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돌이켜 보면 무엇엔가 홀린 듯 하기도 하다. 잠결에 진땀을 흘릴 때도 있다. 하지만 난 절박했다. 그건 분명 내 의지였다. 갈 수 있는 모든 길이 막힌 상황에서 내가 선택한 ‘최후의 출구’였다. 숙명처럼 다가온 일이다.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신조는 나에게 분연히 맞서라고 요구했다. 조국 대한민국의 부름과 은혜로 살았던 나로선 그저 한 시대의 정권에 의해 도륙날 지도 모를 나라의 운명을 조금이라도 비틀어야 했다. 국회 사상 초유의 일이라고 불려진 ‘국회 할복사건’-. 이제 그 시절에 얽힌 내 사연을 정리한다. ▲ 신구범 전 지사가 재임시절 제주시 충혼묘지에서 열린 현충일 추모식에 참석, 추모사를 하고 있다. 1999년 8월 임시국회 개원에 대비해 농림부와 손잡은 농협중앙회와 이에 맞서는 축협중앙회 간의 싸움은 더욱 치열해져갔다. 정치권은 물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적, 물적 자원과 인맥 등을 총동원해 임시국회 개원에 대비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비열했던 것은 농림부가 소위 64개 농민단체로 구성된 ‘협동조합 개혁 범농업인 시민연대(협개연)
민선 2기 도지사 선거에서 낙선한 뒤 초야에 묻혀 지냈다. 플러스생활복지연구소에서 강의를 하거나 젊은 세대들과 복지문제를 거론하며 그저 우리 고향 제주도의 ‘행복한 생활공동체’를 머릿속에 그렸다. 종중(宗中) 땅을 개간해 만든 녹차밭은 그 시절 내 땀이 스며들던 일터였다. 1999년 6월 하순 그날도 다원(茶園)을 조성할 예정인 교래리 밭 개간현장을 다녀오던 날이었다. 차를 몰고 막 교래마을을 벗어나는데 갑자기 까닭 모를 슬픔이 내 마음 속에 밀려왔다. 앞을 가린 눈물 때문에 운전을 계속할 수 없었다. 길가에 차를 세웠다. 가슴 속 울음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일하고 싶습니다." 바로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축협중앙회 이범섭 부회장이었다. 정부가 농·축협중앙회 강제통합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에 동조하는 축협중앙회장을 축협조합장들이 불신임결의로 해임했다는 것이다. “신 지사님을 축협중앙회장으로 추대하겠으니 이 어려운 시기에 와서 도와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는 그러면서 원로 조합장들이 나를 만나러 제주도로 내려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
‘인사(人事)는 만사(萬事)’라고 했던가? 1993년 12월 말 제주도지사로 부임하면서 주마등처럼 많은 일들이 내 뇌리를 스쳐갔다. 행정고시에 패스, 제주도청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 6년여 시간과 청와대와 농림수산부에서 근무했던 시간들이다. 영광도 있었지만 제주출신이란 한계에 갇혀, 육사중퇴란 학력의 굴레로, 줄을 잡지 못해 소주잔을 기울이던 과거가 떠올랐다. 그저 능력과 일로 입증하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아 찬바람을 맞으며 괴로워했던 기억들이다. 물론 육사동기들의 권력(?) 덕으로 일약 승진가도를 탔던 행운도 있었다. 하지만 측근·정실·보복인사의 폐해로 누구 못지않게 고통을 겪었기에 그런 ‘리더’가 될 생각은 애당초 꿈도 꾸지 않았다. 내 고향 제주를 번듯한 ‘대한민국 초일류 땅’으로 바꾸고 싶었을 뿐이다. 4년3개월여 지사 재직시절의 인사 비화를 밝힌다. ▲ 신 전지사가 재임시절 연말 종무식장에서 직원들에게 대통령 표창을 전수하고 있다. 제주도청에서 1967년부터 73년까지 6년간 근무했다.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첫 공직생활을 시작한 내 친정이다. 93년 말 그 친정으
