 커뮤니티센터 밖에 있었다. 또 다른 강정마을 주민들이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주민회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가 지난 10년의 갈등을 이제는 100년의 갈등으로 키우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 송석언 제주대 총장이 28일 제주대 본관 3층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제주대 멀티미디어디자인학과 교수 갑질 의혹과 관련해 발언을 하고 있다. [제이누리=고원상 기자] 28일 오후 2시 제주대 본관 3층 대회의실. 송석언 제주대 총장과 기자들이 자리를 마주했다. 예정된 기자회견에서 그는 멀티미디어학과 A교수의 ‘갑질’ 논란과 관련, 지금까지의 추진 경과와 부서별 조사 진행상황, 학교측 대응, 향후 계획 등을 화두로 꺼냈다. 제주대 멀티미디어디자인과 학생들은 지난 6월 12일 “A교수가 평소에 해왔던 폭언, 인격모독, 교권남용, 외모비하, 성희롱 등의 부당행위들에 침묵하지 않겠다”며 수업과 평가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어 제주대 공과대학 2호관에 해당 교수의 파면을 요구하는 현수막을 내걸고 교내 곳곳에 관련 내용을 담은 대자보를 부착했다. 제주대 인권센터는 같은달 15일 ‘인권성평등침해심의위원회’를 열고 직권조사 개시를 결정했다. 또 2차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A교수에 대해서는 학생과의 접근금지 조치를 했다. 같은 달 16일과 17일에는 교무처 차원에서 A교
▲ 제주4.3 70주년 추모식이 열린 제주4.3평화공원 인근의 동백꽃 4·3 70주년 행사장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햇빛조차 들지 않는 몇 겁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과거의 상처를 현재의 시간으로 불러내는 일은 누구에게나 버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동백이 무참히 지고 난 4월의 사람들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누구는 웃고 누구는 흰 국화꽃을 손에 들었고 또 누구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모두들 조금씩은 슬픔의 지분을 나눠가진 사람들처럼 보였다. 제주4·3은 1947년 3.1절 기념행사 중 벌어진 민·관의 충돌이 발단이 됐지만 그것은 형식적 사실일 뿐 사건의 진실은 아니었다. 그 이면엔 좌·우 대립의 역사가 자리하고 있었고 민족의 비극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2만5000명에서 3만 명에 이르는 제주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죽었다. 억울함과 황망함을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을까. 핏방울처럼 붉은 꽃을 피우는 동백나무는 남쪽 어느 지방에선 망자의 사잣밥을 전하는 도구로 쓰인다. 동백나무 줄기에 떡을 매달아 물가에 드리우면 죽은 자들이 먹고 허기진 배를 채운다는 것이다
유례가 없던 6일간의 폭설. 폭설은 한파를 동반, 제주를 초토화시켰다.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사고와 재난.재해도 속출했다. 눈이 잦아지고 낮 기온이 영상을 회복한 9일의 제주는 모처럼 평화롭다. 안도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폭설 기간 겪었던 피해와 상처가 너무나 컸고 후유증 역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도정의 무능과 탁상행정, 그리고 안전시스템의 부재를 또다시 절감해야 했다. “재난이 올 때마다 이를 감당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도민들의 몫”이라는 분노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지난 3일부터 도청과 각 행정시에 항의.민원 전화가 빗발쳤다. 폭설이 내렸던 지난달 11일과 12일보다 빈도수가 더 많을 뿐 아니라 그 강도에서도 비교할 없수 없을 만큼 격앙돼 있었다는 후문이다. SNS상에 올라온 비난수위는 더 높았고 신랄했다. “제주도는 뇌가 없는 집단”, “눈이 그친 후 기온이 올라 눈이 녹기만을 기다리는 걸 수십 년 지켜봤다”, “지난 번에도 그렇게 혼나고서도 반성이 없다”는 등 격렬한 반응이 들끓었다. &ldq
▲ 폭설이 내린 지난 11일, 신제주로터리에서 차량 몇 대가 서행을 하고 있다. 도로 전체가 쌓인 눈으로 가득하다. 역대급 폭설·강풍·한파가 이틀째 제주를 덮쳤던 지난 12일. 제주도민은 침착했다. 승용차를 아예 집에 뒀다. 출근길 시민들은 애당초 마음을 비우고 버스로 향하는 발길이 대다수였다. 심지어 ‘고립’을 자초하고 생업을 포기한 사람도 많았다. 덕분에 폭설로 인한 교통사고는 드물었다. 우려했던 ‘출근길 대란’도 눈에 띄지 않았다. 해마다 반복된 ‘학습효과’에 힘입은 제주도민들의 재난대처 방식이다. 기습적인 폭설로 교통사고로 1명이 사망하는 등 수십 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했던 전날 11일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니 제주도정의 재난대처는 무능했다. 도지사를 중심으로 대책본부를 꾸려 재난대응을 진두지휘했다고 하지만 제대로 제설작업을 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대책본부의 관심은 제주공항에만 쏠렸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2016년 1월 3일간의 폭설대란에 등장한 8만9000여명의 제주 체류객, 또 공항
▲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6년 4월3일 열린 4·3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했다. 2006년 4월3일의 일이다. 당시 대통령이던 노무현 대통령이 4·3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4년 4·3위령제에 참석할 예정이었지만 그해 3월 12일 탄핵 파동으로 참석이 어려운 처지가 됐다. 2006년 4·3위령제에서 그는 “국가권력은 어떤 경우에도 합법적으로 행사돼야 하며 일탈에 대한 책임을 특별히 무겁게 다뤄져야 한다”며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은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며 4·3영령과 유족들에게 사과했다. 그 이전인 2003년 10월 말 제주를 찾아 유족들 앞에서 정부수반으로서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된 일'이라는 걸 확인, 공식 사과한 내용을 재확인한 것이다. 당시 그는 "저는 (4·3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
▲ 15일 오후 중국인 관광객들이 빠진 제주시 연동 바오젠거리는 한산하기만 하다. 15일 오후 제주시 연동 바오젠거리. 중국인으로 들끓던 거리였지만 한산하기만 하다. 한국인지 중국인지 헷갈릴 정도로 중국어 소리가 들끓던 거리였지만 들리는 소리는 한국말이다. 손님으로 들끓던 상점가들은 파리만 날리고 있다. 매출도 며칠사이 70%나 줄어 업주들은 울상이다. 중국이 ‘한국관광 전면금지’ 조치를 내린 첫 날 바오젠거리 풍경이다. 2011년 9월 15일, 제주에 첫 ‘명예거리’가 생겼다. 2011년 9월 중국 건강용품 업체인 바오젠 그룹이 직원 1만1000명이 방문했다. 이후 대규모 중국관광객들이 이 거리를 찾았고, 제주도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바오젠거리’로 지정했다. 이후 바오젠거리는 중국인 관광객들로 언제나 붐볐다. ‘제주 속의 중국’으로 불릴 정도다. 거리의 간판은 한국어보다 중국어가 많고, 가게 앞에 내건 현수막도 중국어가 대부분이다. 지난해 6월 바오젠거리의 도로명 사용 기간이 만료됐다. 하지만 제주도는 중국 관광객 폭주 추세에 맞춰 ‘바오젠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