1998년 6·4지방선거에서 낙선한 후 한동안 정치수사에 시달려야 했다. 단식을 불사하며 검찰의 표적수사에 저항하며 한 여름을 보냈다. 그리고 마무리됐다. 조용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됐다. 아내는 대학원에 진학,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을 이수하고자 뭍 서울로 오가는 생활을 시작했다. 책가방용 핸드백과 옷가지를 사주며 난 마치 학부모가 된 것 같은 미묘한 행복(?)감에 사로 잡혔다. 사람의 생활수준은 한번 높아지면 다시 낮추기가 어렵다고 했던가?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더 행복했다. 학교문제로 매주 서울에서 2~3일을 보내야 하는 아내는 그렇게 매주 한 차례 오전 9시40분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내가 떠나고 나면 난 집안 청소와 빨래, 쓰레기 치우기 등을 했다. 집안 살림을 독점(?)하는 느낌이었다. 사무관 시절 돈 1000원도 아끼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승용차 생활에 익숙해져 있던 아내도 어느 날 서울의 학교에 다녀와서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대중교통이 좋고 편합디다. 700원이면 지하철로 아무데나 갑니께(갑니다).” ▲ 신구범 전 지사가 재임시절 지방의회의 여성참여 확대를 위한 토론회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1993년 말 고향 제주에 관선지사로 부임한 일은 개인적으로 영광이었다. 하지만 속으론 큰 부담도 있었다. 제주가 갖고 있는 구조적 한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인당 소득이나 생산성이 전국 평균에도 못 미치는데 소비는 더 많아 건전재정이라고 보기 곤란한 제주의 가계 상황은 그렇다 치더라도 건설업에서 여행사까지 마구잡이로 난립하고 있어 심각한 위기 수준이었다. 자영업이라고 해 봐야 음식점들인데 그 시절 통계를 살펴보니 인구 100명당 식당이 하나 꼴이었다. 친·인척 등 ‘궨당’정서에 기대 그저 고만고만한 영세영업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주의 경제부흥을 이룰 방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분도 중요하지만 제주의 경제성장을 이뤄야 할 판인데 도지사가 갖고 있는 수단은 제한적이었다. 제주의 행정은 물론 재정운용의 사령탑 역할을 해야 할 곳이 제주도청인데 별다른 권한이 없었다. 대통령은 예산이라는 재정권이 있고, 한국은행의 금융통화기능을 통해 금융권을 갖고 있다. 하지만 제주도지사는 돈을 빌려줄 능력 조차 없었다. 지역경제를 책임지는 자리인데 예산이라는 것만 가진 절름발이 수준이었다. 그 마저도 조세권이 없
배고프고 괴로웠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 나이 무렵인 그 누가 그런 서러움을 겪어보지 않았을까? 그나마 감귤경제가 지탱해줬기에 우린 아이들을 성장시키고 교육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우리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 건 아무래도 순진하다. 우리 미래세대가 전진하기 위해선 고동치는 심장이 있어야 하고, 슬기로운 두뇌가 필요하리라 본다. 물론 먹고 살거리는 마련해 둬야 피가 돌아 걷든지, 뛰든지 전진의 길에 들어설 수 있으리라. 1993년 말 관선 제주도지사로 내려와 보니 고향 제주도는 생각보다 초라했다. 제주도의 1년 예산규모는 기껏 5천억원 수준이었다. 재벌 정주영 1인의 자산규모만도 못한 것은 물론 그 시절 제주출신 문정인(현 연세대 정외과 교수) 교수는 “연세대 1년 예산(8천억원)만도 못하다”고 나에게 핀잔을 주기도 했다. 1인당 지역총생산(GRDP)은 전국평균에 비해 고작 90%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소비수준은 전국평균보다 높았다. 돈은 없는데 씀씀이는 헤픈 것이다. 제주 안에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경제가 아니라 제주 밖에서 끌어들인 돈으로 연명하는 경제였다. 한마디로 너무 작은 소규모 경제였고, 자생적 성장엔진을
아내와 난 사실 사회복지 문제에 깊이 있는 지식이 없었다. 물론 먹고 살기에 급급해 살다보니 주변 이웃들을 돌아볼 기회가 적었다. 우린 어렵사리 살다 내가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나마 생계를 꾸려가게 됐고 분에 넘치는 지위와 호사를 누렸다. 그저 하늘에 고마울 따름이다. 솔직히 말하면 도지사로 부임하기 전엔 어려운 이웃들을 어떻게 돌봐야 할 지도 몰랐고, 그저 푼푼이 생기는 대로 기부나 하면 될 줄 알았지 행동으로 나서지도 못했다. 그런 우리에게 괘종시계처럼 다가온 인생사가 있다. 돌이켜보니 사회복지에 눈을 뜨게 만든 건 큰 아이와 더불어 나눴던 시간들 때문이다. 큰 아이 용인(부산지법 판사 역임. 변호사·제주대 로스쿨 교수)은 내가 고시에 합격하기 전 농사를 짓고 살 무렵 태어났다. 덜컥 생긴 아들 덕(?)에 가족을 부양해야 할 의무에 놓인 내가 고시를 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러나 큰 아이는 선천성 심장판막증이란 병명을 안고 태어났다. 선거판에서 병역비리 의혹을 받은 아이다. 하도 기침이 잦고 열이 많았지만 우리 부부는 그걸 단순 감기로 알았다. 그러다 그 시절 제주시 칠성통에 있는 이동일 내과에 가서 물어보니 “수술하지
선거에서 지고 민선 1기 도지사 퇴임식을 치른 다음날인 1998년 7월 1일. 나와 아내는 이른 새벽부터 짐을 챙겼다. 그리고 오전 8시20분 완도행 카페리에 몸을 실었다. 한 열흘간 푹 쉬다 돌아올 생각이었다. 자동차를 손수 몰아 곧바로 남해안을 내달려 김해~경주~영덕~울진~동해~강릉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올라갔다. 12시간이 넘게 운전한 끝에 다음날 새벽 2시에 숙소인 속초의 일성콘도에 도착했다. 오랜 시간 운전하며 많은 생각을 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정치현실을 몰랐고, 타협하지 않는 삶을 택했던 내 방식에 대해서도 반성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편안함이 밀려왔다. 어디에 묶이지 않은 것 같은 자유 덕인지 이상야릇한 기쁨도 마음에 자리잡았다. 마침 큰 아이 부부와 첫 손자도 속초에서 만나 오랜만에 가족애를 느낄 수도 있었다. 손자의 재롱을 보며 하루가 시작되고 저무는 나날이 행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은 내 생각대로만 돌아가 주는 게 아니었다. 그저 잊어버리려 마음을 비우고 있는 지 사흘째 되던 7월3일 며느리가 놀란 표정으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온천을 다녀오고 나서 아들 녀석과 한 시간 쯤 탁구게임을 하던 때였다. 중앙일보 사회면 톱기사
14년 전의 일이다. 강산이 뒤바뀐다는 10년도 지난 일을 떠올리고 있지만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그게 안타깝다. 그만큼의 시간을 거쳐도 아직도 그 때의 일들이 내 가슴에 또렷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 지금부터 할 얘기는 미스테리다. 지금도 의혹의 시선을 거둘 수 없고, 그 때 그 시절의 일들을 생각하면 과연 정의는 살아있는가란 자문을 하게도 만든다. 그러나 믿는다. 시간의 차이가 있었을 뿐 역사는 도도히 흘러갔다. 나 혼자만의 분노와 좌절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제주도민 사회가 과거의 잘못된 행태를 바로잡는 나침반으로 여겨 준다면 여한이 없다. 1998년 4월30일. 난 경선에서 어이없이 무너졌다. 새정치국민회의 제주도지사 후보 경선에서 아무리 곱씹어봐도 ‘말도 안 되는’ 룰의 게임에서 졌다. 하지만 패배는 패배였다. 다음날은 5월1일. ‘가정의 달’의 첫날이다. 무언가를 훌훌 털고 싶었다. 가정을 돌아볼 시간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선 다음날 출근한 나에게 한 과장급 공무원이 다가와서 말했다. “선거조직 없이 출마해서 TV토론에서 도민에게 그동안 해왔던 일을 알리고 떠나십
대선열기가 한창이다. 박근혜·안철수·문재인 3인의 치열한 경합이 마무리 되면 연말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새로운 그룹의 등장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선거전에서 여·야당의 후보를 정하는 경선과정을 지켜보며 나 역시 상념에 잠긴다. “그동안 참 많이 변했구나”를 실감한다. 지역 순회경선은 물론이고 당원과 수만명의 일반인이 참가하고 모바일투표가 위력을 발휘하는 걸 보며 먼 과거를 떠올린다. 그저 허허로운 웃음으로 되새겨보는 지난날이다. 1998년 민선 2기 도지사 선거에 도전하던 난 고작 99명의 대의원만 참가한 경선에서 꼬꾸라졌다. 그 한방으로 도지사 재선의 꿈은 무너져갔고, 그 때부터 내 정치인생 역정은 무한대로 꼬여갔다. 이제 그 시절의 얘기를 시작한다. 구좌읍 이장단 여행경비 지원 사건은 1995년 6월 민선 1기 제주도지사로 당선된 이후에도 줄곧 나를 괴롭혔다. 초대 민선지사 임기 3년 중 2년이 지난 97년 6월20일 제주지방법원에서 당선무효형인 벌금 100만원보다 적은 벌금 70만원 선고를 받고 마무리될 때까지 난 법률투쟁을 벌였다. 적용법조가 위헌소지가 있다는 우리의 주장을 받아들여 법원
제주에서 굵직한 세계규모의 환경총회를 치르고 난 지금 무한한 영광을 느끼고 있다. 행사 자체를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만큼 우리 제주의 자연환경이 세계 어느 곳에 뒤지지 않음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유네스코가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정하고 한라산 등 지역을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성산일출봉과 만장굴 등 거문오름계 일원을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한 것만 봐도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만 하다고 생각한다. 제주의 대표적 절경이자 세계자연유산을 상징하는 제주의 대표 이미지로 성산일출봉이 박힌 사진을 자주 목도한다. 너무도 뛰어난 풍광이면서도 일출봉이 발산하는 아름다움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물론 내가 어렸을 때도 자랑스러웠던 우리 제주도의 자연이다. ▲ 하늘에서 바라본 성산일출봉. [제주도 제공] 그 성산일출봉을 관선 제주도지사로 부임하고 난 뒤 2달여 만에 찾아갔다. 1994년 2월18일이다. YS정권의 실세였던 최형우 내무부 장관의 제주도 방문에 앞서 찾아간 것이다. 그의 제주 방문은 3월5일로 예정된 김영삼 대통령의 제주도 초도순시를 앞두고 대통령이 방문할 예정지인 성산일출봉 지역을 미리 둘러보기 위한 것이었다. 당연히 도지사로선 장관의 현장방문 이전에 미리 현장을 확인하는
세계자연보전총회(WCC)가 막을 내렸다. 서귀포 중문관광단지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그 행사를 지켜보며 나름 감회가 새로웠다. “이런 어엿한 시설이 있어 매머드급 세계환경총회를 열 수 있었다”는 주변에서의 얘기에 솔직히 내심 흐뭇하다. 하지만 내 업적이라고 일각에서 추켜 세울땐 미안함이 아니라 단호히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제주도민들이 합심해 이룩한 금자탑’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웬만한 도민들이 알다시피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는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 유치실패를 극복한 도민들의 도전의 결과다. ▲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전경 1996년 2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제1차 ASEM 폐막 후 차기 개최지로 대한민국이 결정되자 난 묘한 흥분에 사로잡혔다. 30개국 내외 정상들이 참여하는 ASEM을 우리 제주도로 유치할 수만 있다면 그 기회를 활용, 제주도종합개발계획 추진을 촉진하고, 제주도를 세계수준의 관광지로 발돋움시킬 수 있을 것은 물론 21세기를 향한 제주도민의 자존을 높이고 도민통합을 이뤄내는 효과도 가져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 유치전은 서울과의 경